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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낙지, 짜파구리, 밤양갱… ‘食스틸러’가 쏟아진다

[아무튼, 주말] 듣고 보면 당긴다

다 아는 맛의 유혹


조선일보

2003년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올드보이'의 한 장면. 15년간 갇혀 군만두만 먹던 최민식이 분노하듯 산낙지를 뜯어삼키고 있다. 이 장면 덕에 혐오식품으로 여겨졌던 산낙지가 서구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CJ ENM

서울 강서구에 사는 30대 직장인 안모씨. 지난달 음원 차트 1위를 달리던 비비의 노래 ‘밤양갱’을 듣다,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이 먹고 싶어져 늦은 밤 집 앞 편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요즘 노래 때문에 밤양갱도 연양갱도 동났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안씨는 “나처럼 할 일 없는 사람이 많구나 싶었다”며 깔깔 웃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니! 윤영달 크라운제과 회장은 ‘양갱의 르네상스’란 말이 나올 정도로 양갱 매출이 폭증하자 “문화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 요즘 신이 난다”고 했다. 1945년 일본인이 버리고 간 공장에서 탄생한 일흔아홉 살 양갱은 ‘할머니 간식’으로 통했다. 그런 양갱이 스물다섯 살 비비의 상큼한 멜로디와 담백한 가사 덕에 어린이와 MZ세대에 ‘갱며들었다’는 것. 유통가에선 양갱 덕에 약과·떡 등 전통 간식 매출까지 덩달아 반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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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비비의 사진과 사인이 들어간 해태 밤양갱 한정판. /이마트

“추억의 절반은 맛”(요리연구가 박찬일)이라지만, 맛의 절반은 추억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는 맛도 노래나 영화·드라마에서 감정이입이 될 만한 인물과 함께 등장한 음식은 그 감동을 혀에 새긴다. 문화 콘텐츠가 미각을 지배하고, 혀의 만족감이 산업을 돌아가게 하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이 된다.


영화에서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 음식은 ‘신 스틸러(scene stealer·주연보다도 시선을 사로잡는 조연)’란 용어에 빗대 ‘식(食) 스틸러’로 불리기도 한다.


200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우적우적 씹은 군만두, 쥐어뜯으며 삼킨 산낙지가 대표적이다. 군만두집 촬영지인 부산의 중국집에 손님들이 줄을 섰다. 해외에서 혐오 식품으로 여겨졌던 산낙지는 서구인들의 ‘낙지 챌린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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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폭발하자, 농심은 영어 등 10여개 언어로 짜파구리 레시피를 소개했다. 기생충 영화 포스터를 패러디한 짜파구리 홍보물. /농심

2020년 아카데미상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 속 ‘짜파구리’도 빅히트작. 대중적인 라면 두 가지 조합에 한우 채끝을 넣어 계층 구분 짓기를 상징한 이 레시피는 청와대의 수상 축하연 메뉴에 올랐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건 당연지사. 농심은 세계 10여 개 언어로 짜파구리 레시피를 만들어 배포했고, 아예 ‘짜파구리’ 신상품까지 출시했다.


한국 콘텐츠가 넷플릭스 등으로 세계에 실시간 유통되면서 우리 음식 인기 사이클도 빨라지고 있다. 2021년 ‘오징어게임’에 생존 게임의 하나로 등장한 달고나. 달고나 만들기 세트가 불티나게 팔리고, 동네 한구석에서 50~100원 받던 불량 식품 뽑기가 외국에서 ‘코리안 설탕 과자’ ‘오징어 게임 쿠키’로 변신해 5000원 넘는 가격에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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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코리안 페스티벌'에서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마련한 '오징어 게임 달고나 체험' 부스 모습. 세계 곳곳에서 '달고나 챌린지'가 이어졌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같은 해 오스카상에 빛나는 ‘미나리’로 미나리 매출이 급증하고 각종 미나리 조리법이 쏟아졌다. 김밥만 먹고 사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에 한국산 냉동 김밥이 완판됐고, 지난해 김 수출액이 1조원을 돌파하며 ‘검은 반도체’란 말까지 나왔다.


놀고 먹는 사람들의 힘, 이렇게나 막강하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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