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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조선일보

빛으로 물든 갱도에서, 광활한 고원에서 척박한 시대를 일구던 당신을 만났다

[아무튼, 주말]

아는 도시 뜻밖의 풍경...늦여름 떠난 태백 여행

‘하늘 아래 태백’이라 했다. 국내 도시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태백은 평균 해발고도 902m로 마을과 마을이 산을 끼고 거리를 두고 있어 조용히 여행하기에도, 정선·영월·삼척 등 인근 도시를 넘나들며 ‘드라이브 스루’ 여행 하기에도 좋은 여행지다. ‘폐광 지역’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발전이 더딘 도시지만 덕분에 소도시의 매력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7월을 전후로 새로운 여행지가 하나둘 추가되고 관광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태백 여행에 재미가 더해지고 있다. 아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게 더 많은 태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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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보광업소' 폐갱도를 미디어 아트 전시관으로 꾸민 '통리탄탄파크'의 작품 '울림'.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폐갱도서 미디어 아트로 만나는 광부 이야기

안전모를 고쳐 쓴 광부들이 비장하면서도 힘차게 갱도를 나선다. 컴컴한 갱도 안에서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그들의 하루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한때 산업화의 숨은 주역이라 불렸던 그들의 뒤안길을 따라가는 영상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요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전시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공간의 힘은 그렇게 무서운 법. 폐광 지역의 숨이 멈춘 갱도에서 흘러나온 10분짜리 짤막한 영상은 잊혀간 광부들의 삶에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7월 통동에 문 연 미디어 아트 전시관 통리탄탄파크(033-554-8853)는 ‘옛 한보광업소’의 폐갱도에 숨을 불어넣어 미디어 아트 체험장으로 꾸민 곳이다. 옛 한보광업소는 1983년 개광해 한때 통리마을의 번영을 이뤘던 중심축이었다. 2008년 폐광 후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가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장이 자리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유시진 대위(송중기)와 강모연(송혜교)만 추억하기에 어쩐지 아쉬웠던 공간에 드디어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시설이 더해졌다. 드라마 세트장을 지나 ‘기억을 품은 길’이라 적힌 폐갱도에 들어서면 갱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색색 조명이 마중 나온다. 시공간의 이동을 테마로 한 컬러 램프 조명 ‘타임 홀’이다. 이어 광부의 하루와 태백의 사계를 담은 일러스트 영상 ‘기억의 터’를 감상하고 나면 빨랐던 발걸음이 차츰 느려진다. LED 볼로 천장을 장식한 ‘기억의 빛’, 관람객의 발걸음에 반응해 빛을 발하는 파티클 그래픽 등을 지나 수많은 LED 전구가 구슬처럼 반짝이는 ‘환희’ 작품 안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만다. 빛과 거울로 꾸민 터널 ‘무한’까지 빛과 함께하는 ‘갱도 산책’은 색다른 경험이다.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각 전시관에선 센서를 터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디어 아트를 체험할 수 있다. 전시관인 갱도와 갱도 사이에는 야외 산책로가 있다.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잠시 빛을 쬘 수 있는 구간이다. 야외 산책로의 대형 종이 비행기 포토존에선 백두대간을 배경으로 종이비행기를 타고 나는 듯한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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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탄탄파크'의 미디어 아트 작품 '환희'. 수많은 LED 전구는 센서가 작동할 때마다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전시관인 갱도는 빛을 최소화해 많이 어두운 편이다. 노약자는 보호자와 동행해 관람하는 게 안전하다. 통리탄탄파크 본관에서는 증강 현실(AR) 체험 포토존, 슈팅게임 등이 기다린다. 이용료는 현재 어른 9000원, 청소년 7000원, 어린이 5000원. 통리역을 활용해 세계여행 테마파크로 꾸민 오로라파크(033-554-8850)와 ‘통합 이용료’를 적용하고 있다. 매표하면 표 하나로 두 곳 모두 이용 가능하다. 매주 월요일 휴관.

​옛 탄광촌의 풍경을 복원·보존한 '철암탄광역사촌'. 슈퍼와 치킨집, 식당들은 사료전시관,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 한준호 영생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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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탄탄파크 전시관 관람 후 광부의 실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마을로 이어가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철암동 철암탄광역사촌(033-582-8070)은 옛 탄광촌의 주거 시설을 복원·보존한 생활사 박물관이다. 마을 전체가 30년 전 번화했던 탄광촌 풍경 그대로 멈춰 있다. 마을 모퉁이 집이었을 ‘붐비네 아구찜’의 낡은 간판은 퇴락한 마을의 전성기 시절을 대변하는 듯하다. 광부들이 일을 마치고 맥주잔을 기울이던 치킨집 ‘페리카나’는 사료전시관으로, ‘호남슈퍼’ 지하는 사진갤러리로 활용 중이다. ‘진주성’은 뮤지엄숍과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마을 앞 철암역두선탄시설(033-550-2879)은 탄광에서 채굴된 원탄을 선별하고 가공하는 국내 최초 무연탄 선탄 시설로 1935년 건립돼 현재도 가동 중이다.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됐다. 시대와 지역을 상징하는 중요시설물로 ‘태백 관광’ 홈페이지에서 탐방 예약을 하면 장화 세척장부터 방한갱도, 연탄 공장, 선탄장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철암탄광역사촌 전시관 및 시설 내부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월 첫째·셋째 월요일 휴관.

매봉산 '바람의 언덕'에서는 백두대간이 뿜어내는 날숨을 맛볼 수 있다. 광활한 고랭지 채소밭은 화전민들이 일군 땅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더해져 태백의 관광 명소가 됐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백두대간 대자연에서 피크닉

“태백 여행하시는 분 중 열에 아홉은 하늘 아래 태백에서도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바람의 언덕’을 빼놓지 않고 들릅니다. 지금은 고랭지 배추 출하 시기라 작업 차들이 오갈 땐 일반 차량 통행을 금지하기도 해요. 농번기 땐 이른 아침이나 일몰쯤 찾아가야 바람의 언덕 정상까지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산소 도시’ 태백에서도 전망 감상 명소로 꼽히는 매봉산 풍력발전단지인 바람의 언덕. 김광중(64) 태백 관광 택시 팀장의 안내에 따라 해 질 녘쯤 찾아간 바람의 언덕에는 통행 가능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차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밭과 밭 사이 비탈진 좁다란 농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지만, 길의 중간중간 마주한 풍경은 차를 수시로 멈추기에 충분했다. 이제 막 수확을 마친 밭과 곧 수확을 앞둔 밭은 마치 패치워크 작업을 한 거대한 융단 같았다. 강릉의 고원마을 안반데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산의 능선 때문인지, 해발 1200여m 약 133㎡(40만평) 고랭지 채소밭과 어우러진 하얀 풍력발전기의 풍광 앞에선 가슴이 뻥 뚫렸다.


바람의 언덕 일대 고랭지 채소밭은 1960년대 초반 정부 지원 한미재단에서 화전민 정착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시절 화전민이 억척스럽게 일궈낸 산꼭대기 땅은 40~50년이 흐른 지금 명품 고랭지 채소를 대량 생산하는 곳이자, 태백8경 중 하나로 꼽히는 관광 명소가 됐다. 여름 성수기(29일까지)엔 셔틀버스까지 운행(삼수령 주차장~매봉산 전망대)한다. 일각에선 거대한 풍력발전기로 인한 풍광 훼손에 대한 염려도 있으나 최근 5년간 평균 1만2300여 명이 방문할 만큼 외지인에겐 매력적인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연중 개방하나 농번기 작업 시간에 일부 구간 통행을 제한하기도 한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진 동호인들은 요즘 같은 계절엔 아예 작업 차량 이동이 적은 이른 아침 일출 시간대나 은하수를 볼 수 있는 야간 시간대에 찾는다. 바람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 해발 920m 지점쯤엔 ‘삼수령(三水嶺)’이 있다. 비가 내리면 물줄기가 서쪽 한강, 동쪽 오십천, 남쪽 낙동강으로 갈라진다는 분수령이자 발원지다. 걸어 올라간다면 잠시 의미를 되새기며 들렀다 가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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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문을 연 '몽토랑 산양목장'에선 방목하는 산양들과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대자연 속에서 목장 체험은 어떨까. 바람의 언덕에서 10여 분 거리, 화전동엔 지난 6월 몽토랑 산양목장(033-553-0102)이 문을 열었다. 해발 800m 백두대간에서 산양(젖염소)과 어우러져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방목장이다. 알프스를 연상케 하는 친환경 목장은 개장 두 달 만에 태백의 ‘핫플’로 떠올랐다. 주말 평균 일 방문객만 1000여 명, 평일에는 평균 300여 명이 찾는다. 하얗고 온순한 산양들은 능숙한 직원처럼 목장을 안내하듯 방문객을 이끈다. 몸이 닿는다고 깜짝 놀라는 건 오히려 사람 쪽이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뿐 아니라 젊은 커플, 중·장년층도 목장에 서면 동심으로 돌아간다.

'한국의 알프스'를 꿈꾸는 태백 '몽토랑 산양목장'. 해발 800m에 있어 주변 전망 감상은 덤이다. 멀리 매봉산 '바람의 언덕'의 풍력발전기도 보인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몽토랑 산양목장은 태백 토박이인 이곳 박성율(58) 백두대간 주식회사 대표가 자신이 어린 시절 뛰놀던 젖소 목장을 15년 전 인수해 ‘한국의 알프스’를 꿈꾸며 가꾼 곳이다. 전체 약 47만㎡(14만여 평) 중 목장으로 사용하는 면적은 총 6만여 평, 방목지로 개방한 공간만 2만여 평에 이른다. 알프스 산양 목장을 견학한 후 목장을 꾸미기 위해 3년 전 입양했다는 뉴질랜드 출신 산양 20마리는 어느새 가족을 이뤄 100마리로 늘었다. 이곳 산양들은 매일 산양유 40~50L를 생산한다. 목장 옆 카페에선 당일 생산한 산양유로 만든 음료와 빵 등을 맛볼 수 있다. 신선한 ‘산양유’와 산양유 크림을 넣은 ‘산양빵’ ‘산양유 아이스크림’이 대표 메뉴다. 고원 지대에 있으니 어디서든 풍경 감상은 덤이다. 피크닉용품 등을 대여해주는 피크닉 세트는 2만9000원부터 5만9000원까지, 예약자에 한해 목장에선 아기 산양 젖 주기 체험, 아이스크림 만들기 체험 등도 해볼 수 있다. 카페 이용은 별도, 목장 초지 입장료는 5000원이다.

'강물이 산을 넘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구문소(오른쪽). 나란히 있는 인공 석문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고생대 신비 ‘구문소’부터 ‘비와야폭포’까지

태백은 ‘삼수령’을 비롯해 한강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연못’ 등이 있는 곳. ‘발원지 탐방로’가 조성돼 있을 만큼 물에 관한 이야기가 철철 흘러넘친다. 1년 365일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시내 한복판의 ‘황지연못’도 유명하지만 최근 여행객들 사이에서 다시 떠오르는 곳은 강원 고생대 국가지질공원 사이트이면서 천연기념물 417호로 지정된 동점동 구문소(033-581-8600)다.


‘황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점동에 이르러 큰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석문을 만들고 소(沼)를 이루었다’는 도강산맥(渡江山脈·강물이 산을 넘는다) 전설의 ‘현실판’ 공간이다. 한마디로 물이 석회암 바위를 뚫은 지형으로 구문소에 얽힌 전설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주변은 기암절벽,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신비함을 자아낸다. 구문소 옆 도로로 난 인공 석문은 1937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다. 타원형 석문을 배경으로 최근 기념사진 찍는 이들이 늘면서 ‘도로 위 사진 촬영 주의’ 문구가 붙었다. 구문소와 나란히 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033-581-3003)이 나온다. 특이하게 고생대 지층 위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구문소를 비롯해 주변 고생대 지질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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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야만 폭포를 볼 수 있는 '비와야폭포'는 비가 안 올 땐 평범한 석회암 절벽이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태백 여행을 할 때 뜻하지 않게 비가 내린다면 가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장성동에 있는 비와야폭포다. 양지마을 동네 안쪽에 있는 높이 약 40m의 석회암 절벽으로 비가 오지 않는 날엔 그저 평범한 암벽처럼 보이지만 이름처럼 ‘비가 와야’만 새하얗고 힘찬 물줄기를 쏟아낸다.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폭포수가 떨어졌다가도 소나기가 그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폭포가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비와야폭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장마철에만 ‘이름값’ 하는 폭포”라고.


[ ‘연탄 한우구이’ ‘물닭갈비’··· 광부들이 즐겨 먹던 ‘태백의 맛’ ]


태백은 ‘고기서 고기’다. 황지자유시장 일대만 해도 ‘태백식육점’ ‘부래실비’ ‘시장실비’ 등 ‘한우’ ‘실비’를 내세운 고깃집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일 정도로 눈에 띈다. 값비싼 한우라지만 이 시장에서만큼은 겸손해보인다. 밥집⋅선술집 분위기의 식당에서 한우 연탄구이를 맛볼 수 있다. 실비란 ‘실비용만 내고 (부담 없이) 먹는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썰’이 유력하다. 실비집 한우 가격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180~200g에 3만~3만2000원 선. 가격이 확연히 저렴한 수준은 아니어도 시장에서 한우를 편히 즐길 수 있는 분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원조’를 내세우는 집들도 있지만 맛은 결국 고기서 고기다.


물닭갈비도 빼놓을 수 없다. 인근 도시인 삼척 등지에서도 맛볼 수 있는 물닭갈비는 모두 ‘태백식’이다. 태백에 탄광 산업이 번성했던 시절에 광부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양념 닭갈비에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끓여먹는 물닭갈비는 석탄 가루를 많이 마신 광부들이 칼칼해진 목을 달래기에 그만인 국물 요리 중 하나였다.


황지동 김서방네닭갈비의 물닭갈비(7000원)는 현지 주민들도 즐겨 찾는 맛집 중 하나다. 우동·쫄면 등 ‘사리’ 가격(모두 1500원)이 부담 없다. 쑥갓을 푸짐하게 올려주는 것도 특징이다. 국물이 맛있으니 볶음밥(2000원)은 필수. ‘몽토랑 산양목장’ 부근 초막 고갈두는 조림을 전문으로 한다. 물닭갈비의 칼칼한 맛에 도전하는 ‘고갈두’가 인기다. 고갈두란 고등어·갈치·두부 조림의 약자. 대표 메뉴도 세 가지다. 생선 조림은 2인분씩 주문 가능하며 두부 조림은 1인분도 주문 가능하다. 밥에 쓱쓱 비벼 먹는 두부 조림을 찾는 이들이 많다.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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