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불교를 ‘테이크아웃’하다

햄버거·핫도그·김밥…

‘선 넘는 절밥’ 대중화

힙해진 스님 스타일

극락버거(9800원), 왕생핫도그(8800원), 극락왕생세트(2만3600원)….


경건한 이름과 사뭇 다른 속세의 맛. ‘화엄사 템플 버거’에 가면 먹을 수 있다. 천년 고찰 지리산 화엄사(華嚴寺)가 비건 식품 업체와 손잡고 론칭한 햄버거 가게. 지난달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몰에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사찰이 웬 햄버거를? 의아하겠지만 빵·치즈·소스까지 모두 식물성 재료로 만들었다. 특히 콩 단백질 등을 활용한 패티는 “진짜 소고기 맛을 내기 위해” 1년간 연구했다고. 실제 이 버거를 먹어본 뉴진 스님(개그맨 윤성호)은 “일반 햄버거와 맛이 똑같다”며 놀라워했다. 육식 때문에 파계할 걱정은 없어진 것이다.



조선일보

최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몰에 선보인 '화엄사 템플버거' 팝업 스토어. 오른쪽이 바로 '극락버거'다. /그린마타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재밌는 건 못 참는 젊은 세대가 특히 열광했다. 소셜미디어로 활발히 퍼날랐다. “배 안 고픈데 궁금해서 사 먹었다”는 고객까지. 건강 혹은 종교적 이유로 채식이 필요한 외국인도 여럿이었다. 지난달부터 33일간 운영된 팝업 스토어에 5000여 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됐다. 인기가 검증되면서 다음 달 구례 화엄사 진입로 인근에 ‘화엄사 템플 버거’ 1호점이 정식 개점할 예정이다. 관계자는 “어느 나라든 청년들의 가장 보편적인 식문화 중 하나가 햄버거 아니냐”면서 “문화로 자연스레 접촉하며 불교 철학을 전파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음식, 만인에게 다가가기 가장 손쉬운 포교의 방식. 화엄사는 내친김에 ‘템플 김밥’까지 내놨다. 냉동식품 기업과 함께 사찰식 김밥을 개발해 미국·유럽·호주 등지에 수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채식 열풍과 건강식을 화두로, 최근 미국에서 대박을 일군 ‘K김밥’의 상승세를 이어가겠다는 포부. 사찰식 냉동만두 및 비빔밥, 천연 고추장 및 음료 출시도 준비 중이다. 화엄사 관계자는 “한국 사찰의 채식 문화와 생명 존중 사상을 세계에 알리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조계종이 개발에 참여해 출시한 '스파이 버거'. 진짜 고기는 아니다. /도반HC

국내 불교 최대 종파인 대한불교조계종도 햄버거를 출시했으니 ‘선 넘는 절밥’은 이미 파죽지세다. 스파이처럼 고기 아닌 고기가 은밀히 숨어있다는, 이름하여 ‘스파이 버거’. 바베큐·오징어맛 2종으로 지난해 출시된 냉동식품으로, 종단 수익 구조 다변화 차원이다. 젊은이들이 더 유입돼야 종교에도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 버거’ 출시 당시 화계사에서 어린이·청소년 법회 참가자 대상 비건 햄버거 시식회를 진행한 이유다. 조계종 사업지주회사 도반HC는 CJ제일제당과 함께 ‘사찰식 팥죽’ ‘꽈리고추 식물성 장조림’을 내놓기도 했다.


가장 폭넓은 기호 식품, 커피가 빠질 수 없다. 중국 항저우 영복사(永福寺)는 2021년 경내에 카페 ‘시베이 커피’(慈杯)를 차렸다. 불자 확장은 중국에서도 큰 고심거리. 대중적 공간 ‘절간 카페’를 새로운 포섭용 브랜드로 내세운 것이다. 경산사(徑山寺) ‘미아오시(妙喜) 커피’, 영은사(靈隱寺) ‘Seed Coffee’…. 불교 성지로 유명한 중국 오대산(五臺山)은 지난해 패스트푸드 업체 KFC와 제휴를 맺고 신상 커피를 선보였다. 아라비카 원두에 우유를 가미한 ‘샌들우드 라떼’. 부처님께 절 올릴 때 누구나 속으로 되뇌는 말이 컵 겉면에 적혀 있다.“ 모든 일 잘 풀리고, 바라는 바 모두 얻기를(顺遂无虞 皆得所愿).”



조선일보

중국 불교 성지 오대산(五臺山)이 패스트푸드 업체 KFC와 함께 출시한 신상 커피 '샌들우드 라떼'. /KFC

산사의 차(茶)는 점차 커피로 바뀌고 있다. 이미 조계종은 OEM 방식으로 제작한 커피 ‘승소(僧笑)’를 판매하고 있고, 커피를 공부해 전문 바리스타 수준으로 커피를 내리는 스님도 적지 않다. 지난해 4월 롯데관광은 ‘사찰 커피 여행’ 상품을 출시했고, 커피의 고장 강릉에 있는 현덕사에서는 스님과 함께 커피를 볶고 음미하는 유료 프로그램 ‘솔바람 커피향’을 운영한다. 한 잔의 커피가 종교의 문턱을 낮추고, 자연스러운 대화의 매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업주의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이미지 개선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다. 달라진 메뉴판처럼 불교가 ‘힙한’ 종교로 간주되면서 거리감이 줄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종교인 비율에서 불교(30.6%)만 유일하게 소폭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리서치 ‘2024년 종교 인식 조사’에서도 불교(51.3점)의 호감도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