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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봄바람처럼 쉽게 날아가는 메밀 풍미… 그 찰나를 즐기려 직접 갈고 면을 썬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메밀국수 편

서울 신촌 '스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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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 '스바루'의 '오리메밀'.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거뭇거뭇 까만 점이 박힌 메밀면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메밀면만 먹으면 소화가 안 되니 무를 잔뜩 넣어서 먹으라는 것도 그때 배웠다. 두 아들을 키우던 부모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고기 뷔페를 자주 갔다. 동생과 나는 주 종목이 달랐다. 동생은 단가가 제일 비싸다는 오리 로스, 나는 후식으로 내놓은 메밀국수였다. 무즙, 겨자, 김, 파로 양념하고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를 우린 쓰유(맛간장)를 부었다. 똬리를 틀어놓은 메밀면을 두 덩이씩 넣었다. 한 젓가락에 메밀면 한 덩이가 입속으로 사라졌다. 젓가락질을 두 번 하고 나면 리필을 하러 일어섰다. 네 번쯤 작은 그릇을 들고 왕복했을 때 카운터 보던 뷔페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단맛이 진하게 남는 쓰유도, 질긴 맛이 하나 없는 메밀면도, 서걱거리는 무즙과 찌르르 코를 울리는 겨자 맛도 좋았다. 입맛은 어릴 적 기억을 따라갔다. 회사를 다니면서 단맛이 강하고 풍성한 맛의 한국식 메밀국수집을 해장 겸 자주 찾았다. 면 삼키기가 부담스럽지 않고 낮은 온도감에 속도 덜 부대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일본에서 찾은 메밀국수는 이전까지 먹던 것과 달랐다. 집마다 다르지만 대개 단맛이 덜했고 면의 식감도 쫄깃하기보다 단단한 편이었다. 메밀의 풍미는 봄바람처럼 쉽게 날아가며 알아채기 힘들다. 그 찰나의 맛을 즐기기 위해 메밀을 직접 갈고 손으로 반죽해 면을 썬다. 정겨운 맛은 덜하지만 세심한 정취에 몸이 이끌어질 때가 있다.


서울 교대역 인근 낮은 건물에 자리한 '미나미'는 직접 면을 뽑아 내는 몇 안 되는 집 중 하나다. 잘 갈린 칼처럼 말끔한 실내에 들어서 자리에 앉으면 먼저 메밀면 튀김이 놓인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성의 표시다. 메뉴판을 펼치면 생경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선회 같은 요리도 가짓수가 꽤 된다. 가격대도 전반적으로 낮지 않다. 메밀의 종류와 수확 시기를 일일이 밝혀놓은 수고와 주인장의 노고를 따지면 함부로 숫자 계산을 할 수 없다.


냉소바는 메밀면의 색과 굵기에 따라 종류를 나눴다. 부드럽게 입에 감기는 편이 좋다면 '세이로-시로(せいろ-白)' 쪽이 낫다. '하얗다'는 이름처럼 향이 은은하고 혀에 닿는 감촉도 나긋나긋하다. 찬 바람에 차가운 면이 당기지 않는다면 따뜻한 종류도 괜찮다. 특히 훈연하여 절인 청어를 올린 '니싱 소바'는 한번쯤 먹어볼 필요가 있다. 단단한 면은 따스한 국물을 만나 몸을 푼다. 불을 쐰 청어의 살점은 흑설탕 사탕을 씹은 것처럼 단맛이 쭉 올라오다가도 등 푸른 생선의 짭조름한 맛이 혀에 툭툭 얹힌다. 후끈하고 시원한 국물을 한국식으로 꿀꺽꿀꺽 마시면 굽었던 어깨가 쫙 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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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름과 김, 깻잎, 들깨, 쓰유(맛간장)에 버무려 먹는 '들기름메밀'.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신촌에 가면 방배동에서 자리를 옮긴 '스바루'가 있다.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노신사가 주방에서 손수 일하는 이곳 역시 칼같이 깨끗한 홀과 주방은 기본이다. 카레, 냄비우동, 김치나베 같은 익숙한 메뉴도 여럿 보인다. 이 집은 그중에서도 '오리메밀'을 거쳐갈 필요가 있다. 걸쭉하게 뽑아낸 오리 육수에 차가운 메밀면을 찍어 먹는다. 탁탁 끊기는 메밀면에 서린 기품이 서늘한 향을 타고 전해진다. 오리 기름이 우러난 육수 덕분에 차가운 기운은 덜하고 몽글몽글 둥글게 어우러진 맛이 더해진다. 도톰한 오리고기는 유자, 고추, 소금을 절여서 만든 '유즈코슈'에 찍어 먹는다.


새롭게 내기 시작한 '들기름메밀'은 한결 친숙한 모양새다. 들기름과 김, 깻잎, 들깨를 뿌린 메밀국수가 쓰유와 함께 한 상에 올라온다. 쓰유를 뿌리기 전에 먼저 면만 먹어본다. 그 자체로도 풍성한 향이 위장 가득 들어찬다. 쓰유를 뿌려 간을 하고 다시 한 젓가락 먹는다. 메밀의 시원한 바람 너머 들기름의 구수한 연기가 느껴진다. 빈 그릇을 앞에 두고 웃으며 앉은 사소한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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