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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 장사 20년, 남은 빚 2억… “그래도 학생들 있어 행복”

고려대 명물 영철버거 20주년, 이영철 대표


지난 14일 점심시간 고려대 앞 ‘영철버거’. 위생 두건을 두른 사장 이영철(52)씨는 학생들에게 버거를 내고 있었다. 주방에서 혼자 버거를 만들고 있는 사람은 아내 이계숙(53)씨. 30평 가게를 두 부부가 주 7일 운영한다고 했다. 이영철씨는 “매일 오전 9시에 일어나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2~3시까지 장사하고, 4~5시가 돼서야 집에 들어간다”면서 “그래도 학생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웃었다.


5년 전, ‘고대 명물’이라던 영철버거 본점이 폐업했다. 1000원짜리 버거를 파는 리어카 노점에서 시작해 한때 전국에 80여 가맹점을 냈고, 2004년부터는 고려대에 매년 2000만원을 기부했을 정도로 성공했던 영철버거였기에 폐점 소식은 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얼마 후, 고려대 학생들이 영철버거의 부활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으로 6800여 만원을 모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철버거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2016년 재개점했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언론에 알려진 영철버거 소식이었다. 5년이 흘렀고, 지난달 영철버거는 창업 20주년을 맞았다. 14일 서울 성북구 영철버거에서 사장 이영철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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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돈까지 ‘영끌’해 매장 냈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부끄럽지만, 사실 2018년 또 한번 망했습니다. 여러 분의 도움으로 120평 매장을 차렸는데, 아무리 버거를 팔아도 월세 750만원이 감당이 안 되더군요. 학생들이 모아 준 돈도 다 날렸고, 개인 빚도 5억을 넘겼죠. 무엇보다 나를 믿어준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우울증에 대인 기피증까지 찾아와 4개월 동안 방에서 꼼짝을 못 했죠.”


–그런데 지금은 다시 매장을 운영하고 있네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2019년 남은 돈을 ‘영끌’해 이곳에 30평 규모의 작은 매장을 냈어요. 가족 월세방을 빼고, 딸 퇴직금까지 빌렸습니다. 고깃집을 인수해 시작했는데, 인테리어비가 없어 환풍구도 못 뗐어요. 그래도 그 나름대로 분위기 있지 않은가요?(웃음)”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오픈 전 준비를 정말 많이 했어요. 우선 기존 버거 메뉴를 다 갈아엎었고, 밤에는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 형태로 꾸몄습니다. 다행히 학생들이 새 메뉴를 많이 좋아해 줘요. 1년 반 만에 빚을 3억원 가까이 갚아 이제 2억 정도만 더 치르면 됩니다.”


–코로나로 자영업이 힘든데, 영철버거는 건재한가 보군요.


“학생들 덕분이에요. 메뉴 개발부터 가격 책정까지 전 과정을 학생들과 상의했습니다. 2020년 대학생들이 어떤 버거를 좋아할지 학생들이 알려준 거죠. 지금 메뉴판도 재학생이 만들어준 거예요. 전 재개점 후 지난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힘들 때 손 내밀어 준 학생들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어요. 얼른 빚을 갚고, 다시 학생들과 웃으며 일해야죠.”


–아직도 졸업생들이 많이 찾는다고요.


“장사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학생이 많았어요. 천원짜리 버거로 한 끼를 때우는데,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재료를 꾹꾹 눌러 담아주기도 했고, 버거를 공짜로 주는 날도 많았죠. 그때 쌓인 유대감이 평생 가나 봐요. 내가 힘들다는 얘기가 퍼지자, 지방 공기업에 다니는 한 졸업생이 선뜻 3천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건네줬어요. 오랜 시간 취업이 안 돼 내게 의지를 많이 하던 친구였는데, 거꾸로 제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준 거죠. 학창 시절 우리 집에서 알바를 하던 다른 졸업생은 로스쿨생 신분인데도 부산에서 올라와 내 주머니에 억지로 100만원을 넣어주는데, 눈물이 찔끔 났어요. 홀로 서울 유학을 와서 내가 밥을 자주 사주던 친구예요. 너무 고맙고 미안하죠."


이영철씨는 영철버거를 시작하기 전 인생을 ‘밑바닥’이라 표현했다. 1968년생인 이씨는 전남 해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는 이씨가 열한 살 되던 해 세상을 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건 빚뿐이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이씨도 학교를 그만두고 형과 함께 상경했다. 생활비라도 직접 벌어보자는 요량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어떻게 살았나요.


“처음엔 친척이 알아봐 준 화곡동의 목걸이 공장에서 일했는데, 1년 만에 망했어요. 그다음부터는 말 그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죠. 중식당부터 시작해 군복 공장, 스탠드바, 레스토랑, 포장마차까지. 그러다 지금 아내가 임신하면서 92년 막노동판에 뛰어들었죠.”


–공사 현장에선 무슨 일을 했습니까.


“벽돌 쌓는 조적공이었어요. 현장에선 ‘쓰미’라 부르죠. 그런대로 손재주가 좋아 꽤 인정을 받았어요. ‘오야지(사장)’ 다음 가는 ‘세와(작업 반장)’였고, 일당도 최고 15만원씩 받았어요. 그러다 1998년 허리 디스크가 생겨 일을 더 할 수 없게 됐고, 설상가상으로 IMF 때 회사마저 부도가 났어요. 졸지에 신용 불량자가 됐죠. 월세 낼 돈도 없어 보문동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작한 게 2000년 리어카 노점입니다. ‘영철버거’의 시작이죠.”


–오랜 시간 막일꾼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천원 버거를 개발했나요.


“식당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으니까요(웃음). 당시 알던 재료상이 ‘외국에 나가봤더니 핫도그 빵에 고기와 양배추를 잘게 쪼개 담은 버거가 유행이더라’는 얘기를 흘리듯이 했는데, 거기 꽂혀서 연구를 시작했죠. 학생들 주머니 사정을 아니까, 돈을 많이 받을 수 없더라고요. 천원이 딱 맞는다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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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고려대 앞 '영철 스트리트 버거'에서 일하는 이영철씨. 2000년 리어카 노점으로 시작해 당시엔 작은 매장을 운영했다. /조선일보 DB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한 스트리트 버거가 소위 ‘대박’을 쳤습니다.


“천원을 내면 버거에 콜라까지 무한 리필을 해준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단골이 크게 늘었죠. 하루에 버거 3천개를 판 날도 있으니까요.”


–전국에 분점도 80곳이나 냈는데, 왜 경영이 어려워졌나요.


“천원짜리 버거를 팔아 돈이 얼마나 남겠어요. 본점은 유명해진 덕에 그나마 현상 유지라도 됐지만, 분점들은 매달 적자를 수백만원씩 봤어요. 거기에 재료 값까지 오르면서 2009년 결국 스트리트 버거를 포기하고 ‘고급 수제 버거’로 리브랜딩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됐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영철버거는 언제나 1000원이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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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 겁니다"


이씨는 고대생들 사이에서 ‘기부 천사’로 이름났다. 2004년부터 고려대에 장학금 총 1억200만원을 전달했다. 경영이 나빠지던 때도 연세대와 정기 교류전을 할 때마다 공짜 버거를 뿌렸다. 빚까지 내가며 기부를 이어가는 이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이씨는 “내가 돈만 밝혔으면, 영철버거는 한참 전에 없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선행도 좋지만, 장사 수완도 중요하지요. ‘좋은 일을 한 건 맞지만, 성공한 장사꾼은 아니다’라고 한다면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전 큰돈 벌 재주꾼은 못 돼요. 하지만 내가 처절히 실패했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준 건, 나와 웃고 울던 학생들이었어요. 그들이 없었으면 지금 영철버거가 남아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대학 앞 햄버거 장사 20년,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나는 열한 살에 집 나가 막노동판에서 굴러먹던 천한 인생이에요. 살면서 누구한테도 관심 받은 적 없었죠. 그러던 내가 장사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아들딸뻘 학생들과 맥주 한잔 놓고 인생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내 삶의 가치를 찾아준 건 학생들이에요. 제가 힘들 때 5000원, 1만원씩 모아 건네준 것도 그들이고요. 학생들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습니다.”


이제 영철버거에 ‘천원 스트리트 버거’는 없다. 대신 이씨는 새 메인 메뉴 이름을 ‘돈 워리 버거(단품 4900원)’라 붙였다. “학생들이 내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아저씨는 꼭 다시 일어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돈 워리’라고 이름 붙였죠.” 인터뷰를 마치고 주방으로 돌아가는 이씨 표정은 여느 때처럼 밝았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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