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일·요리하는 치매 환자들… 네덜란드에 이런 농장 1000개
청년 미래탐험대 100
네덜란드의 치매노인 '케어팜'
치매환자 돌봄 관심 많은 20세 노지후씨
네덜란드 동부 소도시 헹엘로에서 버스로 20여분을 달리면, 들판 한가운데에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농가 세 채가 보인다. 1912년에 문을 연 에르베 니퍼트 케어팜이다. 우리말로 '케어팜(care farm)'은 '돌봄 농장'이란 뜻. 복지 시설에 갇혀 여생을 보내야 하는 치매 노인들이 자기 집에 머무는 것처럼 농사를 짓고 요리도 한다. 그러면서 신체적·정신적 치유를 얻는 대안 복지 모델이다. 바헤닝언 케어팜연구소의 조예원 대표는 "농업 국가인 네덜란드엔 1000곳이 넘는 케어팜이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동부 에르베 니퍼트 케어팜에서 자체 제작한 2인승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누비는 치매 노인들. 두 손 두 발을 온종일 놀려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게 케어팜의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환자들은 이동하는 것도, 먹는 것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왼쪽 사진). 탐험대원 노지후(맨 오른쪽)씨가 지난달 농장 주인 마르가 브로키스(오른쪽에서 둘째)씨와 함께 치매 노인들이 손수 차려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오른쪽 사진). /에르베 니퍼트 케어팜·김경은 기자 |
13년간 치매를 앓았던 내 할머니는 삶의 마지막 5년을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부모님은 많은 돈을 썼지만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침상에 누워 호스로 영양식을 받아먹는 삶. 그런데 네덜란드에선 치매 노인들이 스스로 밭을 갈고 옷도 만든단다. 과연 그럴까. 궁금했다.
'자급자족'이 핵심 가치
지난달 농가 입구에 들어서자 닭들이 노래를 불렀다. 농장주인 마르가 브로키스(58)씨가 치매 환자 롭(65)과 나란히 걸어와 반기는데, 누가 농장주이고 환자인지 겉만 봐선 알 수 없다. 전직 간호사인 브로키스씨는 2006년부터 치매 노인들을 위한 '낮 케어팜'을 운영하고 있다. 자동차로 1~2시간 거리 이내에 사는 노인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만 농장에 머무는 형태이다. 의료진과 복지사들이 방문 횟수를 정해주면 노인들은 원하는 케어팜에서 허가받은 시간만큼 지낸다.
롭은 이틀에 한 번씩 온다. 롭의 얘기다. "20년 전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았고, 그날 오후 회사에 나가 일할 수 없다고 말했소.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어 많이 울었소. 이는 내가 케어팜에 오게 된 이유이기도 했소. 케어팜에 오면 일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 바빠진다오. 나는 그게 정말 좋소."
개개인이 부담하는 이용료는 일괄적으로 한 달에 17.80유로(약 2만원). 나머지는 정부가 지원한다. 롭이 테이블에 접시를 깔았다. 삶은 감자와 시금치죽, 스테이크는 또 다른 치매 노인 요한(64)과 그레타(72)가 나른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뭔가에 열중하는 노인들. 그레타가 체리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직접 땄어요. 시금치는 요한이 으깼고요." 돌보기와 돌봄 받기가 동시에 일어난다.
핵심 가치는 '자급자족(自給自足)'이다. 이 농장에 등록한 35명은 온종일 양상추를 따고,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장작을 팬다. 알아서 할 일을 찾는다. 수리공 출신 요한은 공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떨어진 문짝, 고장 난 농기구를 손본다. 재단사 출신 그레타는 '케어팜 친구들'의 옷을 전담 수선한다. "집에 있을 땐 하루가 너무 길었죠. 여기 오면 온몸의 세포가 쿵쿵 뛰는 걸 느껴요."
"내 삶은 내가 일군다"
다음 날엔 네덜란드 남부 에인트호번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아우더랜드고트 그루텐아우트 케어팜으로 향했다. 네덜란드에서도 10여 곳에 불과한 '거주형 케어팜'이다. 5㏊ 너른 부지에 2층짜리 건물 여섯 동이 서 있다. 치매 노인 50명이 일상을 영위한다. 농장 주인 프렌시안 반데어벤(50)씨는 "'안전한 환경, 해피 모먼트(Happy moment·즐거운 순간)!'가 우리의 목표"라며 활짝 웃는다. "치매를 앓는 이들은 삶의 목표가 없어요. 우린 그걸 갖도록 이끕니다."
이곳 노인들은 오전 11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한다. "중요한 건 오후 4~7시 사이 저녁 시간을 노인들이 함께 보내는 것"이라고 반데어벤씨는 강조했다. "'일몰 증후군'이 나타나는 때이기 때문이죠." 치매 환자에게 흔한 일몰 증후군이란, 낮엔 아무렇지 않다가도 일몰 때부턴 불안해하면서 과민 반응을 보이는 증상이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다 보면 우울감은 금세 사라지고 혼자가 아니란 안도감이 들어요."
요양원에 많은 휠체어나 보조 기구가 이곳엔 거의 없다. "치매 환자는 대체로 수동적이에요.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려고만 하죠." 걷는 게 중요하다. 보통 요양원에선 환자의 80%가 휠체어를 타는데, 여기선 전체 50명 중 4명만, 그것도 아플때에만 탄다. "일은 곧 움직임이고, 움직임은 활력을 줍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죠. 핵심은 '스스로 하는 것'.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에 새기는 거예요."
케어팜, 치매환자 돌봐주고 추가 소득… 홀로 사는 노인과 자폐아동도 이용
"한국에선 건강이라 하면 의사·병원·운동 등으로 접근하지만 네덜란드에선 관점 자체가 달라요. 아프지 않고, 오래, 건강하게 사는 법이 우선이죠. 그래서 확산된 게 케어팜(care farm)이에요. 네덜란드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인구는 3분에 1에 불과하지만 농식품 수출액은 미국에 이어 2위인 농업 강국인 만큼 전국에 농가는 숱하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농장에서 소일하는 걸 즐기니까요."
2015년부터 네덜란드 동부 소도시 바헤닝언에서 '케어팜의 민낯'을 면밀히 살펴온 조예원(39· 사진) 바헤닝언 케어팜연구소 대표는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하여'가 케어팜의 핵심 가치"라고 말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질환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 현황'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2030년에는 137만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조 대표는 "치매뿐 아니라 정신 지체나 뇌졸중 등 누군가가 아프면 가족 중 한 사람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며 "케어팜이 만능 해결책은 아니지만, 네덜란드에선 정부의 복지 서비스 중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되었다"고 말했다.
1993년 유럽연합(EU)이 탄생하면서 농사만 지어선 먹고 살기 어려워진 소규모 농장들이 새 활로를 모색한 게 계기였다. 농장에 사회적 약자들을 불러다 돌봐주고 추가 소득을 얻는 케어팜이 일거양득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치매 노인만 받는 곳도 있지만 홀로 사는 노인, 자폐아까지 정부 허가만 받으면 의료기관에서 정해준 횟수와 시간만큼 이용할 수 있다. 엄격한 프로그램은 없다. 요리나 그림 그리기, 동식물 기르기 등 하고 싶은 걸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직원이라고 유니폼을 입지도 않기 때문에 누가 일하는 사람이고 아픈 사람인지 겉만 봐선 알 수 없다는 점도 긍정적 효과를 줘요."
케어팜은 2000년대 초반 1000여곳으로 늘었다. 물론 부작용도 나타났다. 농사는 안 지으면서 돌봄 서비스만 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정부에서 지원금만 받고 사람을 내버려두는 일도 발생했다. 조 대표는 "2010년 의식 있는 농장주들끼리 자발적으로 협회를 만들어 자체 품질 관리 기준을 세웠다"며 "3년에 한 번씩 감사를 하고 튤립 모양의 품질 인증 마크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미탐 100 다녀왔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5년을 보낸 제 할머니 생각하면…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연세가 많아져 치매를 앓게 된 할머니는 밖에 나갔다가 집을 못 찾아오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가족은 깊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할머니를 빈집에 홀로 남겨두자니 위험하고 요양원에 모시자니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활 속 치매 케어'가 궁금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네덜란드에선 고령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이고 치매 환자를 포용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치매 환자들을 위한 정책과 기관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케어팜은 환자와 보호자, 주민 모두가 만족하는 선택지입니다. 치매 노인들은 충분한 신체 활동을 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우울감을 덜어 냅니다.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끌기 때문에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노인들이 먼저 찾아갑니다. 닷새간 직접 본 케어팜에서 가장 놀란 건 환자와 직원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병원처럼 딱딱한 공간에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우리나라 치매 노인들을 떠올립니다. 치매 환자가 일상의 식구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헹엘로·에인트호번(네덜란드)=노지후 탐험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