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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박칼린 “한국 남자들, 여자 마음 몰라서 기획… 내 작품 중 가장 뿌듯”

[아무튼, 주말] 19금 ‘미스터쇼’ 막 내리는 뮤지컬계 여장부 박칼린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신한플레이스퀘어 라이브홀. 무대의 불이 꺼지고, 관객들이 떠나자, 박칼린(55) 감독이 걸어 나왔다. 무대 뒤에 있지만, 무대 위 배우보다 더 유명한 그다.


박 감독이 지난 2014년 국내 최초로 여성만을 위해 만든 공연 ‘미스터쇼’가 다음달 13일 1200회, 27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우고 막을 내린다. 잘생기고 몸매 좋은 남자 배우들이 양복, 교복, 군복, 가죽 속옷 등을 입고 춤추는 ‘19금(禁)’ 공연. 그의 뮤지컬 인생에서 가장 긴 연출, 가장 거센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다. 8년간의 긴 여정을 끝낼 준비를 하는 그를 객석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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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은 친숙한 듯 낯설다. 사람 만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8년 만에 막 내리는 국내 최초 남성 출입 금지‘미스터쇼’공연장에서 만난 그는“이번 작품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과거 작품보다 아주 많이 아쉽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남성출입금지 쇼

-’남성출입금지’라는 타이틀로 논란이 많았다.


“안 보신 분들이 비판하더라. 원래 안 본 사람들이 말이 많다, 하하!”


-어떻게 이런 쇼를 기획하게 됐나.


“어릴 때부터 여자들이 여자끼리 있을 때와 남자가 섞여 있을 때 다른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난 (경남)여고를 나왔는데, 그때도 거침없이 교복 치마를 걷고 놀던 친구들이 남자애들 앞에선 싹 바뀌었다. 여자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연출의 시작은?


“어느 날 현대무용 중 나체의 남자들이 뒤로 걷는 장면을 봤다. 그때 그들의 엉덩이가 너무 예뻤다. 미스터쇼는 그 장면에서 출발했다. 3막, 청바지에 흰 티 입고 뒤로 걸으며 춤추는 장면이 그 무용에서 영감을 받아 가장 먼저 만든 것이다.”


-8년간 공연하며 깨달은 것은?


“정말 한국 남자들은 여자를 모른다는 것. 어느 날 어떤 분이 ‘우리 와이프는 이런 공연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분은 뒤에 숨어 있고, 그분 아내는 공연을 봤다. 그날 그분은 ‘태어나서 와이프가 저렇게 노는 걸 처음 봤다’고 하더라.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전 이런 공연 안 봐요’ 한 친구들이 제일 잘 논다.”


-한국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 것 같나.


“몸 좋고 멋진 사람들이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것. 내가 부산 살 때 여자들은 하얀 해군복 입은 군인이 지나가면 그렇게들 좋아했다. 청담동 레스토랑에도 모델 같은 웨이터들이 깔끔한 옷을 입고 있지 않나. 그래서 ‘미스터쇼’는 ‘복장쇼’에서 출발했다.”


-배우들이 공연 중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입을 열면 환상이 깨지니깐(웃음). 그래서 MC를 뒀다. 그리고 8명의 배우를 다 다른 스타일로 뽑았다. 관객들이 배우 중 한 명은 자기 스타일이 있도록. 대신 너무 춤만 추면 아이돌 무대 같으니까 연기도 넣어서. 8년간 쇼의 강도를 조금씩 높였다. 더티함과 섹시함, 그 선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인상적이었던 관객은?


“할머니와 엄마, 20대 손녀, 이렇게 삼대가 온 적이 있다. 70대 할머니 네 분이 같이 오신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한 번은 아내에게 공연을 보여주고, 자기는 아기 띠 두르고 로비에서 기다린 남편도 있었다.”


-’미스터쇼’는 이제 안 하나?


“원래 계획할 때부터 3탄까지 만들어 놨었다. 1탄이었던 ‘미스터쇼’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 못 끝내고 있었던 거다. 이제 3~4년 안에 2탄을 할 것이다. 1탄보다 조금 더 센. 마지막 3탄은 남녀 모두 볼 수 있는 ‘어덜트(성인)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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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쇼’는 여성의 욕망과 판타지를 채워주는‘버라이어티 쇼’다. 윗옷을 벗고 춤추는 배우 8명. 할리퀸크리에이션즈

◇ 거꾸로 가는 K뮤지컬

박칼린은 네 살 때부터 합창단, 첼로 연주 등으로 무대에 섰다. 지휘봉을 처음 잡은 건 중학교 때다. 그야말로 클래식, 국악,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평생을 무대 앞과 뒤에서 살았다.


1994년에는 뮤지컬 ‘명성황후’로 한국에 ‘음악감독’이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명성황후는 아시아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뮤지컬이다. 그는 이번 ‘미스터쇼’로도 2015년 일본에 진출했다.


-마지막 공연 다음날엔 뭘 하나.


“그날은 늦잠 자는 날이다. 오전 11시에 일어나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간다.”


-어떤 작품을 준비 중인가.


“여자들만 나오는 뮤지컬. ‘리피카 무량’이라는 엄청 신나는 역사물. 불교 국가의 여걸들을 다룬 창작 뮤지컬이다.”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건가.


“아니다. 내가 여성 문제보다 더 관심을 갖는 건 인종 차별, 아동 학대, 동물 학대다.”


-한국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는 것 같은데.


“앞으로 할 것 중에도 한국 역사, 전설에 관한 것들이 많다. 난 사실 지금의 국내 창작 뮤지컬 트렌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지금 대학로 등에서 오르는 작품들은 거의 다 외국 소재다. 그렇다고 새로 쓴 스토리도 아니고, 외국 책이나 역사물에서 인물 하나 갖고 와서 만드는데 그게 어떻게 한국 창작 뮤지컬인가.”


-그러고 보니 K컬처 시대에 한류 뮤지컬은 없다.


“내 말이 그 말이다. 한국인들이 외국 소재를 갖고 만든 걸 어떻게 들고 나가겠나. 지금 뮤지컬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 브로드웨이에서 한국 판소리로 외국인들이 아무리 잘해봤자 한국 사람만큼 하겠나. 한복이라도 똑바로 제작하겠나. 화려한 의상을 원하는 그들은 기생복을 왕비에게 입혀 놓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실수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 유명 소설을, 외국 유명 작가를,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는 소재를 잘 해석해봤자 똑바로 포착이나 할까. 물론 정말 공부를 많이 한다면 할 수 있다. 외국인도 유관순만 50년 연구했다면 그걸로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만드는 창작 뮤지컬이 그런 수준일까? 뮤지컬 ‘명성황후’ 이후 제대로 세계에 나간 작품이 없다.”


-배우들은 어떤가.


“뮤지컬 1세대, 1990년대에는 연기과 친구들이 뮤지컬을 많이 했다. 그래서 훈련은 잘 안 돼 있는데 열정과 끼가 정말 많았다. 그 후 2세대, 2000년대에는 기술이 많이 늘었다. 대학에 뮤지컬과도 많이 생겼다. 그때도 재미있었다. 지금이 3세대다. 연기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냥 처음부터 노래만 한다. 개인적으로 재미가 없어졌다.”

◇ 박칼린의 사생활

박칼린은 명성만큼 많이 TV와 신문에 예능과 인터뷰로 나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 먼저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남자친구는?


“없다. 난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론 어릴 땐 놀았다. 어릴 때 놀 만큼 놀아서.(웃음) 난 늘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혼자 있는 게 제일 좋다.”


-비혼(非婚)인 건가?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지금 너무 행복하게 잘 있어서. 원래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혼자 집에서 뭐 하나.


“요리하고, 운동하고, 고양이 키우고. 세 마리 있는데 다 유기묘다.”


-외롭지는 않나?


“전혀.”


-끊임없이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은?


“직장인들 매일 출퇴근하는 것과 같다. 좀 덜 자고, 술 안 먹고, 처자식 없고, 남자친구 없으니, 시간 빼앗길 것도 별로 없다.”


-음악을 안 했다면?


“요리사가 됐거나, 춤을 췄거나. 원래 카우걸도 했었다. 비행기 조종사도 됐을 것 같고.”


-무대에 다시 설 계획은?


“아마 곧 보게 될 거다.”


-감독을 하다가 배우 하면 힘들지 않나?


“배우는 똑똑하면서 바보여야 한다. 감독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작품은 산으로 간다. 그러니깐 바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구현할 때는 엄청 똑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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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쇼 연출자 박칼린

박칼린은 1950년대 미국 유학을 떠난 부산 출신의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적은 미국이다.


-박칼린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다.


“방송에서도 말 안 하는 것들이 많다. 가족들도 다 미국에 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힘들 때 제일 기분을 업(up)시켜주는 사람이다. 성악을 전공해 이 업계를 잘 알다 보니. 언니 둘은 지금 이집트에 다이빙 여행 가 있고. 세상 천하 태평한 사람들이다.”


-부모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나.


“어머니가 성악을 전공했다가 영문학으로 바꿨다. 그래서 부산 살 때도 발레나 빈 소년합창단 등 공연은 다 끌고 다녔다. 지금도 그 연세에 LA 할리우드 볼 시즌 표 사서 연간 회원으로 늘 오페라, 발레 등을 보러 다닌다. 아버지는 경제 전공이셨다. 두 분은 한국에서 1970년대에 첫 영어 어학원 ‘LATT(랏트)’를 열었다. 서울과 부산에 1, 2호점이 있었다.”


-박칼린처럼 살고 싶은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하루도 일 안 하고 살 수 있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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