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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박수근 화백 딸 인숙 씨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 열었죠"

"젊어서 못 이룬 꿈, 일흔 넘어 이뤘죠"

‘아기 업은 소녀'의 그림 모델이던 딸, 70대에 진짜 모델 되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패션쇼 열어 "딸의 재롱에 아버지도 기뻐할 것"

박수근 화백 딸 인숙 씨 "시니어 모

박수근 화백의 장녀이자 서양화가인 박인숙(76) 씨는 일흔의 나이에 모델에 도전했다. 무대 위에 설 때가 너무나 행복하다고./더쇼프로젝트 제공

"선생님들, 왼쪽 발 중심 두고 하나, 둘, 셋, 턴…"


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모델 학원. 큰 거울 앞에서 선 시니어 모델들이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걷기 시작했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형을 만들고, 포즈를 잡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복잡한 대형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모델이 있다. 짧은 금색 블루종 재킷에 망사 스커트를 입은 뱅헤어의 멋쟁이, 왕언니 박인숙(76) 씨다.

‘7학년’이 되어 이룬 모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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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화백의 작품 ‘아기 업은 소녀(1953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더쇼프로젝트 제공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기자의 말에 박 씨는 "모두 동대문서 산 것"이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화가라 집이 가난해서 늘 옷을 얻어 입었어요.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디자이너나 모델이 되고 싶었지."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 화백, 박 화백의 1953년 작 ‘아기 업은 소녀’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박 씨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미술 교사가 됐고, 2006년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이후 서양화가로 활동하다, 70세가 넘어 모델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서울패션위크 ‘라이프 포뮬라’ 패션쇼에도 올랐다. "모델 일을 배운 후 일상에 활기가 넘쳐요. 제2의 인생을 사는 기분이랄까? 무대 위에 설 때가 가장 좋아요. 음악에 맞춰 무대를 걸으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환상적인 기분이 들죠."

 

‘모델 예찬’을 늘어놓는 박 씨의 눈빛이 청년의 눈처럼 반짝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프로 모델다운 모습을 보였다. 저녁 6시 이후엔 금식할 만큼 식단 관리도 철저하다고. 모델 수업을 받으면서 키도 자랐다. "자세만 교정해도 키가 자라요. 나는 2cm가 컸어요."


서양화가로 활동하는 그에게 모델 활동은 작품 활동에도 좋은 영감이 된다. 박 씨는 패션쇼를 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을 그린 작품들을 지난 2월 열린 화랑제에 출품했다.

패션쇼 무대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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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박인숙 씨(오른쪽), 서양화가인 박 씨는 패션쇼를 하면서 느꼈던 순간들을 그린 작품을 화랑제에 출품하기도 했다./박인숙, 더쇼프로젝트 제공

박 씨와 함께 모델 수업을 듣는 수강생은 7명, 가장 50대 중반부터 70대 중반까지 다양하다. 할머니 소리를 듣는 나이지만, 유행하는 옷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자신을 ‘7학년’이라고 소개한 김유림(70) 씨는 호피 무늬 베레모에 청청 패션을 멋들어지게 입었다. "모델이 되고 싶었는데 결혼을 하는 바람에 시작도 못 했죠. 이제라도 해보려고 모델 학원에 등록했어요." 6월이면 배운 지 2년이 된다는 그는 광주광역시에서 매주 한 번 서울에 올라와 모델 수업을 받는다. 힘들 법도 한데, 매 순간이 설렌단다.


요즘 수강생들의 최대 화두는 모델 김칠두(64) 씨다. 이국적인 외모와 카리스마로 스타덤에 오른 김 씨는 이 클래스의 청일점으로 1년 정도 함께 수업을 받고 있다. 김 씨는 이날 광고 촬영으로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질투가 날 법도 할 텐데, 수강생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잘 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지요. 희망도 생기고."

 

이 학원의 시니어 모델 과정 수강생은 60명이다. 수업을 진행한 최범강 더쇼프로젝트 이사는 "열정이 젊은이들 못지않다, 이분들의 모습이 젊은 모델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취미에 가깝지만, 고령화 사회가 되면 직업 모델로서 기회가 늘어날 거라 본다"라고 했다. 실제로 해외에선 시니어 모델들이 활동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97세의 모델 아이리스 아펠이 미국의 유명 모델 에이전시인 IMG와 계약해 화제를 모았다.


아직까진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보는 선입견이 크다. 다양성과 개성이 중요한 시대지만, 조금만 튀어도 "점잖지 않다", "주책맞다"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할머니 모델들의 도전이 더 특별해 보였다. 박인숙 씨는 "지난해 양주에 있는 아버지 미술관에서 패션쇼를 열었는데, 부모님 앞에서 재롱떠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 들어 꿈을 이룬 모습을 보여드려 기뻤다"면서 "나이 때문에, 주변 시선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키가 작든 뚱뚱하든 얼마든지 매력이 있다. 중요한 건 내면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70대, 아직 꿈을 이루기에 늦지 않다.


김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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