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 김치 말고 '김치 가루'를 먹기 시작했다
아무튼, 주말
'김치 시즈닝' 아마존 돌풍… 안태양 대표
‘김치 시즈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안태양 푸드컬쳐랩 대표는 환하게 잘 웃었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 야시장에서 떡볶이 장사할 때 웃는 연습을 수도 없이 했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떡볶이와 치킨, 불고기로 필리핀에서 한식 붐을 일으키더니 이제 '김치 가루'로 미국 시장에 도전한다. 음식 스타트업 '푸드컬쳐랩' 안태양(35) 대표 이야기다. 20대 초반 필리핀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안 대표는 월세 보증금 300만원을 털어 마닐라 야시장에서 떡볶이 노점상을 차려 연매출 10억원에 여덟 점포를 거느린 '서울 시스터즈(Seoul Sisters)'로 키웠고, 한국식 치킨집과 고기집 브랜드를 내놔 K푸드를 유행시켰다. 2017년 한국에 돌아와 개발한 '김치 시즈닝(Kimchi Seasoning Mix)'은 지난해 5월 미국 아마존에서 시험 판매 2주 만에 시즈닝(가루 양념) 부문 1위에 올랐고, 올해 4월 정식 출시하자마자 초반 준비한 2000개가 '솔드아웃(sold-out·완판)'되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월마트, 홀푸드마켓 등 대형 유통 체인에서 입점 요청을 받고 있는 안 대표는 "하인즈 케첩이나 타바스코 핫소스, 기코만 간장처럼 세계인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한식 소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김치 시즈닝 파우더를 완판시킨 비결은.
"코로나 이후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소스를 찾은 것 같다. 김치가 면역력에 좋다고 알려진 것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미국뿐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이탈리아, 말레이시아, 호주, 영국 등 여기저기서 물건을 달라는 요청이 쏟아져 당황스러울 정도다."
―김치 시즈닝이 뭔가.
"한국 분들은 김치나 김칫국을 말려서 분쇄했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전혀 아니다. 고춧가루·마늘 등 김칫소로 들어가는 재료를 혼합하고 분쇄해 열처리 과정을 두 번 거친 다음, 김치에서 뽑은 유산균을 주입해 발효하는 공정을 거쳐 생산한다. 배추나 무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해외에서 한식 소스라고 하면 고추장밖에 모른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10년간 살면서 보니, 고추장 한 통 사서 제육볶음 한 번 떡볶이 한 번 만들고 나면 1년 내내 냉장고에 방치되더라. 한국 사람인 나도 이런데 외국인들이 얼마나 고추장을 활용할까 의심스러웠다. 고추장은 걸쭉하고 짜서 활용도가 낮다. 반면 같은 매운 소스라도 이제는 미국 웬만한 가정에서 볼 수 있게 된 태국의 스리라차는 가볍고 산뜻해서 여기저기 사용할 수 있더라. K푸드가 위상은 높아졌지만 내놓을 만한 소스는 없었다. '내가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달려들었다."
―왜 하필 김치였나.
미국 소비자들은 김치 시즈닝을 샐러드나 스테이크, 감자튀김, 햄버거, 피자에 양념으로 뿌려 먹는다. 김치에 대한 인식과 활용법이 한국인과 사뭇 다르다. / 푸드컬쳐랩 |
"한국 음식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김치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김치라고 하면 '유산균' '감칠맛 나는 매운맛' '건강에 이로운'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김치를 내세우는 게 가장 마케팅하기 쉬울 것 같았다."
―미국에서 김치 시즈닝을 구매하는 주 소비자는 누구인가.
"집에서 요리해 먹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여성이다. 기본적으로 중산층 백인이다. 한인은 잘 사지 않는다. 샐러드나 스테이크, 감자튀김에 뿌린다."
―김치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한국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활용법이다.
"김치 시즈닝으로 김치를 담가 먹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제품을 보고 소비자들이 직관적으로 알아서 활용하더라. 김치 시즈닝으로 제대로 된 김치를 담글 수는 없지만 '김치 샐러드' 또는 겉절이처럼 만들 수는 있다."
―어학 연수 갔다가 떡볶이집을 차린 계기는.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 다니다 2학년이던 2008년 필리핀 마닐라로 어학 연수 갔다. 마침 한류 바람이 일었다. 한식당 차리면 대박 나겠다 싶어 한국에 있는 동생까지 불러서 제일 큰 마닐라 야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첫날 떡볶이 100인분 준비했다가 고작 두 그릇 팔고 밤새워 펑펑 울었다던데.
"3개월간 잠 못 자고 고민했다. 열정만 가득했지 장사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부탁해 장사 관련 책 30권을 비행기로 받아 읽었다. 인천에서 쌈밥집 하는 분이 쓴 책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웃는 연습을 했다'고 했다. 동생한테 '언니가 안 웃으면 옆구리를 쳐'라고 부탁했다. 세 시간 장사하는 동안 30초마다 옆구리를 찔렸다. 집에 와 거울을 보니 짜증과 피곤과 불안이 얼굴에 잔뜩 붙어 있었다. 이런 얼굴로 떡볶이를 주면 나라도 안 먹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기를 쓰고 웃었다. 자기 가게뿐 아니라 옆집까지 청소하고, 주변 상인들에게 떡볶이와 과자를 나눠 주었다. 상인들 태도가 달라졌다. 야시장 상권 특성을 알려주고 손님을 소개해줬다. 3개월이 지나자 떡볶이를 먹으려는 손님이 줄 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차는 왜 안 되냐' '좌석이 불편하다' '에어컨은 왜 없느냐' 등 불만이 쏟아졌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모든 손님에게 맞출 수는 없었다. 타깃 고객층을 공략하기로 했다. '떡볶이 먹으러 오지 마세요. 진짜 한국을 경험할 사람만 오세요'라고 홍보했다. 필리핀 친구들은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포장마차에서 한식을 먹고 싶어 했다. 야시장 가게는 텐트 안에 테이블이 놓인 구조로 한국 포장마차와 비슷하다. 두 달이 지나자 매출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한류 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1년 6개월 만에 매장이 8개로 늘었다."
―고생해 키운 떡볶이 브랜드 '서울 시스터즈'를 필리핀 최대 식품 유통 업체 GNP트레이딩에 넘겼다.
"GNP 회장이 한식 사업을 하고 싶은데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합류했다. 큰 회사에서 제대로 사업을 배우고 싶었다."
―GNP에 입사해 한국식 치킨집 '오빠치킨'과 고기집 'K펍 바비큐'를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한국인이 아니라 필리핀 현지인을 타깃 고객으로 정하고 완전히 다르게 접근했다. 당시 마닐라에 한국식 고깃집은 많았지만 조용한 분위기였다. 필리핀 사람들은 신나게 파티하며 즐기길 좋아한다. 라이브 밴드가 공연하고, 3m짜리 대형 TV를 놓고 K팝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마닐라에서 제일 비싼 금싸라기 땅의 무려 450석짜리 빌딩을 통째로 썼다. 한국인 주재원들이 '100% 망한다'고 했지만 대박이 났다. 치킨집은 아이들 생일 파티 하기 좋은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꾸며 성공했다."
GNP에서 승승장구하던 안 대표는 2017년 한국에 돌아와 푸드컬쳐랩을 열었다. 안 대표는 "미국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해보고 싶었고, 국제적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며 "더 나이 들면 위험 무릅쓰고 도전하지 못할 것 같아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김치 시즈닝을 개발했다.
―김치 시즈닝 다음 제품도 생각하나.
"김치를 기본으로 한, 예를 들면 '김치 주스(kimchi juice)' 같은 제품을 생각하고 있다. 김치 국물을 기본으로 하는 김치 주스는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미 수퍼마켓 등 주요 유통 채널에서 팔리고 있다. 그들보다는 김치를 훨씬 잘 아니까 더 우수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코로나 이후 한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졌다."
―김치로 만든 주스라니 상상하기 어렵다.
"김치 시즈닝도 그렇지만, 한국과 외국에서 선호하는 한식이나 먹는 방식은 다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해외에서 성공한다."
―해외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식품 기업에 또 다른 조언을 해준다면.
"한식이 건강식이라는 단순 주장은 절대 먹히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봤으면 좋겠다. 세계적으로 간장 하면 기코만이다. 한국에도 좋은 간장이 많은데 왜 기코만일까. 일본 기업은 외국에서 이름을 인지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꾸준히 알린다. 한국 기업은 단기 결과에 집중한다. 특정 브랜드를 마케팅했는데 잘 안 되는 듯하면 바로 바꾼다. 길게 보고 꾸준히 알려야 한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