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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무 한 조각, 생선 한 토막이 만든 익숙하고 거룩한 맛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생선조림

조선일보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강경순계절맛집’의 생선조림.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좁은 부엌에서 나는 달그락 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마늘과 생강을 빻는 절구를 주었다. 그런 작은 일에도 신이 나서, 이리저리 튀어 나가는 마늘과 생강을 다시 절구에 집어넣어 빻았다. 어머니가 양은 냄비 뚜껑을 열고 우리가 빻은 생강과 마늘을 넣을 때쯤에는 무엇이 밥상에 오를지 알 수 있었다.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얼큰한 열기, 그 뒤로 느껴지는 달달한 기운, 그리고 바다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한 냄새가 나면 확실했다.


양은 냄비에는 크고 납작하게 자른 무가 깔렸고 그 위로는 푸른색 고등어 몇 토막이 들어 있었다. 달큰한 국물을 떠서 밥에 비비고 젓가락질이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무를 잘라 입에 넣었다. 흰밥도 좋고 강낭콩이 점점이 박힌 콩밥도 좋았다. 국물에서 아릿한 마늘과 생강 향이 느껴지면 우리의 수고가 또 느껴져서 저절로 밥 한 그릇을 더 먹게 되었다.


밥벌이를 하러 밖으로 나돌다 보니 집에서 늘상 먹던 음식을 사먹게 됐다. 달걀말이,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평범한 음식들도 남의 손을 탔다. 업소용 가스불 위에서 부글거리며 끓어 넘친 냄비를 마주하면 첫맛은 확 당겼지만 끝으로 갈수록 불편한 식사 자리처럼 먼저 숟가락을 놓게 됐다. 생선조림은 더했다. 애초에 하는 집도 많지 않았다. 한다는 집을 찾으면 아예 비싸거나 냉동 물건을 쓰는 경우도 흔했다.


‘강경순계절맛집’이란 이름을 달고 당산역 바로 앞 건물 2층에 자리한 이 집에 앉아 생선조림을 기다릴 때까지도 반신반의했다. 점심이었다. 주변에는 유난히 중년 여자 손님이 많았다. 누군가는 일행을 기다리며 가스불을 줄이고 반찬만 먹었다. 또 누군가는 앉자마자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넣었다. 경험상 이렇게 중년 여자 손님이 많으면 실패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기동력 있는 택시 기사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지불하는 금액이 맛에 정확히 비례하기를 원한다. 더구나 입맛과 취향은 까다로워서 양이 적거나 비위생적이거나 혹은 불친절하거나, 그 외 수많은 조건을 또 비교하여 점심 식사 한 끼를 고르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기 그릇에 듬뿍 담긴 반찬이 상 위에 빠르게 올랐다. 들기름에 버무린 시래기 나물, 버섯볶음, 겉절이 같은 것들은 젓가락질 몇 번에도 입맛이 돌았다. 가운데 놓인 양배추 샐러드는 설탕에 절인 유자 껍질을 채 썰어 넣었는데 샐러드 소스가 과하지 않고 산뜻한 맛이 고급스러워서 동네 식당 같지 않았다. 간장물에 삶아 빛깔을 내고 기름 넉넉히 둘러 볶아낸 잡채는 간이 정확하고 맛이 확실해 미리 만들어 퉁퉁 불은 종류와는 달랐다.


곧이어 커다란 냄비가 테이블 중앙 가스 버너 위에 올랐다. 빨간 국물 아래에는 숭숭 자른 무가 잠겨 있었고 그 위로 손바닥만 한 생선 토막이 여럿 보였다. 등에 박힌 무늬를 보니 삼치였다. 부드러운 살점은 가스불을 올리자마자 익었다. 바닷가 마을 속담에 ‘삼치는 새색시 품에서도 익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삼치살은 쉽게 익고 또 보들보들한 맛으로 먹는다는 뜻이다. 양념이 살짝 밴 삼치를 젓가락으로 들어 살점을 뜯어냈다. 입에 넣으니 스며든 매콤한 양념 뒤로 촉촉하고 순한 살점이 씹혔다.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바다 위로는 몰인정한 바람이 불지만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을 이미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는 미리 따로 조리를 하여 생선이 익는 타이밍에 맞춰 먹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옹이가 져서 이에 엉기거나 질긴 부분이 없었다. 무도 결이 바르고 단단한 것을 골라 썼는지 하나하나 맛이 달고 또 단정하여 한 점도 남길 수 없었다. 고등어를 쓴 생선구이는 간이 삼삼하여 어릴 적 할머니가 가시를 발라주던 그때 맛이 났다. 바싹 구워낸 솜씨는 서울 사람이 해놓은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무대가 선 것처럼 홀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뚫린 주방에서는 주인장이 지휘를 하듯 가운데 서서 음식을 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말끔히 손을 씻은 주인장이 서서 인사를 했다.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억양에 고향을 물었다. 주인장은 씩씩한 목소리로 ‘진주 사람’이라고 했다. 그 목소리 너머로 어릴 적 듣던 소리들이 떠올랐다. 같이 놀던 친구에게 ‘뛰지 마라’고 소리치던 동네 할머니, 영도 산복도로에서도 들려오던 부산 남항의 뱃고동, 담벼락 밑에 숨어 색색거리던 새끼 고양이, 그리고 늘 우리를 부르던 어머니의 젊은 목소리, 가슴 깊이 품은 그 소리들이 익숙한 맛과 사람을 만나 마치 방금 있었던 일처럼 갑자기 생생해졌다. 그토록 잊히지 않는 그 나날은 무 한 조각, 생선 한 토막,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룩한 것이 아니었던가?

#강경순계절맛집: 생선조림/구이 1만3000원 (2인분 이상 주문 가능), 보쌈 중 4만5000원, 회 코스 시가, 0507-1407-0435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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