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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모니터 수명 끝… 번뇌가 된 '백남준'

거장의 작품 대부분이 단종된 브라운관 TV로 구성

전국 고물상과 아프리카까지 수소문해도 부품 찾기 어려워

모니터 수명 끝… 번뇌가 된 '백남준

생전의 백남준.

"매일 아침 '오늘은 부디 무사했으면…' 마음 졸인다."


108개의 브라운관 TV로 이뤄진 백남준의 '백팔번뇌'는 1998년부터 20년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내 전시관에서 전시 중이지만, 비가 많이 오는 궂은 날엔 작품을 볼 수 없다. 전시 관계자는 "작품에 쓰인 TV가 오래돼 강한 전압이 흐르면 고장 위험이 있어 악천후에는 전원을 꺼둔다"며 "다른 전시관은 어떻게 하고 있나 수소문해 봤지만 가동을 멈추고 세워둔 곳이 많아 벤치마킹할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점점 짧아지는 '백남준'의 수명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작품의 보존·수복 문제가 미술계 화두로 떠올랐다. 1988년부터 30년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백남준의 초대형작 '다다익선'이 불을 지폈다. 지난 2월 시설 노후 문제로 가동 중단돼 8개월간 꺼진 채 방치되고 있다. 전자제품이기에 내구연한은 유한하다. 백남준이 수명을 8만 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다다익선'은 2003년 모니터 전면 교체 등 9차례 수리했지만 결국 가동 중단됐다. 노후화 문제가 곳곳에서 잇따르면서 임시방편으로 상영 시간도 축소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 랩소디'의 상영을 지난해부터 하루 3시간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프랙탈 거북선'은 지난달부터 하루 5시간, 서울 소마미술관 '메가트론'은 4시간으로 줄였다.

하드웨어냐, 소프트웨어냐

문제는 작품 대부분이 단종된 브라운관 TV로 구성된 탓에, 교체용 수급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전국 고물상과 아프리카까지 수소문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동나고 있다. "브라운관을 평면 LCD로 교체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당대의 실감과 조형미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브라운관의 볼록한 물성이 사라지고 1980년대가 아닌 현대의 감각이 담긴다는 것이다.

모니터 수명 끝… 번뇌가 된 '백남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30년간 전시되고 있는 백남준의‘다다익선’이 노후화로 가동이 중단된 채 컴컴하다. 대신 미술관 측은‘다다익선’앞에서 작품 탄생, 설치 배경 등을 다룬 자료전‘다다익선 이야기’를 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모니터 수명 끝… 번뇌가 된 '백남준

최근 상영 시간 축소를 결정한 '프랙탈 거북선'. /대전시립미술관

생전의 백남준이 "모니터는 어떻든 관계없다"는 의사를 표했기에 제품 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는 반박도 거세다. 백남준 작품 수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이며 '다다익선' 설치를 담당했던 이정성(75) 아트마스타 대표는 "백남준으로부터 '다다익선' 작품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증명서를 직접 받았고 새로운 기술에 매우 개방적이셨다"며 "작가의 정신은 하드웨어(TV)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영상)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원본성'에 집착하는 의견이 많아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백남준 작품, 백남준만의 것 아냐"

때마침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 10주년을 맞아 '예술·공유지·백남준'을 주제로 기념전을 열고 있다. 서진석 관장은 "지금까지의 10년이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였다면 앞으로 10년은 '백남준과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집중할 차례"라고 말했다. "예술은 사유재산이 아니다"고 선언한 백남준의 철학을 국내외 작가 13인이 재해석해 결과물을 내놓았는데, 마지막 작품은 신진 작가 그룹 옥인콜렉티브의 '다다익선'이다. 백남준 '다다익선' 복원에 대한 학예사, 전기 전문가 등 7명의 목소리를 담은 39분짜리 영상물 속에서 "작가가 살아 있을 때 새 기술을 도입하는 건 괜찮으나 사후에 우리가 바꾸는 건 신중을 요한다"(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거나 "유독 미디어 작품에만 외관상의 변화가 엄청난 것처럼 여겨지는데 (중세 회화 등) 모든 작품은 복원 과정에서 변화를 겪는다"(박상애 백남준아트센터 기록연구사)는 의견이 충돌한다. 옥인콜렉티브 멤버 이정민 작가는 "미술품은 작가 한 명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참여와 합의에 의한 결과"라면서 "미술품의 생애주기가 폭넓게 논의된 적이 드문 만큼 여러 층위의 인물을 등장시킨 영상을 통해 관객을 공론장에 참여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논의 답보… 아카이브도 미비

정작 현장의 논의는 답보 상태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학술행사 '다다익선 보존 어떻게 할 것인가'가 열린 적이 있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구조물을 해체해 관련 기록물과 함께 보존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큰 반발을 낳자 "영구적 보존이 힘들다면 꺼둔 상태로 두되, 현재의 과천관처럼 작품 앞에 설치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영상만 따로 상영하자"(이원곤 단국대 교수)는 의견까지 대두했다. 미술관은 내년 공청회를 열어 방안을 모색한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더 남아 있다. 보존·수복의 밑바탕인 국내 작품 현황이나 국·공립 미술관 분포 실태조차 취합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2013년 백남준문화재단 주도로 '백남준 작품 목록화 사업'이 추진된 바 있지만,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1년 만에 중단됐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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