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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한 접시 먹으며 기운을 낸다, 차가운 바람 멈추고 곧 볕이 쬐리니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낙지볶음 편

서울 광화문 '무교동유정낙지'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고춧가루 냄새가 났다. 시장에서 장사하던 부모님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 일요일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14인치 텔레비전으로 만화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면 어머니가 좁은 주방에 서서 아침 겸 점심을 시작했다. 90% 비율로 일요일 첫 끼니는 오징어 볶음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낙지볶음이 올라왔다. 그 주에 구두가 좀 팔렸다는 이야기였다.

서울 광화문 ‘무교동유정낙지’의 낙지볶음(앞)과 백합조개탕.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거 비싼 낙지야. 남기지 말고 먹어."


어머니는 늘 구매 가격이 아니라 할인 전 가격을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낙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떨이로 남은 낙지를 샀으리란 의심이 짙었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대신 '비싼 낙지'라는 말만 덧붙일 뿐이었다. 또 나는 낙지를 보면 '소가 기운이 빠지면 낙지를 먹였다'는 할머니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낙지볶음이 상에 오르면 아버지가 젓가락질을 함과 동시에 바다로 뛰어드는 가마우지처럼 상 위로 돌격했다.


어릴 적 살던 부산은 볶음이라기보단 전골에 가까운 낙지볶음이 주류다. 지금은 서울에도 부산의 유명한 몇몇 집이 올라왔지만 여전히 부산에 가야 그 맛이 산다. 특히 국제시장 끝자락 '돌고래'는 부산의 아지매 정서가 잔뜩 묻어나는 곳 중 하나다. 고등학생 시절 국제시장에 옷 사러 갔다가 들르곤 했던 이 식당은 본래 순두부 백반이 유명하다. 혹자는 조미료 맛이 세다고 말하지만 작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 내는 순두부에 달고 짠 어묵 볶음을 올려 먹으면 찰나에 시공간이 사라지고 빈 그릇만 남는다.


단골 축에 드는 이들은 순두부 백반 하나에 새까맣게 윤이 나는 작은 프라이팬에 당면 한 움큼 쌓여 나오는 낙지볶음을 곁들인다. 팁이 있다면 종업원 '아지매'가 낙지볶음을 휘휘 저어줄 때까지 건들지 말 것이며 '드시라'고 말할 때까지 먹지 않는 것이다. 맵다는 말보다 얼큰하다는 형용사가 더 어울리는 국물을 한 숟가락, 당면을 밥 위에 한 젓가락, 사이즈는 작지만 섭섭하지 않게 건져지는 낙지를 짝짝 쩍쩍 씹으며 한 끼를 해치운다.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이 뒤엉켜 점심시간마다 난리가 난 듯 정신없는 식당이지만 주인장은 모든 손님에게 "감사합니다" 하는 공손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서울로 올라오면 역시 낙지볶음은 광화문 사거리 일대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교 입학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왔던 날, 아버지는 당신이 20대에 자주 먹던 것이라며 무교동 낙지볶음 집에 데리고 갔다. 보통 2인이 하나씩 시켜 먹는 그 음식을 인당 하나씩 먹고 난 후 귀가 멍해질 정도로 매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간 광화문 일대 재개발로 오래된 집들의 간판이 바뀌고 맛도 변했다. 그리고 지점을 여럿 두던 '무교동유정낙지'가 성공회 서울 성당 옆 언덕배기에 새로 문 열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던 창업주의 딸이 '본점(本店)'이란 무거운 말을 다시 챙겨 광화문으로 돌아온 것이라 했다.


밝고 깨끗한 홀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주문한 음식이 착착 척척 규칙적으로 상에 올라온다. 낙지가 화석처럼 박힌 '낙지한마리파전'은 잡지에 실린 사진 같고, 낙지가 탄환처럼 박힌 감자전은 감자의 고소한 맛이 낙지의 감칠맛에 엉겨 더욱 혀에 붙는다. 두 음식은 냉동 낙지를 썼음에도 질긴 맛이 전혀 없다. 산낙지볶음은 산 낙지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탱탱한 활력, 이와 혀에 부딪히는 쫀득한 생기가 지금껏 느꼈던 낙지에 대한 감각을 전복한다. 서커스를 하듯 맵기만 하던 무교동 특유의 맛도 이 집에서는 점잖게 다듬어져 있어 이마에 땀이 흐를지라도 눈물은 없다. 산 낙지인 탓에 값이 나가지만 배신하지 않는 맛이다. 곁들이는 백합조개탕도 거북한 단맛 대신 겨울 바람처럼 시원한 맛이 청량하게 담겼다. 가식과 숨김 없이 깔끔하고 깨끗한 이 음식을 먹으면 자연히 기운이 도는 게 순서다.


곧 차가운 바람은 멈추고 따스한 볕이 내리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병균과 싸우던 이 시간도 서서히 잊히는 때가 올 것이다. 기운을 내자, 벌겋고 매운 낙지볶음 한 접시를 먹으며 오늘도 홀로 말하고 답한다.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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