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액션 좀 해!" 국립극단이 첫 온라인 공연 영상 찍던날
국립극단 70년 역사 첫 영상 녹화위한 공연 '조씨고아' 현장
코로나 사태로 공연 미뤄지자 온라인 중계위해 공연 진행
'관객이 다시 보고 싶은 작품 1위'... 공연의 감동은 그대로
국립극단이 70년 역사에 처음으로 영상 녹화만을 위한 공연을 진행한 2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로비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대형 포스터가 쓸쓸히 걸려 있다. /이태훈 기자 |
“관객들 머리 좀 나와도 되죠? 이번 공연 촬영은 온라인 중계 보신 분들이 ‘극장 가서 보고 싶다’ 생각하시게 하는 것도 큰 목적이예요. 관객들 리액션 나와야 돼요!”
26일, 오후 6시 반 공연을 30분쯤 앞둔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의 연출가 고선웅이 객석의 카메라 감독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계획대로였다면 고선웅은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하 ‘조씨고아’)의 개막 공연을 어제(25일)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계는 코로나 사태로 가장 직접적 피해를 입고 있고, 국공립 극장과 예술단체는 모두 멈춰선 상태다.
국립극단 70년 역사에 녹화만을 위한 공연은 처음
온라인 송출을 위한 녹화용 '조씨고아' 공연을 진행한 2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현장 촬영 스태프와 무대 위의 배우들, 연출가 고선웅이 공연 전 최종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이태훈 기자 |
대신 국립극단은 온라인 중계를 위한 공연 촬영을 25, 26일 이틀간 진행했다. 이전 청소년극 ‘영지’를 무관객 라이브 생중계로 한 적은 있지만, 녹화 중계만을 위해 따로 공연을 하는 것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립극단은 작년 4~5월 약 두 달간 ‘국립극단에서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국립극단 레퍼토리 뿐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연극 작품 중 가장 보고 싶은 세 편을 적는 주관식 설문이었다. 총 4052명이 참여했고, 답변에 언급된 공연은 1357편에 달했다. 득표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압도적 표차로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밝혔다. 국립극단은 “관객의 뜻을 받들어” 이 작품을 올해 70주년 기념 공연 라인업으로 편성했다.
앞서 같은 날 5시 반, 명동예술극장 백스테이지에선 분장을 마치고 마지막 호흡 조절 중인 배우들과 스태프들 사이로 연출가 고선웅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고선웅 연출과 주연 ‘정영’ 역의 하성광 배우는 공연 시작 전에 온라인 관객들을 위해 약 1분 분량의 미니 인터뷰를 먼저 촬영했다. 다음은 국립극단이 진행한 고선웅 연출의 미니 인터뷰.
'조씨고아'의 고선웅 연출이 공연 전 온라인 방송 시청자들을 위한 미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태훈 기자 |
‘다시 보고 싶은 연극 1위’로 이 작품이 꼽힌 이유가 뭘까?
“생명을 얘기하는 연극이어서일 것 같아요. 권력에 집착하는 야심의 인간, 끈질기게 해치려하는 인간들…. 가장 보편적인 서사로 풀었기 때문 아닐지요. 또 나이드신 선배들부터 젊은 연기자들까지 다양한 배우 분들 훌륭한 연기 보여주셨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연극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한 마디로요? 한 마디로? 아… 어려운데…. 꿈 같은 얘기인데, 한 마디로 얘기하면. 우리 사는게 다 꿈, 꿈 같은 거니까요.”
온라인으로 공연을 감상할 관객들에게.
“온라인으로 봐주시는 관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지만 공연은 역시 꼭 극장으로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처음 촬영 공연했는데, 관객이 없어서 넘 어려웠어요.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입니다. 관객은 연극의 완성입니다.”
하성광 배우도 “연극은 무대 위에서 펼쳐졌을 때 그 힘과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나는데 화면으로 보시면 어떠실지 저도 매우 궁금하다”고 했다.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연극은 상상력으로 보시는 예술이니까요. 화면이 다 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시는분들의 상상력으로 마음껏 채워주시고 이야기를 엮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관객없는 공연, 박제나 마찬가지지만…”
공연 전 리허설 중인 무대 위의 배우들을 바라보며, 촬영팀도 최종 점검이 한창이다. /이태훈 기자 |
고선웅은 배우와 관객의 상호 작용, 무대와 객석을 꿈틀대며 이동하는 에너지 같은 연극의 본질적 경험을 특히 중시하는 연출가다. “연극의 3요소에 연출가는 없지만 관객은 있다”는 말은 인터뷰 때 마다 강조하는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국립극단은 전날인 25일 공연 녹화를 완전 무관중 상태로 진행했다. 공연 외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지 않는 깔끔한 영상을 만들려 한 촬영팀 요청에 따른 조치였다.
미니 인터뷰 뒤 잠깐 복도에 선 채 물었더니, 고선웅은 “어제 공연은 공연이 아니라 박제였다”고 했다. “눈물이든 웃음이든 관객들 반응을 봐야 해요. 배우들도 슬프고 웃고 희로애락이 겹치면서 감정을 쌓아야 하는데…. 관객이 없다시피한 상태에서, 목소리 나간다고 리액션도 금지하니까 진짜 이전에 못 본 공연이 돼 버리더라고요.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국립극단은 공연 녹화 둘째날인 26일엔 단원과 배우 가족 등 20여 명을 관객으로 급히 불렀다. 6시 반 이전 이들이 ‘거리두기’ 원칙에 충실하게 띄엄띄엄 객석에 앉았다.
객석엔 꽉찬 관객 대신 카메라 6대
명동예술극장 객석에는 꽉찬 관객 대신 카메라 6대가 놓였다.(붉은색 원 안) 무대를 바라보며 1층 객석 중앙쯤인 9열을 기준으로 우측에 1대, 중앙에 3대, 좌측에 1대가 놓였고, 좌측 1열에 클로즈업용 카메라도 설치됐다. /이태훈 기자 |
이날 공연 녹화를 위해 객석에 설치된 카메라는 총 6대였다. 1층 객석의 중간 쯤인 9열을 기준으로, 중앙에 3대, 좌·우측 각 1대, 좌측 1열에 클로즈업 카메라 1대 등이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분주히 오가며 목과 몸을 풀고 고선웅 연출의 지도로 연기와 동선을 점검하는 동안, 촬영팀도 카메라 세팅에 분주했다. 관객들은 멀찍 멀찍이 간격을 띄어 앉은 채 공연을 기다렸다. ‘조씨고아’는 늘 명동예술극장 3층 객석까지 관객이 꽉 차는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 빈 객석에 카메라들이라니, 배우에게도 몇 안 되는 관객에게도 서글프고 낯선 광경이다.
어색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6시반 공연 시작 전, 국립극단 관계자가 관객들 앞에 서면서 조금 풀어졌다. “휴대전화, 꼭 꺼주세요. 중계용 영상 녹화라 소음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잘 아실 테니 꼭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박수치고, 웃고, 환호하고, 눈물 흘리시는 건 마음껏 해주세요. 충분히 리액션을 해주시면 녹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커튼콜 때 우렁찬 환호, 함성, 박수 부탁합니다.” 객석에 폭소가 터졌다. 오케이 사인이 났으니, 이제 관객들은 맘껏 환호하면 된다.
이태훈 기자 26일 '조씨고아' 공연이 열린 명동예술극장 1층 객석에 급조된 관객 20여 명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국립극단은 25, 26일 두차례 영상 촬영을 위한 공연을 진행하면서, 25일에는 촬영팀 요청에 따라 완전 무관중 상태로 공연을 치렀다. 하지만 연출가 고선웅이 "관객이 꼭 있어야 한다"고 요청하면서 26일엔 극단 단원과 배우 가족 등 20여 명을 관객으로 급히 불렀다. |
긴장과 이완의 경이로운 리듬… 명불허전 ‘조씨고아’
연극 '조씨고아'의 한 장면. 대장군 도안고(장두이.맨 오른쪽)는 권력의 라이벌인 문신 조순을 쳐내려 음모를 꾸미는데, 조순의 아들 조삭(김도완)과 그의 부인인 공주(우정원)는 아이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춤춘다. 공주 뱃속의 아기가 훗날 복수의 씨앗이 되는 '조씨고아'다. /국립극단 |
2018년 이후 근 2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역시 ‘조씨고아’는 ‘조씨고아’였다.
춘추전국시대, 권력에 눈이 먼 장군 ‘도안고’는 문신 ‘조순’을 모함해 그의 구족(九族) 300명을 멸살한다. 조씨 집안과 인연 깊은 ‘정영’은 마흔다섯에 얻은 늦둥이를 대신 내주고 마지막 조씨 핏줄인 아기를 구해낸다. ‘조씨고아’라 이름 붙여진 이 아기를 살리려 사람들이 죽고 또 죽어간다. 단도로, 머리끈으로, 칼로 목을 베어, 돌에 스스로 머리를 찧으면서. 이들이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이유는 단 하나, 끝내 도안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연극 '조씨고아'의 한 장면. 도안고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소중한 것을 잃고 20년을 기다렸던 정영(하성광)은, 장성한 조씨고아(이형훈·홍사빈)이 자기 일족의 비극을 믿지 않으려 하자 먼저 스스로 팔을 잘라 진실임을 강변한 뒤,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조씨고아를 설득하려 제 목에 칼을 댄다. /국립극단 |
1막의 격정은 객석을 통곡의 바다로 만든다. 정영의 아내가 남의 집 복수를 위해 남편이 아들을 빼앗아갈 때, 또 정영이 제 친아들을 조씨고아로 여긴 도안고가 땅에 세 번 내리쳐 죽이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때, 관객은 큰 파도같은 고통에 함께 휩쓸린다. 애끊는 고통이 무대 위를 휘몰아칠 때 조차, 객석이 짧고 굵은 폭소로 자주 일렁이는 것도 ‘조씨고아’ 공연의 독특한 풍경이다. 이 비극을 뒤집어 보면 사실은 말도 안 되게 희극적이라는 것을, 배우들이 과장된 몸짓과 발성을 통해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에 “쥐면 펴야 하고 이화(異化)가 있어야 동화(同化)도 있다”는 고선웅의 연출관이 스며 있다. ‘조씨고아’는 그 정수(精髓)다.
연극 '조씨고아'의 한 장면. 대장군 도안고(장두이)는 일족의 복수에 나선 조씨고아(이형훈·홍사빈)의 칼 앞에 무릎꿇은 뒤에도 끝내 저주의 말을 잊지 않는다. /국립극단 |
복수의 클라이맥스가 지나간 2막 막바지, 정영은 복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환영과 만난다. 소중한 걸 다 내주고 20년을 기다린 끝에 복수에 성공했는데,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공허의 무중력 공간이 된 무대 위로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까지 닻줄 끊어진 배처럼 떠돌 때, 정영이 관객을 향해 말한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 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 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마지막 커튼콜엔 객석 관객이 20여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우렁찬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막이 내린 뒤 극장 밖으로 나왔더니 사람들에 둘러싸인 고선웅 연출이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역시, 공연엔 관객이 있어야 해!”
국립극단 ‘조씨고아’ 공연 일정은 본래 7월 26일까지. 국립극단은 “단 하루라도 극장에 올릴 수 있다면 올리겠다”는 입장이다. 온라인 중계 일정은 본 공연 폐막 뒤로 정해질 전망이다.
이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