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거장을 깨우는 건, 아침 위스키와 와인 한잔
테런스 콘란, 영국 모던 디자인의 창시자로 기사 작위까지 받은 88세 현역
11월 콘란숍 한국에 마지막 론칭
영국 디자인의 '전설' 테런스 콘란. "야릇하면서도 휴식을 떠오르게 하는 깊고 푸른밤의 색을 따왔다"는 푸른색 셔츠는 그의 상징이다. |
"보기 좋아도 쓸데가 없으면 그건 디자인이 아니지요. 화려하고 쓸모 있어 보여도 지나치게 비싸면 그것 역시 좋은 디자인이 아닙니다. 꾸밈없이 소박하고(plain), 단순하며(simple), 실용적인(useful)! 그것이 좋은 디자인의 3대 조건입니다."
영국 디자이너 테런스 콘란(Conran· 88· 왼쪽 사진)은 '디자이너'란 단어에 가둘 수 없는 인물이다. 영국 아트스쿨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뒤 1953년 가구 디자이너로 출발해 50여 레스토랑을 디자인하고 소유했으며, 리빙숍인 해비타트를 만들고 콘란숍을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전 세계 250만부 팔린 50여권의 디자인 베스트셀러를 펴낸 저자다. 영국 디자인을 혁신한 공로로 1983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sir(경·卿)'라는 호칭이 붙는다. 수백억원대 자산을 투입해 1989년 영국 디자인 뮤지엄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껏 일군 자산만 2016년 기준 8500만파운드(약 1120억원)다.
자존심 강한 영국인들이 90도 경례를 한다는 그를 런던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올 11월 롯데백화점과 손잡고 2314㎡(약 700평) 규모의 콘란숍을 국내에 론칭한다. 지금까지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 10개 매장을 운영해 왔으며,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진출하는 국가가 한국이라고 했다. 콘란은 디스크가 최근 악화돼 부축을 받고 들어섰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굽었던 그의 등이 점점 펴지더니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어릴 땐 무얼 만드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무언가 뚝딱 조립해서 다른 아이들 물건과 맞바꾸거나 팔기도 잘했지요. 그때부터 사업가이자 디자이너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 예술가라고들 하지만 그는 '상식'을 강조했다. "성공하는 디자이너는 98%의 상식과 2%의 미학적 감각으로 이뤄집니다. 시장 트렌드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 상상력과 결단력·창의력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온몸이 자기 확신이란 피부로 둘러싸여야 하지요." 상식은 교양으로 쌓이고, 이는 결국 공부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가 1700만권이 넘는 책을 기증하고, 디자인 뮤지엄을 세운 것도 아이들에게 전 세계 훌륭한 디자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 작품을 엄선해 파는 콘란숍은 아이들도 수천만원짜리 가구에 앉아 언제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다.
①비트라 팬톤 체어 ②2016년 새 단장한 런던 디자인 뮤지엄 외관 ③산타&콜레와 협업한 파리 콘란숍 ④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플라스틱 체어 ⑤아이들용 조명 ⑥꽃 회사인 파르테르와 협업한 디자인 ⑦영국 첼시 콘란숍 매장 ⑧콘란 고유의 그래픽 패턴이 들어간 의자. /테런스 콘란·롯데백화점 |
영국 BBC는 콘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바뀌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영국인에게 '취향'을 심어놓은 모던 디자인의 창시자"이자 "럭셔리 디자인의 민주화를 이끈 인물"이라고도 소개했다. "1950년대 영국은 전후(戰後) 상흔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화장실은 그야말로 감옥 같았고, 옛날 가구를 물려받는 게 전부인 시절이었죠. 식탁에 가족이 모여 온기를 나누게 하고 싶었어요. 식탁 위에 테이블 매트 등 여러 도구로 하나둘씩 다양하게 채워 넣다 보면 삶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닭을 넣고 구운 뒤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치킨 브릭(chicken pick)'이 그가 내놓은 인기 소품 중 하나. 1970년대엔 침대 매트리스 위에 까는 듀베(duvet·솜털이불)를 대중화했다. "그때는 침대가 딱딱하고 시트가 얇고 추워 숙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지요. 매트리스를 버릴 수도 없을 때 '어떻게 하면 적은 가격으로 삶의 질을 올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 스웨덴에서 보게 된 듀베를 대량 제작하게 됐습니다." BBC는 "콘란의 듀베가 영국인의 성생활(sex life)을 바꾸고, 출산율도 높였다"고 했다.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그의 아이도 8명. 아들 재스퍼 콘란 역시 유명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인터뷰 도중 가슴팍에서 시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아침 위스키와 와인 한 잔은 그의 생각을 깨우는 생명수라고 했다. "사람들이 '당신 그러다 일찍 죽어요'라고들 하지요. 아마 그런 사람들보다 제가 더 오래 살고 있을 거예요. (시가와 위스키 마니아인) 처칠도 90세 넘게 살았잖아요!" 그는 '은퇴'라는 단어가 뭐냐고도 물었다. "내가 지금 콩코드사(社)와 손잡고 리뉴얼 프로젝트를 하는데 말이에요."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는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하느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런던=최보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