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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더위에서 시원함으로 옮겨갔다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카레와 차가운 화이트 와인


스콧 피츠제럴드가 생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밤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Night)’는 리비에라 해안의 호텔이 배경인 소설답게 꽤 나른하다. 나른하다고 한 것은 호텔의 장밋빛 지붕이 수련처럼 썩고 있다는 묘사에다 인물들이 수영하고 먹고 마시는 게 주요 줄거리인 소설이라서다(’밤은 부드러워라’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물론 여기서 마신다 함은 술이다. 여기까지 보고 지루하다고 할 사람도 있고 흥미롭다고 할 사람도 있을 줄로 안다.


피츠제럴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위대한 개츠비’만 해도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사는 전 연인을 잊지 못해 가정을 파탄 내려는 남자가 개츠비고, 개츠비의 전 연인 데이지는 열렬히 화답하고, 개츠비와 데이지 남편 사이의 신경전과 스포츠카의 미칠 듯한 질주, 범죄 조직과의 유착에서 오는 어둠, 두 건의 비극적인 죽음 등등 자극적인 이야기로 넘쳐나지 않던가. 뭐랄까. 불꽃이 튀기는 소설이라고 해도 되겠다.


‘밤은 부드러워’에는 불꽃은 없다. 불이 꺼진 후의 연기와 재 같은 거라면 몰라도 말이다. 소위 말하는 박진감 있는 이야기는 없다. 땀 흘리면서 일하고 뭔가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 대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소설이므로. ‘휴양(지) 소설’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나는 그래서 이 소설을 일종의 판타지 소설로 보고 있다. 뭔가 아는 사람들을 위한 판타지라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정교하면서 디테일이 살아 있달까.

카레와 함께 놓인 와인들. 피츠제럴드는 수영을 '톡 쏘는 카레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위키피디아

뭐 이런 것이다.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데 그냥 ‘닉은 하루 종일 맥주 열 병을 마셨다’라고 쓴다면 얼마나 하품이 나겠나. 책 속의 인물들은 아마도 작가인 피츠제럴드가 그러했듯이 어떨 때는 화이트 와인을, 어떨 때는 셰리를 마시는데, 각기 다른 안주와 마신다고 기술된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사람과 각기 다른 시간에 마시는데,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나 잘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이분, 꽤나 드셨군’이라며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뭔가 아는 분은 희소하기도 하지만 그런 분 중에 술에 내내 빠져 있지 않고 이런 소설을 쓰겠다고 덤비는 분은 더 희소하기에, 난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톡 쏘는 카레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는 듯한 식도락의 느낌으로 더위에서 시원함으로 옮겨갔다.”(정영목 옮김, ‘밤은 부드러워라’, 문학동네) 톡 쏘는 카레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마신 밤, 집에 돌아와 나는 이 부분을 다시 읽었다.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왔기에 할 수 있던 호사다. 다시 보고 나는 놀랐는데, 이들이 카레에 와인을 먹는 게 아니어서다. 수영에 대한 비유를, 카레와 화이트 와인을 함께 먹는 것으로 하고 있다. 더위에서 시원함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말이다.


어떤 묘사는 경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피츠제럴드가 톡 쏘는 카레와 화이트 와인을 먹었던 기억 없이 저런 문장을 쓸 수는 없다고. 그가 음식과 술을 즐긴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인도 음식(이나 태국 음식으로 추정되는 톡 쏘는 카레)과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1930년대에 즐겼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밤은 부드러워’가 1934년에 나왔으니) 영국에 인도가 없었다면 국민 음식인 카레도 없었을 거라며, 그러면 영국 사람들은 뭘 먹고 살았겠느냐는 말이 있긴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미국 사람이라서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도 인도 카레와 함께 와인을 파는 꽤 이국적인 식당이 있었다는 말인데 나는 그 식당의 와인 리스트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피츠제럴드가 쓰고 있듯이 ‘식도락의 느낌’을 아는 곳일 듯해 그렇다. 최근 한국에서도 와인을 파는 태국 식당이 늘어나고 있는데 미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느낌이다. 프렌치와 이탤리언, 일식, 중식은 먹을 만치 먹은 사람들이 타깃이라는 심증도 갖게 되었다. 태국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국내에서 먹어본 태국 음식이 다인데, 나 정도 수준에서는 처음 접하는 종류의 태국 음식이 있었다. 베텔이라는 케일과 비슷한 느낌의 잎에 게살과 라임, 캐슈넛을 쌈처럼 싸 먹는 음식 같은 게 그랬다. 음식은 만족스러웠는데 와인은 그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태국 음식의 특성인 아찔한 산미를 받쳐줄 만한 찌르르한 와인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신맛이 나는 음식에는 산미가 강한 와인이 좋았다. 그래서 리슬링이나 알바리뇨, 시칠리아 쪽의 산미가 강하면서 솔티한 와인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아르의 슈냉블랑도 좋을 것 같았다. 색으로 치자면 황금빛 쪽이 아닌 그린 계열에 가까운 프루티하면서 영한 계열의 화이트 와인이. 하지만 모두 없었다. 소비뇽 블랑도 어울릴 듯했는데 샤르도네가 대부분에 소비뇽 블랑은 몇 개 안 되었다. 샤르도네의 둥그스름한 맛보다는 소비뇽 블랑의 뾰족한 맛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 와인 리스트는 너무 관습적이었달까. 태국 식당에 어울리는 리스트가 아니었다.


와인이 음식에 어울렸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지 하는 아쉬움을 갖고 집에 돌아와 그 책을 펼쳤던 것이다. 톡 쏘는 카레에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마신 순간의 느낌을 수영에 비유하는 부분을 다시 읽기 위해서.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솔티하면서 산미가 있는 와인을 마실 때처럼 입안이 조여오면서 다시 톡 쏘는 카레가 먹고 싶어졌다.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생생하게 맛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묘사를 잘했다는 말이다. 또 묘사의 재료로 쓰인 재료는 그에게 꽤나 특별했던 기억으로 보인다. 경험이 없다면 묘사도 없달까. 경험하지 못해 내가 하지 못하는 비유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를테면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고 앞으로도 할 가망이 없으므로 수영에 대한 비유는 영영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삶은 진행 중이고, 경험도 진행 중이다. 이것이 비유에 대한 나의 전망.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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