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 2시간, 먹는덴 10분... 태풍와도 줄 서는 ‘30회전’ 막국수
‘하루 30회전’ 불멸의 기록 세운 ‘고기리 막국수’
전국 100여곳 돌며 막국수 공부, 영동지방 비빔면에서 착안
손맛 대신 철저한 계량화로 맛 유지 #사장의 맛
날 좋은 주말이면 ‘고기리 막국수’는 하루에 1700여그릇의 막국수를 팔고 매출이 2000만원이 넘는다. 하루에 테이블 8개를 ‘30회전’ 한 기록도 있다. 식당 주인들에게 30회전은 부러움의 대상이자 불멸의 기록으로 회자되고 있다. ‘태풍이 와도 줄 서는 집’이란 평가답게 평일에도 1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주말이면 기본 1시간 반~2시간이다. 10여년 전까지 경기도 용인의 고기리는 물놀이 하기 좋은 고즈넉한 계곡이었다. 2012년 홍천의 ‘장원막국수’에서 막국수 기술을 전수받은 부부의 작은 식당은 이후 고기리를 거대한 식당과 카페 타운으로 탈바꿈시켰다. 막국수 메뉴가 바꾼 나비효과다.
조선일보 ‘사장의 맛’이 외식업 판도를 바꾼 ‘결정적 메뉴’를 연재합니다. 오늘은 들기름 막국수 열풍을 만든 주인공 ‘고기리 막국수’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탐구합니다. 음식평론가 박정배씨가 글과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메뉴는 들기름 막국수, 막국수, 수육 세 가지다. 막국수는 2012년 창업 당시부터 이 식당을 지켜온 근간이다. 막국수는 깊은 우물물 같이 맑고 단아한 국물에 물기를 잘 빼내 야구공처럼 둥근 모양의 국수 사리가 반쯤 잠겨 있다. 회색이 은은히 감도는 하얀 사리 위에 무채와 초승달 같은 배, 노란 지단 한 점이 올려져 있다. 외관으로 막국수인지 냉면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대리 기사도 오지 않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외딴곳에 있지만, 평일 낮 방문한 ‘고기리 막국수’는 두 시간은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다. (아래부터) 이 집이 유행시킨 들기름과 깨, 맨 김만 들어간 ‘들기름 막국수’, ‘비빔 막국수’와 기름을 깨끗이 걷어낸 ‘물 막국수’. /조선DB |
◇메밀 비빔면의 대중화에 성공... 들기름 막국수
현재 고기리 막국수의 명성을 만든 건 들기름 막국수다. 국수 매출의 60% 이상이 들기름 막국수에서 나오고, 2021년에는 오뚜기에서 고기리 들기름 막국수 제품도 나왔다. 전국에 들기름 막국수를 메뉴로 내는 식당도 제법 생겼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국수는 국물 국수가 주를 이뤘다. 막국수나 냉면은 ‘시원한 국물’로 더위를 날려 주는 더위 방탄 냉장고였다. 비빔면은 짜장면, 쫄면 정도가 대중화된 것들이다. 고기리 막국수의 들기름 막국수는 메밀로 만든 비빔면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핵심 재료인 들기름은 처음에는 대기업 시판 들기름을 사용하다가 동네 방앗간으로 바꾼 뒤 지금은 기름 명가로 유명한 ‘옛간’의 들기름을 사용한다. 많이 볶아 색과 향이 강한 방앗간 것과 달리 찜 누름 방식으로 짜낸 들기름은 색과 맛이 연하지만 은근하고 깊은 맛이 난다. 과한 것을 배제하려는 두 대표의 음식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간장은 ‘샘표501’을 사용한다. 김과 함께 올라가는 깨는 향과 식감을 동시에 주도록 두 가지 방식으로 가공해 올린다. 김과 참깨, 들기름, 간장이 가는 메밀 면 위, 아래에서 면발을 감싸 안으면 들기름 막국수 한 그릇이 완성되는 것이다.
◇100군데 막국수 투어의 결론... ‘고급스럽게’
고기리 막국수의 유수창·김윤정 대표는 창업 전부터 100군데 이상의 막국수 투어를 다닌 마니아였다. 부부가 막국수 투어를 다니며 안타까워한 것은 표준화와 세련됨이 부족해 막국수는 ‘막’ 대접을 받는 저렴한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들기름 막국수의 시작은 영동지방이었다. 유수창 대표는 “영동지방에는 들기름을 간장이나 식초와 함께 탁자에 두는 식당들이 많아요. 국수는 맛있는데 양념이나 간이 면과 안 맞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거기는 면과 육수가 따로 나오거든요. 손님 취향대로 만들어 먹는 DIY(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보는 것)스타일인 거죠” 라고 말했다. 이렇게 면과 육수를 따로 먹는 방식은 영동을 중심으로 강원도 전 지역에 남아있다. 비빔으로 반쯤 먹다가 육수나 동치미국물을 부어 먹는다. 부산의 밀면도 그렇게 먹는다.
막국수 투어 중 만들어 먹던 비빔막국수의 실험은 식당으로 이어졌다. 2012년 시도한 최초의 들기름 막국수는 김가루가 크고 국수 사리의 모양은 물 막국수처럼 둥글게 말아 올린 것이었다.
둥글게 만 면 사리는 국물이 있으면 쉽게 풀어지지만 비벼 먹기에는 약간의 난이도가 따른다. 가장 큰 문제는 김이었다. 김은 호남에서 1950년대에 원조 밥도둑으로 불렸을 정도로 감칠맛이 강하고 향이 좋다. 하지만 김은 입에 잘 들러붙어 매끄러운 먹기를 방해한다.
메밀은 분 단위로 사리의 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먹는 게 중요하다. 오랜 고민과 시식을 통해 2017년이 돼서야 지금 형태의 김 가루가 완성됐다. 김을 깨처럼 잘게 부숴 입에 달라붙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고 김가루가 뿌려진 들기름 막국수를 비비는 게 아니라 떠 먹는 방식으로 바꿨다.
◇마지막 3분의 1은 육수 부어 먹어야... 왜?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리면 먼저 김과 깨와 참기름 향이 은근하게 뇌를 자극한다. 탄성 있는 면발에 들러붙은 양념이 감칠맛의 난장을 펼치는 사이, 가늘고 탄력 있는 면발이 입술과 혀와 식도를 물리적으로 자극한다. 향과 맛과 질감의 향연이 들기름 막국수를 먹는 내내 펼쳐진다.
이름표를 단 종업원들은 들기름 막국수를 손님 앞에 낼 때마다 “비비지 말고, 3분의 2쯤 드신 뒤 육수를 부어 드시라”고 설명한다. 육수를 나중에 넣어 먹는 이유에 대해 유수창 대표는 “면의 탄력이 떨어질 때 쯤 찬 육수를 부으면 면의 온도가 떨어지면서 면의 탄력이 다시 생긴다”고 말했다.
들기름 막국수에 곁들여 나오는 김치도 싱겁게 느낄 정도의 백김치다. ‘부부의 뇌 구조=좋은 면발’인 것 같다. 면발을 중심으로 모든 재료와 기술 서비스가 맞춰져 있다. 국수 하나로 동네를 부흥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차가운 면과 정확한 양념, ‘손맛’에 기대지 않는다
고기리 막국수의 면 사리는 동그랗고 예쁘다. 김윤정 대표는 “물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미적이거나 미쟝센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좋은 면을 위해 메밀의 도정은 일주일에 한번 한다. 도정한 좋은 메밀은 일그러진 부분 없이 삼각뿔 모양으로 속껍질인 녹색 껍질이 빛나는 것이다. 이런 메밀을 5도의 저온 저장고에 보관하고 1주일 이내에 다 소진한다. 이를 10kg씩 소량으로 식당의 제분기에서 제분한다.
1인분 면의 양은 300g, 면의 굵기는 1.3mm다. 면 굵기가 1.35mm가 넘으면 국수틀인 분창을 바꾼다. 동으로 만든 분창은 5만인분을 뽑고 나면 면을 뽑는 구멍이 넓어진다. 얼마 전에 바꾼 스테인리스 분창은 동분창보다 견고해서 20만인분까지 견딘다.
반죽은 7인분을 만들어 분창에서 내려 면을 펄펄 끓는 솥에서 익히자 마자 지하수 냉수로 씻어낸다. 면을 반죽하는 물은 수돗물이나 정수물은 사용하지 않는다. 고기리는 지하수를 쓴다. 메밀은 높은 온도에 금방 삭는다. 면을 도정할 때도 열이 나는 쇠보다는 돌이나 나무를 사용한다. 반죽 시 차가운 온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죽이 좀 힘들지만 좋은 면을 위한 필요악이다.
막국수 면발은 메밀의 상태, 도정과 제분, 날씨, 물의 상태, 반죽하는 사람의 기술 등 많은 변수들이 결합돼 만들어지는 유기체. 그때 그때 바로 만드는 것이 고기리 막국수 면의 최고의 비결이다.
경영학과 출신 답게 유수창대표는 손맛으로 대표되는 직관의 음식 만들기를 싫어한다. 그의 방법은 계량화, 표준화를 통한 ‘의도된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들기름 막국수에 들어가는 들기름도 스포이드에 동일한 양을 재서 국수에 넣는다. 고기리 막국수 부부는 1년에 각자 280그릇의 막국수를 먹고, 20만그릇을 넘게 만든다. 막국수는 정교하고 섬세해서 냉면과 구별이 어렵지만 9000원을 받는다. 요즘 냉면 가격이 1만3000원이 넘는 걸 감안하면 저렴하다.
한번 다녀간 손님이 식당을 다시 찾는 비율은 34% 정도다. 저렴하고 맛있고 혁신적인 들기름 막국수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고기리는 언제나 만원(滿員)이다.
[박정배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