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에서 스타트업 인턴으로… “과거의 나에 집착 안 해”
[아무튼, 주말]
은퇴 후 열린 ‘인생 2막’
세달 만에 고문 된 김준석
대기업 임원을 마치고 인턴으로 취직한 65세 김준석(왼쪽)씨와 그를 뽑은 루와컨텐츠 대표 모상우씨가 영화 ‘인턴’의 한 장면처럼 걷고 있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는 김씨는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세미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경험은 결코 늙지 않아요(Experience never gets old).”
영화 ‘인턴’의 명대사다. 퇴직한 70대 노인 벤(로버트 드니로)이 ‘제3의 인생’을 꿈꾸며 인턴으로 취직한 회사에서 느끼는 기대와 좌절, 환희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감동 드라마다. 저 대사는 잘나가는 CEO 줄스(앤 해서웨이)에게 마음을 담아 한 말이다. 수십 년 직장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는 나이에 묻혀 저평가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누구는 이 영화를 “동화 같다”고 했다. 그만큼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가 현재 진행 중이다. 대기업 임원과 종합병원 부원장을 마치고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한 60대 김준석 ‘인턴’과 매일 그의 경험을 배우며 감탄하고 있는 30대 모상우 대표.
두 사람을 지난달 16일 ‘아무튼, 주말’이 만났다. 김 인턴은 오랫동안 인터뷰를 망설이다가 수락했다. “기업에서 같이 일한 후배들이 제가 인턴이 된 걸 모르거든요(웃음). 그래도 저보다 더 역량 많고 경험이 풍부한 분들이 젊은 기업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경력에 얽매여 재능을 썩히는 건 사회적 손실 아니겠어요?” 모 대표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소통이 힘드냐고요?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 없습니다. 제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가 봅니다.”
◇월 60만원에도 즐거워
65세의 김 인턴은 미국에서 경영·회계 석·박사를 따고 귀국해 대한항공, 한진그룹 등에서 20년간 일했다. 임원, 자문위원을 끝으로 한림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작년 초 은퇴했다. 예순넷까지 ‘나 개인의 삶’보다 조직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충분히 잘했어! 이제 좀 쉬어도 돼. 가정에 최선을 다해보자.” 하지만 일평생 뒷바라지만 해온 아내는 제2의 삶을 사는 듯 늘 바빴다. 만날 친구도 많고 매일 모임이었다. 30대 두 자녀는 직장 다니느라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집에서 한동안 따분하게 보냈다. “아들이 어느 날 ‘아빠,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데 지원해보시는 거 어떠세요?’하고 묻더라고요.” 서울시 50플러스재단에서 지원하는 시니어 인턴 제도였다. 서울시가 2019년 시작한 이 사업은 중장년 2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기업연계형 인턴십으로, 경력 등을 고려해 서울시 소재 기업과 지원자를 매칭해준다. 이미 수백명이 이 제도를 통해 인턴을 거쳐 재취업했다. 월급은 파트타임으로 최저시급을 반영한 약 60만원 정도. “처음엔 꺼림칙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했지요. 과거의 성공한 나에 집착하지 말자고요. 내가 옛날에 얼마나 받았다는 생각을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영화 ‘인턴’ 생각도 났고요. 젊은 CEO와의 케미(화학반응)도 괜찮을 거 같았어요.”
그렇게 그는 서울 구로에 있는 30명 규모의 스타트업 회사 루와컨텐츠에 이력서를 넣었다. 루와는 설립한 지 4년 된 뉴미디어홍보대행사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메타버스 등을 이용한 콘텐츠 제작을 통해 공공기관과 기업을 홍보해준다. 직원의 평균 연령이 28세로 굉장히 젊은 회사다.
김 인턴은 면접 전 회사 재무 상태, 퇴사율 등을 분석했다. 그리고 지난 6월 딱 한 명을 뽑는 인턴직에 합격했다. “1년 만에 출근할 직장이 생기니 모든 게 새로웠죠.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하는데, 이전에 안 타던 버스, 지하철을 타요. 바쁘게 사는 젊은 사람들도 구경하면서요.” 수십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입지 않은 청바지도 입어보고 넥타이는 과감하게 풀었다. “꼰대는 되지 말자 다짐했죠. 하하. 제가 젊어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일하다 보니 확실히 더 젊어진 것 같아요.” 김 인턴은 대표뿐 아니라 직원 누구에게도 “결혼은 했냐” “부모님은 뭐하시냐” 등의 호구 조사를 하지 않았다. 실제 대표 나이조차 모르고 있었다.
처음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까 불안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20대 직원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주뼛거리던 직원들도 “선생님”이라 부르며 업무를 상의했다. 계약 기간인 3개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경험을 살려 들쭉날쭉했던 직무 체계를 만들고 호봉, 성과급 등 임금도 시스템화했다. “제가 면접해 뽑은 신입 직원이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보다 기쁜 일이 없죠. 코칭해준 프레젠테이션으로 프로젝트를 따왔을 때도 보람을 느꼈고요. 1년에 두 번 성과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전 직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줬을 때도요. 돌아보니 매일 즐거웠네요.” 김 인턴은 내년 예산 편성과 사업 계획을 짜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님이 제 아이디어를 채택할 때가 가장 뿌듯합니다.”
영화 ‘인턴’에서 70세 인턴 벤(로버트 드니로)과 온라인 쇼핑몰 CEO 줄스(앤 해서웨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꼰대일까 걱정했지만 아니었다
35세의 모상우 대표는 경험 많은 시니어의 도움이 절실하던 차에 김 인턴을 채용했다. 3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3년 만에 급성장하면서 매출이 늘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큰 회사기 때문에 신입 저경력자를 중심으로 시너지를 내왔어요. 회사는 점점 커지는데, 이전처럼 트렌디함으로만 사업을 제안하기에는 한계에 봉착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니어를 데려오려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하지만 너무 센 급여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때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인턴 제도를 알게 됐다. 그런데 걱정도 컸다. “혹시 누굴 뽑았는데 꼰대처럼 굴면 어쩌나, 워낙 젊은 회사다 보니 커뮤니케이션이 안 돼서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면 어쩌나,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기우였다. “여러 명의 인턴 후보를 면접했거든요. 다들 ‘소일거리 찾으러 왔다’ ‘알바쯤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미 회사 지표를 다 살펴보시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보고서로 쫙 만들어 오셨더라고요. 제가 선택지가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이분을 뽑았죠.”
모 대표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김 인턴에게 마음을 열었다. 회사 경영에 관한 고민도 털어놨다. “오히려 너무 저자세로 직원들을 대하니까 ‘저 정도까지는 안 하셔도 되는데’란 생각을 했어요. 정말 보기 좋았죠. 무엇보다 정확한 직무별 분석을 통해 성과에 대한 가치 보상 체계를 만들어주셔서 직원들 불만이 사라지더라고요. 신기했어요.”
몇 개월 사이 퇴사율도 확 줄었다. ‘전문 역량이 이런 거구나’ 느꼈다. “정교한 보고서를 받아본 게 처음이었어요. 회사 경영이 이렇게 체계를 잡아가는 거구나. 아쉬울 게 없는 분이 우리의 열정과 가능성만 보고 도와주시는 것에 감사하죠.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석 달 만에 고문으로 초고속 승진
김 인턴은 지난 9월 인턴십을 마쳤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고문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모 대표가 잡아서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는 게 눈에 보였어요. 3개월 후에 그냥 보내드리는 건 큰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두 달쯤 됐을 때 제안을 드렸죠. 더 일해주실 수 있냐고 부탁했는데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너무 감사했죠.”
모 대표가 난감할 수 있는 급여 문제는 김 인턴이 말을 꺼냈다. “턱도 없는 수준으로 먼저 얘기해주셨어요. 이런 분을 만났다는 게 너무 행운이에요. 저도 인덕이란 게 있나 보다고 처음으로 느꼈어요.” 모 대표와 김 인턴은 같은 사무실을 쓴다. 마주 보고서 언제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김 인턴은 이제야 솔직하게 털어놨다. 인턴으로 지원할 때만 해도 재능 기부라고 생각했다고.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열정적으로 일하는 MZ들의 회사를 돕고 싶었다고. “대기업 시절엔 남들보다 일찍 가고 더 늦게 퇴근하고 했어요. 돌아보니 그게 다 스트레스였더라고요. 지금은 그렇게 안 하죠. 그런데 즐거워요. 30, 40대 열심히 일하던 그 열정도 다시 생기고요.”
그는 비슷한 나이의 은퇴자들에게 “주저하지 마시라”고 했다. “이제는 육십이란 나이가 젊어요. 직장에서 나오면 상실감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또 사회적 체면이란 게 있잖아요. 내가 과거에 어땠는데란 생각에 사로잡히면 굉장히 힘들어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자신이 보람된다고 생각하면 움직여야 합니다. 열정, 희열이 사람을 변화시키더라고요. 지위나 돈에 집착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마음의 병이 오기 전에 건강한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김 인턴은, 아니 김 고문은 청바지 차림에 백팩을 메고 빽빽한 건물이 들어찬 벤처기업 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언제까지 일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대표님을 돕고 싶고요. 저와 같은 시기를 겪는 대한민국의 남자들에게도 힘이 됐으면 해요. 그게 제가 이름을 드러낸 이유입니다.”
[김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