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찍히면 사라진다, 실종인민공화국
[인권 무너진 중국]
톱스타·인터폴수장·대기업 회장·인권변호사들… 시진핑 시대 들어 잇따라 행방묘연
여배우 판빙빙이 100여 일간 사라지더니,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의 현직 수장인 중국 공안부 멍훙웨이 부부장(차관)이 열흘 넘게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중국 당국의 구금 조사 때문이었다. 중국의 한 법률가는 "국제사회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는 시진핑 정권의 오만이 도를 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권력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일은 있었지만 해외에 알려진 스타, 국제기구 수장까지 무차별로 실종되는 건 시진핑 정권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두 사건은 권력기관에 의한 실종이 잇따르는 시진핑 시대 중국의 현실을 충격적으로 드러냈다. 판빙빙, 멍훙웨이는 대외적으로 노출된 인물이라 해외에서도 이슈가 됐을 뿐 유명 기업 총수, 인권변호사, 비판적인 출판·언론인 실종이 잇따르는 게 중국의 현실이다. 시진핑 시기 실종 피해 사례를 모아 '실종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the Disappeared)'이라는 책으로 펴낸 미국의 마이클 캐스터는 이 사건들을 '(권력에 의한) 강제 실종'으로 규정했다. 강제 실종은 몇 개월을 넘어 때로는 수년간 이어지고 죽음으로 끝을 맺기도 한다.
시진핑 정권에서 대표적 '인민 실종' 사례는 2015년 7월 9일 인권변호사 및 활동가 250여 명이 무더기로 연행, 실종됐던 '709' 사건이다. 왕취안장 변호사 등 일부 인사는 아직도 구금 혹은 실종 상태다. 왕 변호사의 아내 리원주는 올해 4월 어린 아들을 안고 베이징에서 남편이 있을지도 모를 톈진까지 도보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2015년 말에는 홍콩에서 중국 비판 서적을 펴내던 출판업자 5명이 태국에서 집단 실종됐다. 이 중 스웨덴 국적의 구이민하이는 2016년 1월 돌연 중국 국영 CCTV에 나와 '과오'를 뉘우쳤다. 신경 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지난 1월 풀려나는 듯했으나, 중국 당국은 그를 다시 구금했다.
재벌들의 실종도 잇따랐다. 재산 60억달러로 중국 32위의 갑부인 투자 회사 밍톈(明天)그룹 샤오젠화 회장은 2017년 1월 숙소인 홍콩 포시즌 호텔에서 실종됐다. 시진핑 주석 누나 부부의 재산 증식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 정부요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졌다. 중국 안방보험의 우샤오후이 회장, 클럽메드 인수로 유명해진 푸싱그룹 궈광창 회장 등도 당국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때까지 실종 상태를 겪었다. 지방정부 비리를 폭로했던 기자 천제런은 실종됐다가 CCTV에 나와 자신의 '비리'를 고백했다.
실종된 이들이 끌려간 곳은 경찰서 유치장이나, 구치소·교도소가 아닌 은밀한 장소였다. '강제 실종'을 경험한 한 인권운동가는 "검은 커튼이 드리운 방에서 가족·변호사 등 외부와 연락이 완전 두절된 채 용변 보는 것조차 담당자가 지켜보는 등 24시간 감시당했다"고 말했다. 독백조차 금지됐고, "나가고 싶으면 TV에 나가 자백하라"고 강요받았다.
시진핑 정권 이전에도 실종 사건은 있었다. 한국 대사를 지낸 리빈 같은 인사들이 수개월씩 실종됐고, 2004년 이후 행방이 묘연한 다롄 TV의 유명 아나운서 장웨이제는 보시라이 전 충칭 서기의 내연녀였다는 설과 함께 '사체가 해부돼 인체의 신비 전시회 표본으로 변했다'는 괴담까지 돌았다.
강제 실종의 본질은 '찍히면 사라진다'는 공포 통치다. 그 주범은 중국 공산당과 권력기관들이다. 중국의 한 언론인은 "실종 사태에 부역하거나 침묵하는 중국 매체들,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중국인의 문화가 공범인 셈"이라고 말했다. 경제·정치적 파워가 미약할 때 해외의 인권 비판에 눈치라도 봤던 중국은 G2로 올라선 지금은 국제사회 시선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중국 관영 영자 글로벌타임스는 9일 자 사설에서 "멍훙웨이 총재에 대해 '실종' 운운하는 해외 매체들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중국의 의법치국(依法治國)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2011년 스트로스 칸 당시 IMF 총재가 성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은 것과 멍훙웨이 총재가 죄를 지어 조사받는 게 다른 게 뭐냐는 것이다. 하지만 칸 총재는 갑자기 사라져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은 게 아니었다. 비인도적 '강제 실종'에 대한 해외 비판에 귀를 닫은 어처구니없는 강변인 셈이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