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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무리하지 말고 즐거움 좇아라" 백현진의 백수와 선수 사이

백현진, 11년만에 솔로 앨범 ‘가볍고 수많은' 내

"시장에 눈감아라...... 최선의 기준은 즐거움"

"노래도 그림도 쓱쓱... 무리 없이 일 보는 중"

"완성도 믿지 않는다... 모든 건 발전 아닌 변화"

"20년간 성과 없어… 즐거움 좇으면 운신의 폭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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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이 11년 만에 새 솔로 음반을 냈다. 그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고 구조도 전통도 없는 것 같은 낯선 노래는 처음이었다. 끈 떨어진 연처럼 하염없고, 물을 보는 고양이처럼 엉큼하고,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처럼 비어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쫀득한 노래라니.


발효되어 끓는 막걸리, 목마른 사자처럼 으르렁대던 한대수의 탁성을 깎아, 꽈배기 반죽 말듯 부드럽게 스윙하는 백현진. 그가 애타지만 슬프지 않은 목소리로 ‘사자티셔츠'를 돌려달라고 호소한다.


‘니가 빌려 간 사자티셔츠 왜 돌려주지 않는 건지, 그 셔츠가 요즘 가끔 생각이 나, 니 마음대로 가져간 거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자 티셔츠...’


김오키의 색소폰은 빗속의 헤드라이트처럼 앞을 비추고, 이태훈의 기타 줄은 얌전히 찰랑거리며, 진수영의 피아노는 공기 중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장식을 다 걷어낸 프로페셔널들의 ‘청순한 자아도취'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뒤따르는 감정은 평안이다.


더 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춰 조금만 하는 정확한 연주, 최소한의 창법으로 체념하듯 불러진 노래… 김밥과 색소폰, 고속도로와 피아노가 비벼진 이야기가 귀에 당도할 때 드는 이상한 안도감.


백현진을 만났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문화계를 자기만의 촉과 속도로 관통해온 차분하게 시끄러운 남자. 장영규와 결성한 어어부 프로젝트, 방준석과 함께한 프로젝트 그룹 방백으로, 20년 넘게 지치지 않고 사운드를 만든 인디 음악계의 아웃라이어이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까지 오른 성실한 현대미술가, ‘개장수’로 얼굴이 알려진 배우이기도 한 삼위일체의 사나이.


막걸리와 샴페인을 섞은 것 같은, 높고 샤프한 탁성으로 그가 말했다. "즐거움 없인 계속할 수 없다"고, "완성이나 발전 없이 수평 이동만 있으니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세련되다고 하는 것들이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예술은 메타포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문화역사 서울의 ‘호텔사회' 전시를 위해 옛 서울역에 매트리스를 산처럼 쌓아놓고 달려온 참이었다. 연남동 작업실은 무질서한 공간에, 웃자란 식물들이 군데군데 터를 잡고 있어 싱싱하게 그로테스크했다. 바닥의 물감을 피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백현진은 21세기의 신선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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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시는 분인가요?


"개장수, 사채업자, 재벌 2세, 지방대 교수… 길거리에서 저를 보면 갸우뚱하세요. "어? 심민아(드라마 ‘내일 그대와'에 함께 출연)... 어? 김선아(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 함께 출연)"이러시는데… 하하, 저 신민아 아닙니다. 저는 백현진입니다. 소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요."


-어쩌다 보니 부업인 ‘연기’가 당신 일의 메인 스트림으로 들어왔군요. 노래하던 김창완이 연기하는 김창완으로 변이되던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오버랩입니다.


"영화 ‘경주'에서 신민아 씨를 상대하는 지방대 교수로 나온 이후 영화와 TV에서 저를 찾기 시작했어요. 제 얼굴에 ‘밉상인 40대 아저씨'가 잘 붙나봐요. 알고 보면 여린 김의성 씨도 시장에선 ‘부산행'의 악독한 꼰대로 인기였었죠(웃음). 저는 독립 영화에선 느리고 멍때리는 수다꾼으로 상업 영화에선 재수 없는 나쁜놈 얼굴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시장에서 그렇게 소비되는 게 재미있나요?


"처음엔 어색하고 쑥스러웠죠. 이젠 인정합니다. 몇 가지 일 중의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 더 즐거워요. 저는 붓질하고 소리를 다뤄요. 그 일이 너무 즐거워서 나머지 하나의 정체성도 즐겁게 해낼 수 있지요."


백현진은 2004년부터 연남동의 주택의 한 공간에 세 들어 살고 있다. 화가로 좀 더 잘 나가기에 3층 전셋집에선 그림을 그리고, 2층 월셋집에선 음악을 만든다. 치열하게 ‘예술 작업을 한다’가 아니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일을 본다'.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일을 본다'라는 말에는 어떤 압박도 느껴지지 않는다. 얄미우리만치 느긋한 언어 선택에서, 히피와 힙스터의 무드가 동시에 읽혔다.


-연기하고 그림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번아웃으로 탈진한 현대인은 당신같은 느슨한 형태의 유닛 라이프를 꿈꾸지요.


"가족이 생기면 이런 패턴이 힘들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20대 때부터 지인들과 예술가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제 결론은 저란 사람은 ‘주문받고 컨폼받는 일은 못하겠다'였어요. 넓게 보면 외부에서 주문과 컨폼 없이도 자기 삶을 이어가는 게 예술가의 디폴트(기본값)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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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지만 외부의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주문과 컨폼을 한다는 건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하죠. 그렇지 않나요?


"아니요. 저는 고통이 없어요."


-창작의 고통이 없다는 말인가요?


"(담담하게)없어요. 청년 시절, 저는 먼저 세상을 살다간 철학자나 과학자들의 삶을 종종 엿봤어요. 그들의 삶을 귀동냥하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어떤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상위개념이라는 걸. 어떤 사람이 되면 작품은 그에 맞게 따라와요. 사운드가 있고 뮤직이 있는 것과 같죠. 순서로 따지면 사람이 예술의 선행 조건이죠."


-이를테면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가 작품으로 그대로 나온다는 거죠?


"맞아요. 그래서 현재 불안해한다고 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아요. 내가 달라지지 않는 한 현재의 내가 나올 뿐이죠. 불안해봤자 소용없으니 불안하지 않기로 했어요, 저는."


-목표가 뭐죠?


"없어요. 계획이 있고 목표가 정확하면 불안했겠죠. 가령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거나 수준에 못 미치면 안절부절못하잖아요. 저는 목표가 없어요. 그래서 아등바등 무리를 안 해요. 제가 원하는 건 오로지 무리가 없는 상태예요. 절대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웃음)."


-노래를 들어보면 보컬뿐 아니라 색소폰, 피아노, 기타… 세션들도 하나같이 선수와 백수 사이를 오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딱 내야 될 소리만 정확히 내면서 에너지나 감정의 낭비가 없더군요. 힘을 뺐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힘을 안 들인 느낌이었어요. 기승전결도 신경 쓰지 않고요.


"(함빡 웃으며)맞습니다. 선수와 백수 사이에 있고 싶어요. 저만해도 영감을 쥐어짜고 타인을 괴롭히고 온갖 진상 다 떨면서 나온 음악이 싫어졌어요. 그게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음악으로라도 그런 경향을 보여주고 싶어요. 즐겁게 일해서 나온 결과물이니 편하게 막 가져다 들으시라고."


‘나를 쥐어짜고 남을 괴롭히고’ 예민함으로 찔러서 만든 작품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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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솔로 앨범 ‘가볍고 수많은'. 백현진의 사실주의 절창과 특유의 기이한 몸짓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상업적인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때론 나와 남을 쥐어짜야 할 때도 있지요.


"(단호하게)저는 완성도를 믿지 않아요. 수정과 개선과 발전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인류 문명도 발전이 아니라 변화와 변경 정도에요. 작은 단위에서 개선이 있을지언정 역사도 변화를 겪을 뿐이죠. 그런 철학이 정착되니 작업할 때도 마감(finishing)이나 목표(destination)가 없어요. 아예 그 욕심을 안내요. 일상생활도 그렇고요."


-‘완성’은 없고, 그저 과정 중에 손을 뗄 뿐이다?


"그렇습니다. 누군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고 싶지 않겠어요? 즐겁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보다가 정해진 시간에 손 떼면 끝이 나는 거죠. 마감이 좋아지고 수준이 높아졌다? 전, 모르겠어요. 즐겁게 변경 시켜 나가면, 몸과 마음에 무리가 덜해요. 그런 상태가 반복되면 무리가 점점 덜해지겠죠. 전 그런 상태를 희망해요."


-이번 앨범이 그런 상태인가요? 욕심과 무리를 완전히 덜어낸?


"제가 20년 정도 음악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 앨범을 제일 많이 듣고 있어요. 너무 잘 만들어서? 아니에요. 완성도? 세련미? 감각이 좋아서? 아니죠. 작업 과정에서 무리를 안 한 음악이라, 자꾸만 더 듣고 싶어지는 거예요."


백현진은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버지와 외향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자신,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롭게 자란 게 예술가의 바탕이 됐다고 했다. 입시 미술로 홍대 조소과에 들어갔고, 입학하던 해 봄에 베이시스트 장영규를 만나 95년 어어부 프로젝트로 데뷔했다. 학교는 자퇴했다. 96년에 밀라노에서 화가로 첫 전시를 했다. 영화 ‘반칙왕'의 단역으로 시작해 연기의 지경도 넓혔다. ‘복수는 나의 것' 등의 스크린에 하드보일드한 사운드를 입히며 홍상수, 김지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음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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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은 무리를 많이 한 음악이었지요?


"그렇죠. 분노, 냉소, 농담이 집약적으로 터져 나온 음악이죠. 그악을 떨고 호통을 치고… 몰아붙이는 힘이 있는. 그런데 젊은 시절 무리했던 그 음악이 더 훌륭하냐? 아니에요. 그냥 다른 거예요. 발전은 수직이지만 변화는 수평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지 않아요. 뻔히 다 알면서 체념, 좌절, 불안을 맞닥뜨릴 이유가 없어요."


-목소리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앰프처럼 성량이 좋으니, 탁한 듯해도 청아하게 들리던걸요


"중학교 시절부터 이상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기자들도 ‘노래는 못하지만, 음악은 독창적이다' 뭐 이렇게들 평가하셨고. 하하. 여하튼 난 이 목소리로도 내 볼일을 봐야했어요. 다르면 고마운 거 아닌가, 하면서 노래했죠. 그런데 연기 현장에서 다른 평가가 나왔어요. 배우들은 연기할 때 슛하면 목소리가 자동으로 높아지거든요. 저는 안 그래요. 음량이 고르고 딕션이 좋다는 거죠. 녹음 기사가 말해줬어요. 그런데 택시 기사들은 또 제가 말하면 한국인이 아닌 것 같대요(웃음)."


-김창완이나 신구 선생처럼 호흡이 둥글고 당김음이 찰져요. 공기 반 소리 반 어법이면서도, 딕션이 좋아 가사든 대사든 귀에 쏙쏙 박히죠. 혹시 판소리를 했나요?


"제가 거리 출신이에요(웃음). 미술도 최정화, 이불, 안은미를 동네에서 따라다니며 배웠죠. 노래는 10대 시절엔 한대수같은 보컬리스트를 지향하다, 어느 순간 톰 웨이츠를 레퍼런스로 삼았어요. 20대 중반 쯤되니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이러면 톰 웨이츠의 주석이나 되겠구나... 그때 남도소리꾼 박병천 선생의 소리, 고수 김데레 선생의 구음를 만났어요.


신기하죠? 영미의 사운드가 썰물처럼 빠지고 로컬이 밀물처럼 몸에 들어왔어요. 직관적으로 우리의 좋은 소리를 모으고 뭉개서 서른 중반에 지금의 제 소리가 만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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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래를 많이 듣나요? 밥 딜런이나 레오나도 코헨의 느낌도 있고 재즈와 택견의 호흡도 느껴지더군요.


"밥 딜런과 레오나드 코헨, 대단한 뮤지션이죠. 요즘엔 송창식과 신중현과 조동진을 들어요. 특히 송창식은 완전히 다른 음악을 했던 사람이에요. 점점 그 맛에 감탄하게 돼요."


-송창식은 우리말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포크송으로 만들어냈죠. ‘딩동댕 지난 여름'이나 ‘푸르른 날'같은 곡은 명곡입니다. 백현진 씨의 이번 앨범 제목도 좋더군요. ‘가볍고 수많은'.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어요.


"(놀라며)녹음할 때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을 읽었죠. 그분이 제 앨범에 코멘트를 해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성향상 저는 무거운 걸 좀 못 견뎌해요. 우디 알렌은 좋아해도 최민수는 못 견디는 스타일이죠. 이야기 안에 애환은 있지만, 스타일은 좀 무리없이 가볍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시장에서 성과는 좀 있습니까?


"전무합니다."


-성과가 전무하다고요?


"네. 괜찮아요. 저는 그 부분에선 훈련이 돼있습니다. 다행히 2005년부터 미술에서 성과가 있고 연기자로 활동도 많아졌어요. 지금은 설령 음악이나 미술에서 성과가 없어도 계속 할 뱃심이 생겼죠."


-타인의 무관심 속에서 20년을 지속했다는 거죠?


"(담담하게)그렇죠. 저는 언제부턴가 눈을 감고 불러요. 차마 눈뜨고 노래할 수 없어서요. 장영규와 95년부터 어어부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노래하다 보면 그나마 한 명 있던 관객도 나가는 거예요. 당시엔 저도 청년이라 얼마나 마음이 이글이글했겠어요. 안 보려고 눈을 감고 노래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몸에 습관이 됐어요(웃음)."


-시장에 눈을 감았다...


"시장에 눈감지 않으면 못 버텨요. 본능적으로 그 앱이 개발된 거죠. 성과가 없어도, 혹평이나 무관심 속에서도 나는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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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경이롭군요.


"(활짝 웃으며)그 부분에서 멘델에게 감사해요. 저는 그 자세를 멘델에게 배웠어요. 멘델이 잡종 교배 실험할 때 학계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고 마침내 그의 손을 들어줬죠. 지칠 땐 멘델을 생각해요. 자기 일을 오래 할 사람이라면, 멘델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도 좋아요(웃음)."


시장에선 무관심했지만,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 홍상수는 그를 동시대 예술가로 지지했다. 전설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와 박찬욱 감독은 백현진과 작업하며 그를 천재로 인정했다. 문득 어둑한 실내에 알전구가 켜지듯, 불 오른 필라멘트처럼 심지가 또렷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어쩌면 이건 AI와의 경쟁이라고.


-AI와의 경쟁이라니요?


"AI 때문에 직업이 줄어들면, 즐거움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어요. 즐거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요.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든 잘 놀고 해법을 찾죠. 그런 건 구청이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줘요."


-마침 ‘워라밸'이 대세가 되고, AI로 직업의 경계가 혼선을 빚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사람마다 상황이 다른데 무턱대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계몽할 순 없고요. 여하튼 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장에서 성과가 있든 없든, 제가 재밌는 일을 했어요. 현재로선 연기나 현대 미술 분야에서 아웃풋이 나오는 상황이니, 저도 보기에 따라 기득권자죠. 제 삶이 ‘저렇게 살아도 굶지 않네, 살만하네'를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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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지요?


"요이땅하면, 그냥 반응해요. 저항 없이 쓱쓱… 그런 게 재밌어요. 영화 현장에 있을 때는 홍상수 감독을 종종 엿봤어요. 봉준호 감독처럼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아웃풋을 내는 분도 훌륭하지만, 저는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일을 보는 편이에요."


-‘작업하다, 관찰하다’처럼 올인하는 정자세의 언어보다 ‘일보다, 엿보다’… 이런 식의 힘을 뺀 언어를 쓰는 이유는 뭐죠?


"업계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보통 ‘작업하다'잖아요. 저는 그 말이 알맹이 없는 동사처럼 느껴져요. 화장실 갈 때도 ‘일 보다' 그러잖아요(웃음). 그 정도가 좋아요. 자연스럽잖아요. 저한텐 그림도 그린다 보다 ‘그려진다'예요. 의도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그려져' 있거든요."


-힘을 뺀 채로 순간에 집중한다는 거죠?


"맞아요. 무리 없이 성실하게. 마음이 즐거우니 집중도 잘돼요. 겉에서 보면 과정은 산만해 보여요. 3층 화실에서 전 이 그림 저 그림, 붓 닿는 데로 색칠을 하죠. 오죽하면 두 번째 개인전 제목이 ‘산만과 실체'였겠어요(웃음)."


-인생에서 가장 힘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였나요?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 때요. 제가 힘이 없어서 무거운 걸 잘 못 들어요. 디스크판정을 2번 받았어요. 근력이 약해서 흙, 철골, 망치질, 용접 등을 하는 조소과 하고는 처음부터 안 맞았어요(웃음)."


-그래서 산책과 낮잠을 좋아하는군요(웃음).


"네, 하염없이 걷는 것을 좋아해요. 잠도 자고 싶을 때 잘 자죠. 운이 좋아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16년엔 PKM 갤러리에서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이라는 제목으로 그림 전시를 했는데, 이번엔 문화역사 서울의 전시 ‘호텔 사회’에서 아예 ‘낮잠용 대객실'을 미술 작품으로 설치했더군요.


"서울은 물론이고 다들 사는 게 힘들잖아요.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도 많아지고요. 일시적이지만 잠시라도 누워있다 가시라고, 옛 서울역사에 2층에 객실 매트리스를 켜켜이 쌓았어요. 조도도 낮추고 잠이 잘 오도록 제가 수면 유도하는 자장가도 즉석에서 연주해 드려요(웃음)."


노숙자도 힙스터도 낮잠 고객으로 다 환영이라고 했다. 그 자신, 물결을 보며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는 백현진. 주눅 들거나 우쭐해 하며 뒤숭숭하게 지내는 것보다 멍때리며 시간을 통과하는 게 대자연의 일부로 더 깔끔하지 않으냐고 읊조리듯 말했다. 어쩌면 그것과 가장 유사한 행동이 음악 하고 그림 그리는 행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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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 그렇게 평온한가요?


"가끔 그런 말 들어요. ‘너 아직도 음악 하고, 미술 하고 사냐?’ 그렇게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전 이상하게 하나도 지치지 않아요. 재밌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변경하면서 놀아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없이. 피드백이 있으면 땡큐고, 없어도 그냥 가요. 반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앱이 몸에 장착돼 있어요(웃음). 너무 엎치락뒤치락하며 사는 것보다 좀 잠잠히 멍 때리듯 사는 게, 자연과 운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3~5년 피드백이 없어도 견딜 수 있을까요?


"상관없다고는 못해요. (미소지으며)그런데 즐겁게 성실하게 일을 보면, 조금씩 운신의 폭이 생겨요.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잘 팔리는 그림, 잘 팔리는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나요?


"20대 초중반에 알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내 스타일대로 하다가 반응이 오면, 그때부터 오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실제론 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확률이 희박해 보여서, 낙담하던 시절도 보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반응이 온 거죠. 밀라노 첫 개인전에서요. "말도 안 돼. 그림이 팔리다니!" 그리고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5년 전속 계약을 했죠."


자기를 믿고 끝까지 해내는 뱃심은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는 듯 보였다. 등가의 법칙이랄까. 다만 No Pain No Gain은 백현진의 육체를 거치면서 No Pleasure No Gain으로 수정되었다. 즐거움 없인 얻는 것도 없다. 최고의 가치 기준은 즐거움. 은행 잔고를 확실히 채워주던 영화 음악 작업도 그만뒀다.


-영화 음악은 왜 더이상 하지 않나요?


"2000년대 중반까지 하고 접었어요. 돈은 벌 수 있겠지만 제가 즐겁게 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주문과 컨폼이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에요. 마감은 맞출 수 있는데 컨폼을 받는 건 죽을 것 같았어요(웃음). 그런 체계로 일하면, 저는 제 성질에 못 이겨 죽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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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무리 없이 일보는 맛을 본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해맑아 보였다. 주문받고 박수받지 않아도 스스로 작동되는 일과 삶을 일궈왔으니, 스스로 얼마나 기특할까.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시키는 일을 하며' 군말 없이 주문과 컨폼의 트랙을 달려온 청년들은 ‘노오력'의 배신에 분노하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고 어른의 세계를 조소했다. 그 여진으로 지금 서점가엔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라는 제목의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열심’의 에너지가 체념의 블랙홀로 빠져들어 갔을 때, 그 공허를 헤쳐가는 안간힘은 어디서 나올까.


-개인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이 ‘나다움’을 이야기해요. 백현진 씨에게 ‘나답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저는 오랫동안 나에 대해 신경을 끄고 지냈어요. 나 말고 저 바위, 나 말고 저 비행기, 나 말고 저 나무, 나 말고 저 냉장고를 궁금해했죠. 200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 달 간 여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판이 사람들의 도덕성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봤어요. 거기서 결심했죠. 아! 이젠 내가 나를 좀 궁금해해도 되겠구나."


‘나다움'이 아니라 ‘나를 궁금해해도 되겠다'는 전지적 겸손의 시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딘가에 청년 시절의 자기가 살고 있어 ‘좀 살만하다고 깝치면 분노할 것 같다'고, 그가 자기 검열하듯 말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궁금증은 어떻게 풀렸습니까?


"오랫동안 나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붙들고 있다고 답이 나오진 않더군요. 그래서 궁금해할 시간에 일이나 봐야지, 했어요. 불안해하지 말고 일 좀 보자(웃음)! 사람마다 문맥이 다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으면 생각을 붙들지 말고 움직여야 해요. 다행히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나의 무언가가 나오죠. 저는 가볍고 수많은 나를 보기 위해 작업량을 늘렸습니다(웃음)."


-술렁술렁 일을 보듯, 관대하게 나 자신을 보는군요. 백현진으로 사는 게 즐거운가요?


"약간은 쑥스럽지만, 큰 무리는 없습니다. 개인전이나 공연을 앞두고도 예민하지 않아요. 평소처럼 즐겁게 평정심을 갖고 일합니다. 흐뭇한 상태에서 만들면 결과물에도 좋은 감정이 생겨요. 일도, 삶도… 가능한 무리 없이, 쓱쓱 뚝딱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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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신의 폭이 생기는 정도로 자족하는 마음. 과거도 미래도 성공도 실패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백현진의 담력이 놀랍다. 존 레넌이 그랬던가. 즐겁게 낭비한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고. 무리하지 않으며 즐겁게 지속하는 일, 발전과 완성의 강박으로 나도 남도 박해하지 않고, 오직 변화와 확장을 도모하는 예술가의 삶. 그 모습이 저성장의 미니멀 라이프 시대를 살아갈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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