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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김성윤의 맛 세상] 바이주까지 섞은 호주 와인, 중국서 눈물 흘리는 이유

중국 시장 겨냥해 바이주 섞은 호주 와인 ‘로트 518′

개발 업체 매출의 절반 이상이 中에서 나와

호주, 미 주도 ‘쿼드’ 참여하자 중, 경제 보복

이탈리아·칠레·아르헨티나가 빈자리 노려


‘로트 518(Lot 518)’은 호주 와인 업계가 중국 시장을 겨냥해 2018년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750㎖ 1병당 100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나름 고급 와인으로 분류됐다. 이 와인을 개발한 곳은 병당 180만원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인 ‘그랜지(Grange)’ 등을 생산하는 호주 대표 와인 업체 펜폴즈(Penfold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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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518은 주정(酒精) 강화 와인(fortified wine)으로 불린다. 주정 강화 와인이란 주정(증류주)을 섞어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으로 이렇게 하면 오랫동안 쉽게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과거 장기 항해 과정에서 와인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활용했던 방법이다. 이미 포르투갈 포트나 스페인 셰리, 이탈리아 마르살라 등 비슷한 제품이 있기도 하다. 보통 주정 강화 와인에는 포도를 증류한 브랜디를 첨가하는데 로트518은 그 대신 중국 술 바이주(白酒)를 섞었다. 이 때문에 로트518에는 중국 향신료인 팔각(八角)이나 열대 과일, 장류 같은 바이주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난다. 바이주는 중국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고량주, 마오타이 모두 바이주의 한 종류다. 덕분에 로트518은 향이 독특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다.


로트518을 맛본 서양 전문가들 평가는 “맛과 향이 독특(unique)하다”가 대다수였다. “독특하다”는 사실 명백한 결함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썩 훌륭하달 수 없을 때 에둘러 사용하는 표현. 그 맛이 더욱 궁금해져 어렵게 한 병을 구해 지인들과 시음했다. 마셔보니 정말 독특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첫 맛은 호주의 대표적 와인용 포도 품종인 시라즈로 만든 레드와인이지만, 마시고 나면 중국 향신료나 파인애플, 망고 같은 열대 과일 향이 난다는 이도 있었다.


나중에 떠올려보니 국내에서 한때 유행한 ‘드라큘라주’가 연상됐다. 와인에 맥주와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 말이다. 물론 드라큘라주만큼 거칠거나 거북하지는 않았다. 호주 최고의 와인 메이커가 섞어서 그런가, 레드와인과 바이주의 비율이 아주 절묘했다. 입에서 맛을 보고 목으로 넘길 때까지는 분명 레드와인인데, 마시고 나서 올라오는 풍미의 여운은 바이주라니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기심에 한 번 마셔보면 그만이지, 앞으로 계속 마시고 싶은 술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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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와인업체 펜폴즈에서 중국 바이주를 넣어 만든 주정강화화인 '로트 518(Lot 518)'./펜폴즈

펜폴즈는 주정 강화 와인에 주정으로 서양 술 브랜디 대신 중국 술 바이주를 섞자는 아이디어를 중국 소비자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주정 강화 와인에 어떤 주정을 섞어야 하는지는 규정돼 있지 않다. 한국 사람들이 소주나 위스키에 맥주를 타 마시듯, 중국 사람들은 와인이 싱겁다며 바이주를 섞어 마시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


펜폴즈가 중국에서나 팔릴 와인을 개발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중국 와인 소비량은 2019년 기준 17억8000만L. 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에 이어 세계 5위다. 중국은 이미 거대한 와인 소비국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란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런 중국에서 그동안 호주 와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중국은 호주 와인의 가장 큰 시장으로, 매년 호주 와인 총생산량의 39%를 수입했다. 수출 규모는 연 8억달러를 웃돈다. 로트 518을 개발한 펜폴즈는 특히 중국 시장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코로나 사태 전까지 펜폴즈가 한 해 벌어들이는 매출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나왔다.


그러나 중국에서 호주 와인의 좋은 시절은 코로나 사태로 끝났다. 코로나가 창궐하자 호주는 바이러스의 발원과 확산 경로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홍콩·위구르 탄압을 비판하고, 화웨이의 5G 사업도 불허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지역 안보 협력체 ‘쿼드’에도 참여했다. 그러자 분노한 중국은 호주의 경제 의존도를 보복 카드로 사용했다. 호주산 와인이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중국은 호주산 와인에 반덤핑 관세 212%를 부과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별도의 상계관세 보증금까지 부과하기로 했다. 상계관세는 수출국에서 보조금을 지원받은 제품이 수입돼 자국 산업이 피해를 본다고 판단할 때 부과하는 관세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 했던가. 호주 와인이 눈물 흘리는 동안 세계 곳곳의 와인 산지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중국 와인 시장에서 호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 각국 와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술 섞은 이탈리아·칠레·아르헨티나 와인이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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