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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내 없는, 덜어내고 덜어낸 국물… 시간 들여 끓여낸 맑고 바른 맛

서울 공덕동 '곰탕반'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이던 시절 어머니는 곰탕을 자주 끓였다. 부산 범일동 중앙시장 끝자락에서 신발 가게를 하며 생계를 잇던 때 우리 가족은 영도의 다락방 딸린 단칸방을 벗어나 바로 옆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가스레인지와 몸 씻는 물을 담아 놓은 빨간색 대야가 같이 있던 어두운 주방에서 어머니는 큰 솥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이틀 내내 곰탕을 고았다.


지금보다 목소리가 더 컸고 팔뚝이 굵었던 아버지는 곰탕을 마시듯 들이켜고 어머니와 함께 가게로 나갔다. 마대자루에 담긴 신발과 구두를 양 어깨에 지고 행인들과 싸우듯 흥정했다. 어머니는 그 곰탕을 우리 형제에게도 보약처럼 먹였다. 아침 학교 가기 전 후춧가루와 파를 썰어 넣은 곰탕 한 그릇을 먹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나서 보건대 곰탕을 끓이고 먹이던 부모의 그 억척같은 삶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서울 공덕동 곰탕반 한우곰탕.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명동에 본점을 둔 '하동관'을 찾는 이들도 그런 기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리라. 해방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된 하동관은 싸지 않은 값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맛과 또 추억들 덕에 매일같이 긴 줄을 만든다. 청와대 앞 팔판동 '팔판정육점'에서 받아 쓴다는 한우 암소 고기로 우린 국물은 입에 딱 달라붙는 감칠맛과 넉넉한 기름기가 눈에 확연하다. 뜨거운 놋그릇을 맨손으로 날라주는 종업원에게 받은 곰탕 한 그릇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한 그릇이다. 고기를 건져 먹고 '깍국'이라고 부르는 김칫국물까지 타서 먹으면 남은 하루를 더 기운 내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명동에서 남대문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 한국은행 앞에 가면 '애성회관'이 있다. 간장으로 간을 한 국물에 하얀 중면을 말아서 올려주는 게 특징인 이 집도 점심마다 장사진을 이룬다. 살짝 거뭇한 국물은 기름진 맛보다 개운한 맛이 더 강하다. 내장을 섞어주는 하동관과 달리 사태와 같은 살코기만 고명으로 얹어 주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파를 잔뜩 올려 국물에 섞은 뒤 토렴한 밥과 함께 훌훌 말아 먹는 하얀 셔츠 자락 샐러리맨들,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등산 조끼를 입고 끼니를 때우러 온 근처 상인들,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까지 모두 곰탕 그릇에 고개를 박고 빠르게 점심을 해치우는 모습은 한국만이 가진 풍경이다.


조금 더 차분한 식사를 원한다면 공덕동에 새로 생긴 '곰탕반'에 가보자. 아파트 상가 1층에 자리 잡은 이 식당은 여느 곰탕집처럼 규모가 크지도, 사람들이 밀려들지도 않는다. 작은 주방에는 파란 불꽃을 내는 가스레인지 대신 전자력으로 물을 끓이는 인덕션이 있다. 그 앞에 선 직원들도 식당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철야로 프로그램을 짜거나 대차대조표를 맞춰볼 듯한 인상을 지녔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분량을 큰 냄비에서 작은 냄비로 옮겨 담아 다시 끓여 낸다.


음식에서 계보와 족보를 굳이 따지자면 간장으로 간을 하고 살코기를 툭툭 잘라 넣어주는 나주곰탕류가 아닌 밥을 토렴해 내장 등속과 함께 놋그릇에 내는 하동관류에 가깝다. 그러나 맛은 기름기가 훨씬 덜하고 그 때문에 단정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명으로 올라온 고기는 부드럽고 내장에도 잡내가 없다. 찬으로 나온 김치는 상온에 오래 두어 나는 군내 없이 시원하고 말끔하다. 무엇을 더하기보다는 덜어내고 덜어낸 국물은 맑고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처럼 바른 맛을 낸다. 곰탕이란 원래 그런 맛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간 들여 큰 솥에 여러 번 물을 부어가며 자리를 지켜내 받아낸 국물. 태양 아래 온몸으로 흘리던 그 짭짤한 맛을 닮은 속일 수 없는 맛.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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