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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바나나맛 우유①어떻게 47년을 '반하나'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47년간 가공유 시장 1위 70년대 정부 우유 장려책으로 탄생…폭발적 인기 [비즈니스워치] 정재웅 기자 polipsycho@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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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 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추억 #목욕탕 #때밀기 #대를잇는맛 #바나나맛우유


일요일 오후면 늘 우울해졌습니다. 아버지의 "가자" 한 마디에 저와 동생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아버지를 따라 나서야 했습니다. 목적지는 동네 목욕탕. 매주 한 번씩 거쳐야하는 의식이었죠. 그게 그렇게 싫었습니다. 너무 아팠거든요. 아버지는 일주일간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저와 동생에게 푸시려는 것이었을까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때를 밀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때밀기는 제게 공포였습니다. 까실까실한 '이태리 타월'이 제 몸에 닿는 순간부터 지옥입니다. 아버지의 때밀기 신공이 끝나고 나면 저는 녹초가 됐습니다. 가장 싫었던 부분은 쇄골입니다. 아버지의 이태리 타월이 지나간 쇄골 부위는 늘 따가웠습니다. 깨끗이 밀어주려 하신 것은 알겠는데 너무 아팠습니다. 까지기 일쑤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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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참아내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꼭 목욕이 끝나고 나면 제 손에 '바나나맛 우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얇은 빨대를 '뽁'하고 끼워 건네주시던 바나나맛 우유는 방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쳤던 제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나나맛 우유는 그렇게 제게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직도 목욕탕을 생각하면 바나나맛 우유가 생각날 정도니까요.


바나나맛 우유의 맛은 대를 잇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이들에게 목욕 후 건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 음료수 냉장고 앞에 서서 "뭐 먹을까?"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바나나 우유요!"를 외칩니다. 몇번이고 다른 음료수를 밀어봐도 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사실 바나나맛 우유는 일반 우유에 비해 비쌉니다. 하지만 아빠를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지갑을 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추억은 누구나 다 있으실겁니다. 디테일은 달라도 늘 목욕탕 하면 바나나맛 우유가 떠오릅니다. 그만큼 바나나맛 우유는 우리의 머릿 속에, 혀에 깊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추억의 맛, 아는 맛의 힘은 참 무섭습니다. 양손에 바나나맛 우유에 꽂힌 빨대를 사정 없이 빨며 제 뒤를 따라오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저의 목욕탕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전 그래도 우리 애들 쇄골은 지켰습니다".


#바나나맛우유의시작 #박정희가왜나와


이렇게 중독성있는 바나나맛 우유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바나나맛 우유의 시작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올해로 47년이 됐네요. 빙그레의 전신인 대일유업에서 만든 제품입니다. 대일유업은 창업주가 1960년대 베트남에서 아이스크림을 제조해 미군에 납품하던 경험을 살려 만든 회사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적자로 1973년 당시 한국화약그룹(현 한화그룹)에 편입됩니다.


대일유업의 히트작품은 바나나맛 우유뿐만이 아닙니다. 한국화약그룹에 편입된 이후 국내 최초로 생우유를 넣은 고급 아이스크림 '투게더'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대일유업은 1982년 현재의 사명인 빙그레로 이름을 바꿉니다. 빙그레는 1998년 한화그룹에서 계열분리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히 바나나맛 우유를 비롯한 여러 스테디셀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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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의 탄생에는 스토리가 하나 있습니다. 70년대는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런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경제발전에 국력을 모으던 시기였죠. 바나나맛 우유의 탄생은 이런 시기적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우유 소비 장려정책을 폅니다. 여기에는 박 대통령과 연관된 일화가 있습니다.


1964년 당시 서독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현지 학생들이 우유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우리 국민도 우유를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고 서독 정부가 50만 달러의 차관과 젖소 200마리를 지원했습니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국내에서도 낙농 사업이 시작됩니다. 낙농 사업이 본격화되자 우유가 대량으로 생산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우유를 소비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나나 #신의한수 #공전의히트


바나나맛 우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제품입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우유는 생소한 식품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우유와 관련된 역사가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목장 문화는 있었습니다. 우왕때는 국가 상설 기구로 '우유소'를 설치해 왕과 일부 귀족들이 마셨던 고급 식품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왕들이 몸을 보하기 위해 미음에 우유를 섞은 타락죽을 보양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만큼 우유는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일반 서민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우유를 정부가 많이 먹으라고 장려하고 나선겁니다. 정부에서는 남아도는 우유 소비가 급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우유가 몸에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은 선천적으로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합니다. 이때문에 우유를 마시면 화장실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학교 급식으로 지급된 우유를 마시고 배탈나는 아이들이 많아져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찬우유를 먹여서 그런 것이니 따뜻하게 데워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하지만 우유를 데우면 영양분이 파괴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자 이런 주장은 쏙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웃지못할 해프닝이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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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료=빙그레]

어쨌든 우리 국민들에게 흰우유는 참 많이 생소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이니 정부가 하라면 해야하기는 한데 배탈이 자주 나니 참 난감했을겁니다. 바나나맛 우유는 우유를 둘러싼 정부와 국민들간의 이런 일종의 괴리(?)를 메워줬습니다. 일단 바나나는 당시에 무척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수입제한 품목이었던 만큼 쉽게 접할 수 없는 과일이었습니다. "바나나를 먹어봤다"고 하면 있는 집 자식이었던 시절입니다. 물론 지금은 흔하지만요.


당시 대일유업에서는 이런 점에 착안했습니다. 우유를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으면서도 맛도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나나였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의 한수'입니다. 대일유업이 출시한 바나나맛 우유는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일반 우유보다도 가격이 높았음에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흰우유가 생소했던 소비자들에게 달콤한 맛과 향에 그 귀하다는 바나나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던 바나나맛 우유는 신세계였습니다. 사실 바나나와 바나나맛 우유에서 느껴지는 바나나맛은 다릅니다. 실제로 현재 판매되고 있는 바나나맛 우유에는 바닐라향이 첨가돼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노란색의 바나나맛 우유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신문물'이었던 셈입니다.


#만날1등 #색깔논쟁 #바나나는원래하얗다 #그래도바나나맛우유


바나나맛 우유는 국내 가공유 시장의 최강자입니다. 가공유는 원유 또는 유가공품에 다른 식품이나 식품첨가물 등을 더한 후 살균, 멸균처리한 우유제품을 말합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초코우유, 바나나우유, 딸기우유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재 국내 가공유 시장에서는 60여 종의 가공유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 중 바나나맛 우유의 가공유 시장 점유율은 80%에 달합니다. 압도적입니다.


바나나맛 우유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입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하루 판매량이 한때 80만 개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또 우유 단일 제품으로는 국내 최초로 연매출액 1000억 원을 넘긴 제품입니다. 물론 잠시 시련도 있었습니다. 바나나맛 우유의 독주를 막으려고 매일유업에서 지난 2007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는 제품을 내놨습니다. '바나나=노랗다'는 고정관념을 깨겠다는 취지였는데 실은 바나나맛 우유를 저격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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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매일유업에서 내놓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CF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바나나맛 우유는 잠시 위기를 맞는 듯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대부분의 우유업체들은 바나나맛 우유와 마찬가지로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유업이 제기한 '색깔론'으로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생산하던 업체들은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나나맛 우유는 매일유업의 도전을 쉽게 뿌리칩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바나나는 원래 하얗지만 그래도 바나나 우유는 바나나맛 우유'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국내 첫 바나나 우유였고 추억이 담긴 맛이었기 때문입니다. 머릿 속과 혀에 각인된 맛을 이겨낼 재간은 없습니다. 매일유업의 도전을 뿌리친 바나나맛 우유는 다시 독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47년째 가공유 시장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달항아리 #단지우유 #뚱바 #디자인이곧아이덴티티


바나나맛 우유가 47년간 큰 사랑을 받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바로 병 디자인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나나맛 우유 디자인이 바뀌면 먹지 않겠다"는 열혈팬들도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이런 충성심(?)은 제조사인 빙그레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바나나맛 우유 병 디자인을 변경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나나맛 우유의 병 디자인이 곧 브랜드 정체성을 나타내는 좋은 예인 셈입니다.


사실 제조사 입장에서 바나나맛 우유의 병 디자인은 그다지 유리할 것이 없습니다. 일단 가운데가 통통한 배불뚝이 모양이라 단위 면적당 배치할 수 있는 병의 개수가 줄어듭니다. 보관과 운반도 쉽지 않죠. 특히 매대에 더 많은 제품을 진열하는 것이 유리한 제조사에는 불리한 디자인입니다. 그럼에도 빙그레가 이 디자인을 고집하는 것은 단지 모양 포기는 곧 바나나맛 우유라는 브랜드를 포기하는 것과 같아서입니다.


빙그레가 처음 바나나맛 우유를 출시할 당시 병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유병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유리병과 비닐 팩 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과의 차별을 위해 빙그레가 선택한 것은 폴리스티렌 용기입니다. 반투명한 폴리스티렌 용기를 채택해 바나나맛 우유의 노란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시각적인 효과도 기대한 겁니다.


문제는 모양입니다. 당시 병 디자인을 고민하던 빙그레는 도자기 박람회에서 우리의 전통 달항아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한국적인 미(美)를 담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디자인이다', '산업화 가속으로 나타난 이농현상을 반영해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등 여러가지 설(說)들이 있지만 사실 확 와닿는 설명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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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명한 것은 빙그레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점입니다. 만일 바나나맛 우유를 비닐 팩이나 유리병에 담았다면 오랜 시간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달항아리 디자인은 바나나맛 우유의 한 부분이자 트레이드 마크가 됐습니다. 바나나맛 우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달항아리 디자인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 빙그레가 이런 효과까지 염두에 뒀던 것일까요?


사실 바나나맛 우유 용기는 제작이 어렵습니다. 상하 분리된 구조로 위아래 두 부분을 고속회전하면서 생기는 마찰열로 중앙부를 접합해야 합니다. 상당히 고난도 기술이라고 하네요. 당시 이런 용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기계가 국내에는 없어서 독일에서 수입해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계를 만들던 회사가 없어져 현재 전 세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용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빙그레뿐입니다.


바나나맛 우유 용기 디자인에는 기능적인 측면도 숨어있습니다. 디자인 특성상 어린아이들이 손에 쥐었을 때 떨어뜨리기 쉽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상하 접합 부분 근처에 작은 돌기를 두 줄 넣어뒀습니다. 또 용기의 입구의 테두리가 여타 용기들과는 좀 다릅니다. 일정한 폭을 유지하면서 안쪽으로 돌출돼있습니다. 생각나실 겁니다. 이는 마실 때 용기 밖으로 내용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디자인적 요소와 기술적인 요소 모두를 갖춘 바나나맛 우유의 용기는 제품의 정체성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른 형태의 용기에 담긴 바나나맛 우유에서는 그 맛이 안 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우연이었건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건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 병 디자인은 탁월한 한 수 였습니다. 이 병을 디자인하신 분은 지금 어디 계실까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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