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계세요? 지갑과 지하 사이 어딘가에… 신사임당 100兆
5만원권 발행 - 10년 200조가 풀렸는데…
'세종대왕'(1만원권)보다 높으신 분, '신사임당'(5만원권)이 국민 지갑 속에 자리 잡은 지 23일이면 꼭 10년이 된다. 2009년 6월 23일 처음 발행된 우리나라 최고액권 5만원권 지폐는 지금까지 총 39억3400만여 장, 196조7024억원어치가 풀렸다. 발행 초기엔 '율곡 이이 선생'(5000원권)과 색깔이 비슷한 황색 계통이라 헷갈린다, 불편하다는 지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가 쑥 들어가고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85%(잔액 기준)를 차지하며 '대세 지폐'로 자리 잡았다.
개인과 기업을 거쳐 금융기관에 보관된 후 다시 한국은행으로 돌아온 돈은 발행액의 딱 절반인 98조3798억원어치. 나머지 절반은 개인의 호주머니에서, 병원과 예식장에 보내질 흰 봉투 속에서, 전국 4만여 개 ATM(현금자동입출금기)과 은행 금고, 장롱과 서랍 등에서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1만원권·수표 밀어낸 5만원권
한국은행이 지난해 국민 1100명과 기업체 1100곳을 대상으로 현금 사용 행태를 조사해보니 국민은 거래용 현금의 43.5%, 예비용 현금의 79.4%를 5만원권으로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조금으로는 5만원권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82.4%가 5만원권을 쓰고 있었고, 17.6%만 1만원권을 쓴다고 답했다.
5만원권의 첫단계, 신사임당 얼굴 인쇄前 입니다 - 18일 경북 경산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생산공장에서 배경 그림을 입히는 1단계 평판 인쇄를 끝낸 5만원권 전지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 놓여 있다. 이후 색 변환 잉크, 점자, 홀로그램, 신사임당 얼굴 등을 입히는 여러 인쇄 단계를 거쳐 완성품이 나온다. 5만원권 한 장이 만들어져 한국은행에 납품되는 데 총 40일이 걸린다. /연합뉴스 |
5만원권 등장으로 축의금·경조금 '하한선'은 5만원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신한은행이 최근 전국 만 20~59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동료 결혼 축의금으로 5만원을 낸다는 사람이 59.1%로 가장 많았다. 부모님과 자녀에게 주는 용돈 같은 '사적 이전 지출'에도 5만원권(51.7%)이 1만원권(48.0%)보다 빈번히 쓰였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는 5만원권 지폐 등장으로 거의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10만원 자기앞수표 교환 장수는 2008년 9억3000만장에서 지난해 8000만장으로 줄었다. 김태형 한국은행 발권정책팀장은 "평균 2주일 정도 유통되다가 폐기되곤 했던 자기앞수표는 사실상 '일회용'이었다"면서 "5만원권 등장 덕분에 자기앞수표를 만들어 전산 처리하고 보관하는 유통 과정을 줄일 수 있어 상당한 사회적 낭비를 없앤 셈"이라고 말했다.
한 장 찍는 데 40일, '수명' 10년 이상
5만원권은 다른 지폐와 마찬가지로 경북 경산 한국조폐공사 화폐 본부에서 전량 생산된다. 면(목화) 섬유로 된 지폐 원료로 용지를 만들어 인쇄 후 한은에 납품하기까지, 총 40일이 걸리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친다. 기존 1만원권·5000원권 등에 적용되지 않았던 입체형 부분노출은선(은행권을 상하·좌우로 기울였을 때 은선 속에 움직이는 태극무늬), 띠형 홀로그램(보는 각도에 따라 우리나라 지도, 태극, 4괘 무늬가 보임), 가로 확대형 활판 번호와 디자인 요소 등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됐다. 가로 4장, 세로 7장 총 28장을 한 판에 인쇄해 절단하고 포장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한 번에 잉크를 모두 입히는 게 아니라 총 6번 인쇄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길 거듭한다.
신사임당 인물화의 배경을 앞·뒷면 동시에 찍는 밑그림 그리기, '평판인쇄'가 첫 단계다. 그다음 5만원권 뒷면에 보라색인 듯 초록색인 듯 빛에 따라 달라 보이는 '색변환 잉크'로 숫자 '50000'을 찍는다. 이후 홀로그램을 부착한 뒤 올록볼록 입체감을 주는 '오목판 인쇄'를 뒷면, 앞면 순서로 진행한다. 한 단계 인쇄를 마치면 며칠 이상 잉크를 완전히 말리고 나서 다음 인쇄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한국은행 총재 도장과 지폐 번호 등 '활판인쇄'를 한 뒤 낱장 크기로 절단해 1000장씩 5000만원 묶음으로 필름 포장을 하면 납품 준비가 끝난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장당 제조원가는 비싼 홀로그램 공정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권종보다 당연히 비싸다"며 "장당 평균 원가는 100~200원 사이"라고 전했다.
5만원권 수명은 '1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제 막 출시 10년이 됐는데 아직 낡아서 폐기해야 할 5만원권은 많지 않다는 뜻이다. 1만원권은 평균 121개월, 1000원권은 52개월, 5000원권은 43개월 수준이다. 한은은 "고액권일수록 가치 저장 수단으로도 활용되기 때문에 5만원권 수명이 1만원권보다는 길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지하경제 줄었다는데, 상당량 '미환수'
5만원권 발행으로 지하경제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2002년 16대 대선 때 있었던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은 기업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된다. 당시 LG그룹은 1만원권이 든 사과 상자 63개(총 150억원)를 2.5t 탑차에 담아서, 현대차는 1만원권을 1억원씩 100상자로 만들어 스타렉스에 나눠 담아 '배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사정을 아는 한 기업인은 "5만원권이 있었다면 전달 방법이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후 주요 뇌물 사건에서 티슈 갑, 박카스 상자에 5만원권을 꽉 채워 담아 전달한 사례도 나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1998년 GDP 대비 30%에서 2008년 23.9%로, 2015년에는 19.8%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됐다. 조세재정연구원은 2015년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가 GDP의 8%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한 해 동안 발행된 5만원권 대비 환수된 5만원권의 비율은 67%로, 1만원권(107%), 5000원권(97%), 1000원권(95%) 환수율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김은정 기자(ej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