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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토피 래퍼 씨클

"고통은 내 반쪽, 함께 산다" 청년 래퍼 씨클

"피, 진물, 딱지 반복되는 아토피, 매우 힘든 병"

"고통은 수료증 없어, 덤덤하게 협력하며 살 뿐"

"불행을 연료로… 힙합에서 고통 기록할 언어 찾아"

"10년 간 곱창집 알바… 지켜봐준 어른들에 감사"



조선비즈

우리는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자기만의 통증의 언어를 가진 래퍼 씨클(C.Cle. 본명 김용일, 32살)/사진=고운호 기자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아픈 청춘들이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적인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입안 가득 단어를 머금은 듯한 얼굴로 그가 다가왔다. 침묵을 못 견딘다기보다, 밀려오는 통증에 파도 타듯, 말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말투는 자연스럽게 리듬을 탔다. "고난을 극복한다거나 싸워서 이긴다거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안 해요. 고통은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세 치 혀에 수천 개의 단어를 장전한 후,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저격하는 래퍼라는 일. 고통을 소통하는 래퍼로 알려 씨클(C.Cle 본명 김용일)은 중학교 때부터 원인 불명의 아토피를 앓았다.


통증은 멀리서 말발굽처럼 달려오기도 했고, 개미떼처럼 눈앞에서 기어오르기도 했다. 짜증과 불안과 흥분이 삼투압을 일으켜 신경을 곤두세웠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와 셔츠가 진물과 피와 땀으로 흥건해지곤 했다. 얼굴을 긁지 않기 위해 손을 묶고, 남들 보는 앞에서 스스로 제 뺨을 때리던 무지막지한 날들.


그를 구원한 것은 힙합이었다. 커다란 옷을 입고 후드를 눌러쓰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래퍼들을 보며 소년은 다른 생을 꿈꿨다. 상처와 결핍이 연료가 되는 마이너의 세계, 음표 없이도 음악이 되는 우연의 세계.


청년의 진짜 재능은 자신의 고통을 감지하는 데서 시작됐다. 그가 쓴 랩 가사들을 돌이켜 보건대 맥없는 문장, 허튼 스웨그를 늘어놓을 때는 어김없이 ‘고통의 감각’이 결여되었을 때였다.


중증 아토피 환자로 백내장, 망막 박리, 성대 낭종을 겪은 후 그는 ‘고통 그 자체가 나'라는 결론 내렸다.


씨클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호주와 일본의 시부야에서 노동하고 공연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유명 작곡가 ‘신사동호랭이’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왔고, 지금까지 래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사노피의 ‘나는 가픈(가렵고 아픈) 사람입니다' 캠페인에 참여했다. ‘고통을 기록하며, 덤덤하게 일상을 산다’고 했다.


-지금 컨디션은 어떻지요?


"좋았다 나빴다 해요. 올해 초에 극적으로 안 좋아졌다가, 지금은 살짝 멈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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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으로 성실로 단련된 청년 래퍼./사진=고운호 기자

-무슨 뜻인가요?


"아토피는 끝이 없어요. 오늘 괜찮아도 내일 다시 힘들어져요. 가려움이 극심하면 짜증도 무기력도 극에 달해요. 외모도 추해지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죠. 그 업다운의 주기도 불규칙해요. 5년간 안 오다가 순식간에 나빠지죠. ‘이러다 좋아지려나' 희망을 품는 게 어리석다는 걸 알게 돼요."


-희망없는 시간을 어떻게 견딥니까?


"오늘 하루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자,예요."


씨클은 제주도 고산 앞바다에서 자랐다. 돌담 옆으로 게가 지나가고 끼니와 끼니 사이는 바다에서 수영하며 보냈다. 할머니는 해녀였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자란 그에게 왜 아토피가 왔는지, 이유는 모른다. 고등학교 때는 제주 시내에서 자취를 했다. 아프다고 짜증 부릴 부모도 곁에 없어, 아침마다 피에 젖은 러닝셔츠를 갈아입으며 자기 고통은 자기가 책임지는 독립 인간이 됐다.


그러나 지옥문을 열고 나오면 다시 지옥문이 열렸다고 그는 표현했다.


"이마에서 귀까지 딱지가 앉고 진물이 났어요. 친구들이 ‘나병 환자 같다'는 둥 프랑켄슈타인이나 심지어 개처럼 생겼다고 놀려댔죠."


-마음의 상처가 컸겠습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상처가 됐지만, 그 일로 시비 붙고 싸우지는 않았어요. "


-그래도 사춘기는 자아가 성장하고 폭발하는 시기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원망이 생기지는 않던가요?


"글쎄요. 결과적으로 저는 오늘의 저에 대해 굉장히 만족해요.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견뎠을까' 싶죠. 가려움은 참으면 지나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한의원이나 병원에 찾아가 봐도 어른들은 스테로이드 연고 주며 비슷한 말을 해요. 관리나 잘하며 지내라고."


어쩌면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고통에 응답해줄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헐어가는 육체를 견디게 해준 건 힙합이었다. 힙합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커지면서 몸에 신경 쓰는 시간이 줄었다.


"힙합은 커다란 후드를 쓰고 분방하게 내지르잖아요. 나는 뒤떨어지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요. 힙합의 마이너 정신, 음악 같지 않은 음악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힙합처럼 살면서 자신만만한 언어를 갖고 싶어졌죠."


-힙합이 인격체로 다가왔나요?


"네. ‘큰바위얼굴'이라는 소설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 얼굴을 매일 쳐다보고 열망하고 그렇게 살려고 했더니, 늙어서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이 되어있더라고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진물이 흘러나와도 저는 힙합 가사 쓰는 게 너무 좋았어요."


씨클이라는 이름은 크림슨 클라이언트의 약자다. 노을을 좋아해서 주홍색이라는 뜻의 ‘크림슨(crimson)’에, 세련된 어감이 좋아 ‘클라이언트(client)'를 붙였다.


"노을 지는 제주 바닷가를 떠올리면, 힙합의 고장인 LA가 겹쳐 보이는 거예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힙합과 연결했어요. 랩이라는 언어가 즉흥적이고 장난같은 요소가 많아요. 어떤 얘기를 쏟아낼지 아무도 모르죠.


처음엔 아무말 대잔치처럼 시작해도, 미디와 믹스를 바꿔 가다 보면, 우연히 얻어걸리는 게 많아요. 예를 들어 천양혜 시인의 시 중에 ‘바다보아라'가 있어요. 한글 처음 배운 어머니가 ‘받아보아라'를 잘못 쓴 건데, 그 받침 빠진 ‘바다'가 바닥 모를 바다로까지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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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힙스터./사진=고운호 기자

그 계획되지 않은 절망과 아름다움이 힙합과 닮았다고 했다.


-멘탈이 강한 편인가요?


"아뇨. 유리 멘탈이에요. 긍정적이지도 않고 내면이 강하지도 않아요. 다만 매사에 좀 담담해지려고 해요. 제 질병이 힘을 내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생활 패턴 바꾸고 로션 잘 바른다고 나아지지 않거든요. 고통은 제게 물처럼 와서 물처럼 가요.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알게 돼요. 죽기 전까진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일상을 꾸준히 지키려는 노력만이 전부죠."


누군가 내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해주길 기대한다거나 내 상처에 내가 놀라 비명을 지르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내는 것,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최선의 방어선이라고 했다.


-당신에겐 고통을 통과한다는 게 어떤 느낌이죠?


"‘고통을 통과했다’는 수료증이나 통행증은 없고요, 늘 통과 중이라고 생각해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요. 제가 ‘겨우’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겨우’라는 부사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저의 노력과 참담함이..."


-성경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은 인물로 욥이 나옵니다. 욥은 자식도 죽고 가축도 죽고 마침내 피부에 부스럼이 나서 토기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처참했던지 그의 아내는 신을 저주하라며 악담을 퍼붓죠. 수많은 고통 중 피부의 고통이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피, 진물, 딱지가 반복되니까요. 보는 것도 힘들지만, 겪는 사람은 그 가려움을 다스릴 방법이 없어 더 힘들어요. 같은 환자끼리도 충고를 못 할 정도예요. 아토피 캠페인에 참여해보니, 객관적으로 저보다 증세가 심한 사람도 많았어요. 백내장, 망막박리는 기본 스펙이더라고요. 왜 걸리는지 이유는 몰라요. 면역질환이라고만 알려져 있죠. 태어나자마자 혹은 유년기에 발병하는 사람, 사춘기나 성인이 되어서 증세가 시작되는 사람도 있어요."


-징후는 어떻게 나타나나요?


"온종일 건조하고 각질이 일어나죠. 열은 여러 시그널 중의 하나예요. 열없이 가렵기만 하기도 하고요. 트리거가 너무 많아서 제 케이스만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아토피 환자는 직업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이 많아요. 아파서 일을 자주 쉬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이해를 못 해요. 상태가 악화하면 멘탈 강도도 뚝 떨어지는데, 친구들조차 그 어려움을 모르죠."


얼마 전, 고인이 된 희극인 박지선을 통해 피부 관련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회자했다.


"연예인이라서 더 심적 고충이 컸을 거예요. 심해지면 밖에 나오기도 힘드니까." 주변에서 ‘이래라저래라' 충고 말고, 그저 피부질환이 굉장히 힘든 병이라는 걸 알고만 있어도 좋겠다고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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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위의 영광./사진=고운호 기자

씨클은 아토피 흉터 곳곳에 문신을 했다. JAZZ, FUNK, I got nothing even fear, 노래와 우주에 관한 단어들이 달 표면처럼 거친 피부에 현란하게 내려앉았다. 흉터는 아름다움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사포 같은 피부를 무기로 지닌 키 작은 힙합 전사를, 나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등에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새겨넣을 거라고 그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피딱지가 일어났다는 그 등에 베토벤의 악보를 그려 넣겠다구요?


"네. 제가 영화 ‘불멸의 연인'을 좋아해요. 마지막 장면에서 베토벤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서 달리는 장면이 있어요. 베토벤은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때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죠. 그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중요한 날 아침엔 꼭 ‘환희의 송가'를 들어요. 오늘도 듣고 왔어요. 그 악보를 등에 타투로 새겨넣으려고요."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선명해지잖아요. 정확하게 표현되고, 소통되고, 공감되면, 통증은 놀랍도록 견딜만해 지죠. 음악이 당신의 진통제가 됐나요?


"음악은 저의 종교에요(웃음). 힙합은 가르쳐요. ‘너의 가장 못난 부분이 가장 유니크한 부분'이라고. 불행이 다가올 때는 노래가 오고 있는 거라고. 화성도 모르고 악보도 볼 줄 모르지만, 사운드로 비트 작업을 해요. 이 불행의 정체는 뭔지? 너는 누군지? 질문이 가사가 되어 나오죠."


‘바퀴벌레는 박멸될 뻔했었지. 응급실에 실려 갔어. 심하게 찢어진 망막. 그 어떤 검사에도 모조리 negative. 하지만 난 이겨냈어 내 penalty…’-씨클의 ‘100 for life’ 가사 중.


망막이 찢어졌을 때보다 더 눈앞이 깜깜해졌을 때는 목소리를 잃을 뻔했을 때였다. 성대에 낭종이 자라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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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랩은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위력적이다./사진=고운호 기자

-시련의 연속이군요.


"네. 그런데 얻은 것도 많아요. 앞이 안 보일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잖아요. 그때 머릿속으로 가사 쓰는 훈련을 정말 많이 했어요. ‘안 보이면 이렇게 해야지’ 절박함 속에서 신박한 표현이 나왔어요. 목소리도 그래요. 폴립 수술을 한 후에는 음악을 음학(音學)으로 다시 배웠어요. 랩은 입으로 하는 익스트림 스포츠거든요. 음을 정확하게 맞추고 복식 호흡을 하고 성대 자극을 피하는 훈련을 하면서 랩 스킬이 정말 좋아졌어요."


-고통과 협력했군요.


"맞아요. 저는 인생의 고난을 헤겔의 정반합으로 생각해요. 고난을 극복한다거나 싸워서 이긴다거나, 그런 생각은 애초에 안 해요. 고통은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있는 거니까. 나와 같이 힘을 합치는 대상으로 생각하면 편해요. 제 나름의 방법으로 잘 지내는 거죠."


그의 남다른 협동 정신은 질병을 넘어서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10년 동안 고깃집 알바, 외국에서 노동자 생활 등도 했습니다. 가난은 그리고 노동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요?


"제가 촌사람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미국 가서 힙합을 배우고 싶은데, 해외 나가려면 외교관이 되어야 하는 줄 알고 한양대 정외과에 입학했어요. 알바도 처음엔 맥도날드를 알아봤거든요. 성공한 래퍼들이 맥도날드 출신이라서. 하하. 일단 급해서 곱창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10년을 일하게 된 거예요. 저는 곱창집 알바하면서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걸 다 배웠어요.


곱창집 사장님이 좋은 어른이었어요. 음악 하는 청년이라고 자존감 잃지 않게 대우해주셨고, 덕분에 20대 내내 끼니 걱정을 안 했어요. 제가 일을 진짜 못하거든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저는 10년 해서 겨우 고기나 굽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그 모습을 다 참아주셨어요.


그 덕에 저는 테이블 서빙하면서 손님 곁에서 관객 대하는 법을 익혔고, 환타 사이다 서비스 주면서 단골에게 티켓도 팔았어요. 제 인생에 존경하는 세 사람이 제 여동생, 어머니, 그리고 곱창집 사장님이에요. 그분들 다 먼저 부지런히 움직이고 먼저 배려하는 분들이었어요.


호주 가서 타일 보조, 청소 일할 때도 주인 형님의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일은 잘 못 해도 열심히는 했어요. 처음엔 다들 ‘이거밖에 못 하나?’했다가 지각 안 하고 딴청 안 부리니, 느려도 받아주셨어요. 그분들 보면서 결심한 게 있어요. 나도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 이웃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아티스트로 살자고. 슈퍼스타의 야망보다 나를 받아주고 고통에 공감해준 사람 곁에서 인정받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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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찬란하게. 씨클./사진=고운호 기자

그가 내뿜는 열기는 성공하고 싶다는 열기와 무관했다.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강렬하게 존재하고 싶다는 열망.


-나만의 음악을 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이어갈 수도 있지 않나요?


"모두가 꿈꾸는 베스트죠. 하지만 우선순위의 가치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이에요. 저는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한 거니까. 누가 ‘외로운 슈퍼스타가 될래, 가난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을래’ 물으면 저는 후자를 선택할 거예요."


돈을 벌기 위한 사운드는 따로 있다고 했다.


"그것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분야는 치열하게 밴드 음악 하면서 노력할 거예요. 다만 유명해지지 않아도 충분히 자족할 수 있다는 거죠. 많지는 않아도 제 아픔에 위로받는 분들도 분명 있거든요. 한번 계산해본 적이 있어요. 40대가 돼도 계속 음악을 하려면 한 달에 300만 원은 벌어야 하고, 공연 티켓을 2만 원으로 잡으면 150명의 팬은 있어야겠더라고요."


-지금은 팬이 몇 명이나 있나요?


"한 20명 정도. 하하하. 괜찮아요.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그분들은 저와 친구가 됐고 앞으로도 저와 함께 늙어 갈 거니까요."


가수 오혁은 그에게 ‘형은 바퀴벌레 같아. 절대 박멸되지 않을 것 같아’라고 했다. 나는 그토록 강인한 생명체로 인식되는 기분이 어떤지를 물어보았다. "가끔은 자랑스러워요. 어떤 시련에도 멸종되지 않는 저 자신이(웃음)."


-당신이 느끼는 그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이지요?


"나만의 특별함이죠.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아토피가 있다는 것.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게 된 것들. 음악 하는 사람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저는 바람 불 때 저만의 바이브가 나와요. 서울에서도 바람이 불면 바다 냄새가 나요. 그리고 아토피를 인정하면서 그 고통의 경험이 가사가 됐어요. 이제 경험으로 알아요. 고통 그 자체가 나라는 걸."


-아토피에 인격이 있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야! 이 징글징글한 친구야!"


지금도 퇴치가 불가능한 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특히 중증 아토피 청소년 환자 중의 26%가 불안장애를 23.5%가 자살 충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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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도 비관도 없이 현실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일 때 삶을 돌파할 용기가 생긴다./사진=고운호 기자

-마지막으로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토피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청소년들을 만나요. 그 친구들이 작은 용기를 많이 냈으면 좋겠어요. 고통이 나를 해치지 않도록, 지치지 않고 나를 분출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한참 생각하다)저는 제가 음악 하는 사람이 될 줄 몰랐어요. 그런데 흉내라도 내면서 음악인처럼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모습이 되어 있더라고요.


지금도 가진 게 많지 않아 20kg 캐리어 하나에 제 소유물이 다 들어가요.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죠. 가장 큰 욕망이라고 해야 ‘맥북 에어 하나 갖고 싶다’ 정도예요. 새로운 걸 사면 새로운 멋이 생겨나길 기대하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렇게 작은 것에 만족하는 제가 싫지 않아요. "


우리가 ‘고통을 타자화’하고 고통을 구경하려고 할수록 우리는 비참해지고 두려워지고 무기력해진다. 언제든 내 삶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픈 당사자가 시선의 거리를 확보하고 치열하게 환부를 기록할 때 그 삶에는 존엄이 깃든다. 타인의 시선에 굴절되지 않은 자기 주도적 언어로, 그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구원하는 자기 인생의 작가가 된다.


그렇게 각자가 겪는 구체적 고통이 자기만의 리듬과 서사로 랩이 되고 노래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남의 불행을 제물 삼아 나의 현재에 감사하는 이 고통의 제로섬 게임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불투명 인생이 아니라, 정확한 거리에서 보는 정확한 슬픔, 정확한 기쁨으로 저마다의 삶이 찬미될 지도 모른다. 부디 제 각자 고통의 약력으로 찬란하게 투명해지기를!


인터뷰가 끝나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청년의 등 뒤에서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졌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kimjis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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