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영화 그 속을 심은하와 함께 걷다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90년대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보진 못했지만, 내가 고른 작품에는 배우 심은하가 있었고, 그녀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뇌리에 박혔다. 95년생인 나는 ‘은퇴 선언’을 통해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가 연예계를 은퇴한다는 소식이 매일 TV 뉴스에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으니, 내가 유일하게 친했던 것은 덩치 큰 고물 텔레비전이었는데 하루 종일 그녀가 나오니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 길래 그래? 하면서 속으론 짜증을 좀 냈다. 또, 응답하라 시리즈를 몇 년 동안 정말 좋아했던 나였는데, 막상 그곳에 잠깐 등장하는 영화들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이유 없이 옛날 영화들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너무 깨끗하고 사실적인 화면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8월의 크리스마스 : 한석규, 심은하 주연
처음은, 정말 유명한 8월의 크리스마스로 시작했다. 처음에 나오는 빨간 고물 오토바이가 어쩐지 조금은 웃겼다. 그리고 뭔가 금방이라도 지-지-직하면서 끊길 것 같은 영상미도 신기했다. 서로 좋아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도 답답했다. 그리고 어쩌면, 주인공이 시한부인 영화를 이미 너무 많이 본 나에게 조금은 식상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잔잔함이 좋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단지, 선풍기를 밀어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죽음 앞에서 잔잔하고 담담해질 수 있는 것. 과도한 카메라 움직임 없이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리고 드문드문 나오는 그때의 배경, 어릴 적 나에겐 기억에 없을 그런 것들이 좋았다.
한석규라고 하면 드라마 낭만 닥터, 맥심커피 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 더 젊은 ‘정원’이 떠오른다. 또 심은하 배우의 연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정말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옮겨 놓은 ‘사람’같았다. 좋을 땐 적극적이고 당돌하게, 슬픔엔 사진관에 돌멩이를 던질 만큼 대담한 그녀를 보면서 왜 그녀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원 뒤에서 종알종알 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작은 우산을 함께 쓸 때 미묘한 얼굴의 움직임들이, 어떻게 찍어도 밝고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그가 말 걸어주기를 햄버거를 먹으며 기다리는 모습이. 감히, 내가 짐작해보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정원에게 사랑을 안고 떠나가게 해 줄 수 있었던 그녀의 모든 모습이 아름다웠다.
미술관 옆 동물원 : 이성재, 심은하 주연
두 번째 영화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전 여자 친구 집을 착각하고 집에 들어온 철수(이성재)와 그 집에 살고 있었던 춘희(심은하).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다. 인공(안성기)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한 춘희. 그리고 자신이 군대에 있을 동안,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다혜(송선미)룰 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철수. 그런 춘희와 철수가 한 공간에 살아가면서, 서로의 감정을 위로해주고 조언해준다. 이 영화 역시, 과하지 않게 감정을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음식이 되면, 원숭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좋아하는 춘희 그 자체를 좋아하는 철수가 제일 인상 깊었는데, 마지막에서 그들의 사랑이 확인되는 것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사랑의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90년대를 존중했다.
함께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서로가 원하는 사랑을 그리는 둘. 그리고 그들이 그린 사람이 서로였다는 사실. 그런 굵은 느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난 심은하의 연기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부스스한 머리를 해도 예쁘고, 대충 묶어도 예쁘고, 하얀 얼굴에 화장하나 안 해도 있는 그대로 예쁘고. 툭툭 뱉는 말투도, 90년대 느낌의 대사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것도. 빨간색 옷도 어울린다는 철수의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 가는 길에 거울을 한 번 더 보는 모습. 또 그런 모습들을 과하지 않게 표현한 연출. 정말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던 영화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버린 모습들이 과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들 듯이 표현된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 혹은 태어나자마자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을 보는 게 흥미로웠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랑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했구나, 공감했구나. 그래서 이 영화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한자리로 자치하고 있는 것이구나. 물론 지금 내가 그들의 청춘을 이해할 순 없겠지만, 그 기록들과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선했고 새로웠다. 90년대 영화들이 재개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나의 90년대 영화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배우 심은하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나한테는 정말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잔잔한 영화를 못 참는 내가,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게 했던 인물. 90년대와 나를 흥미롭게 엮어준 사람은 그녀, 심은하였다.
김아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