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의 성난 사람들, 토론에서 스릴러를 이끌다
나와 다른 의견의 사람들에게 나의 논지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게 한 두 명이 아니라 11명의 사람들이라면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더군다나 이미 나온 증거들이 나의 주장에 반하는 것들이어서 상황이 명백해 보인다면? 설득을 시도하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일 듯하다.
하지만 그 사안이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책임이 막중한 일이고, 결국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설득해 낸다고 한다면 그 과정이 얼마나 숨 막히고 치열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사람들이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토론의 전 과정을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치열한 공방
영화는 한 소년이 아버지를 집에서 칼로 살해했다는 혐의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2명의 증인과 전무한 알리바이, 그리고 소년이 산 것이 확실한 듯한 특이한 모양의 범행 도구까지 있어서 누가 봐도 소년이 범죄를 저지른 것 같은 상황이다. 이제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유죄 판단을 내리는 것만이 남았다. 잡담이 난무하고 정신없는 배심원 방 안에서 배심원장이 바로 투표를 진행한다.
유죄라고 생각하시는 분? 11명이네요...그럼 무죄라고 생각하시는 분?
단 한 명. 배심원 8이 손을 들었다.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으면 결론을 낼 수 없는 규칙에 의거하여 배심원 8과 나머지 11명의 배심원들의 설득 공방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95분 동안 거의 배심원 방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진행이 된다. 듣기에는 다소 지루해 보인다. 실제로 첫 5분을 봤을 때는 흑백 영화라는 어색함과 중년 및 노년의 아저씨들로만 이루어진 캐스트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액션 하나 없고 오직 설득으로만 러닝타임을 다 쓰는데도 불구하고, 배심원 8이 손을 든 순간부터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 마냥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먼저, 쓸데없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서로 증거와 증명을 주고받는 토론 시간은 영화의 제목처럼 냉정과 분노 사이를 오가며 관객의 긴장과 집중을 이끌어낸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옆 사람과 하는 잡담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나름의 복선이자 유무죄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개개인의 성격을 잘 나타내기 때문에 저 배심원은 어떻게 설득을 하고 또 어떻게 설득을 당할 것인가를 관객이 추론하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클로즈업 신이 내가 진짜 그 자리에서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그만큼의 긴장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기존 영화보다 다른 요소에 집중했다는 것인데 그중 하나가 카메라의 위치다. 배심원들이 주장을 하는 장면에서 간혹 카메라와 배우가 정면으로 마주 보도록 찍은 경우가 있었다. 이는 마치 관객이 직접 그 사람과 대면하는 듯해서 상당한 몰입감을 주었다.
무심한 사람들
배심원 토론에 참여하는 인물은 모두 12명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배심원 8을 제외한 대부분의 배심원들은 배심원의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후에 있을 야구 경기를 볼 생각에 그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손을 든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초반에 법정에서 배심원 방으로 이동한 직후 사람들은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한 사람의 목숨이 그들의 손에 달려있더라도 말이다.
미국은 법정에서 일반인 배심원들의 결정이 유무죄 판단에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한다. 이러한 배심원들은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 모두가 대상이 되는데 판단의 객관성을 위해 일반 시민 중 무작위로 뽑으니 피고나 원고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뽑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도 없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가장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는 조건인 것이다. 이는 미국 배심제의 맹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고 영화는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합리적 의심
극 중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배심원 8이 지금까지의 증언과 증거들을 모두 뒤집으려면 정말로 완벽한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명의 증인들의 증언을 확실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으로 바꾼다거나 특이하게 생긴 범행 도구인 칼이 사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등, 배심원 8은 서서히 모두를 자기 편으로 만든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소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가 아니다. 정확히는 '소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심원들이 소년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 물었을 때 '아마도요.'라고 일관한다. 초반에는 그의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확신을 못하면서 그는 왜 계속 'Not Guilty'를 외치는가? 그러나 '무죄가 아니면 곧 유죄'라는 흑백논리에 갇혀서는 안된다. 이는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다.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면 '유죄가 아닐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피고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간만에 재밌게 본 영화였다.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내용이 매우 알찼다. 옛날 흑백 영화라고 거부감 가지지 말고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숨막히는 토론에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송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