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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음악낙원, 런던2

지난 6월 23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행해졌다. 결과는 브렉시트(Brexit)! 즉, 브리튼(Britain)이 유럽연합으로부터 탈퇴(Exit)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유럽대륙으로부터 별개의 섬나라로 존립하던 그레이트 브리튼이 고립을 탈피하고자 유럽연합의 모태인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한 것이 1973년 1월 1일이었다. 이전인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은 이미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신청을 냈지만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로 무산된 바 있었다. 드골이 퇴임한 후에야 유럽경제공동체 승선에 성공한 영국은 이후 43년 간이나 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일원으로 존속해 왔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 못한 이번 브렉시트 결정으로 영국은 유럽대륙으로부터 소외된 전혀 별개의 나라로 원위치하게 되었다. 영국은 더 이상 유럽대륙의 일원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 제도로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번 결정은 그 동안 음악 없는 나라로 격하되어온 영국을 세계 최고의 클래식메카로 격상시켜주었던 런던의 위상을 동반추락시킬 것으로도 예측된다. 내년 9월에 사이먼 래틀이 런던 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다 해도 런던음악계가 이전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공교롭게도 나는 이런 희대의 브렉시트 결정이 나기 한 달 전에 런던음악계를 둘러보았던 것이다.

초대면한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7년 만에 해후한 살로넨과 그의 오케스트라

해가 지지 않는 음악낙원, 런던2

로열 페스티벌홀 외관 / © Morley von Sternberg

지난 5월 15일 일요일 저녁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탄호이저’를 관람하고 나온 나는 지체하지 않고 로열 페스티벌홀로 향했다. 그 날 저녁 에사-페카 살로넨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그 곳에서 스트라빈스키 페스티벌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로넨과는 2009년 10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베르크 ‘보체크’ 이후 7년 만의 해후였다. 스트라빈스키의 ‘아곤’과 ‘봄의 제전’을 직설적으로 끌고 가는 살로넨을 직시하면서 나는 그를 이 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카라얀 이후 살로넨만큼 방대한 관현악/오페라 레퍼토리들을 완전무결한 퀄리티로 일구어내는 지휘자는 전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살로넨은 자신의 음악활동 비중을 지휘와 작곡에 고루 할애하고 있는 엔터테이너다. 그처럼 그가 지휘에만 올인하지 않는 점이 그를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로 부각시키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해가 지지 않는 음악낙원, 런던2
해가 지지 않는 음악낙원, 런던2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에사-페카 살로넨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 Camilla Greenwell

처음 입회해본 로열 페스티벌홀의 음향은 명불허전이었다. 층구분이라기보다는 높이구분으로 객석을 분할해간 건축구도는 인상적이었다. 마치 프랑스 로렌 지방의 메스가 품고 있는 연주회장, 아르스날을 연상시키는, 끝간데 모르게 올라간 객석풍경이었다. 무려 2900석의 로열 페스티벌홀은 900석의 퀸 엘리자베스홀과 헤이워드 미술관과 함께 사우스뱅크 센터를 구성하는 주축 연주회장이다. 일찍이 최정호는 1968년 3월 이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유럽체류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별연주회로 오토 클렘페러(1885-1973)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9번을 감동적으로 관람했노라고 적고 있다.(그의 명저 ‘세계의 무대’ 마지막 글)

 

그만큼 로열 페스티벌홀의 역사는 긴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건립에 들어가 1951년 5월 3일에 개관한 이후 동연주회장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로 기능해 왔다. 65년의 역사에도 이 콘서트홀의 음향은 명불허전이다. 개인적으로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이끌고 생전 마지막으로 런던을 방문했던 1988년 10월 5일에 이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역사적인 명연주를 담은 음반을 사랑한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한 이 날의 실황은 두 곡 최고의 명반으로 뇌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궁금한 분들은 TESTAMENT SBT.1431의 일련번호로 출시된 음반을 구입해서 듣길 권한다.

 

또 하나 사우스뱅크 센터 지근거리에 있는 워털루 브리지와 관련해서 나는 머빈 르로이의 동명의 영화(1940)를 잊을 수 없다. 1960년대 후반에 모두 50대의 나이로 요절한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그들의 20대에 연인으로 분해 워털루 브리지에서 작별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연주회가 끝나고 워털루 브리지를 거닐며 나는 ‘애수’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동명의 영화 ‘워털루 브리지’를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위그모어홀의 작지만 중후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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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모어홀 정면 / © Ben Ealovega

그리고 이튿날 오후 1시 나는 그 유명한 실내악 전용홀인 위그모어홀을 방문했다. 독일의 베치슈타인 피아노회사가 건축을 주도했다고 해서 애초에는 베치슈타인홀로 명명됐던 위그모어홀은 사보이 호텔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에드워드 콜컷이 설계를 전담해 1899년부터 1901년 사이 건립됐다. 연평균 400회 남짓한 실내악/성악/고음악 리사이틀을 기획하는 위그모어홀만의 독자적인 위상은 이들이 자체적으로 발매하는 음반 ‘Wigmore Hall Live’를 통해 엿볼 수 있다. 7년 전인 2009년 8월 처음 위그모어홀을 방문했을 당시 나는 연주회가 없었던 관계로 로비의 음반부스에서 명피아니스트 슈라 체르카스키(1909-1995) 타계 2년 전의 ‘Wigmore Hall Live’ 음반만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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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모어홀 무대와 객석 / © Ben Ealovega

그러나 이번만은 위그모어홀에서 연주회를 관람하고야 말았다. 21세기 최고의 비르투오소 콰르텟으로 각광받는 예루살렘 현악 4중주단의 무대를 마주한 것이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현악 4중주 2번과 바르토크의 소름끼치는 현악 4중주 6번! 그대로 빨려들어간 명연주였다. 552석을 아늑하게 감싸고 도는 풍만한 음향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연주회장의 고풍스런 분위기에 더해 무대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기분이었다. 2004년에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 공사가 감행됐고, BBC 라디오3 전파를 타고 한주간의 연주회가 집중적으로 송출되는 점도 위그모어홀만의 저력이다.

트라팔가 광장과 면한 가장 영국적인 오페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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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콜리세움 전경 / © Grant Smith

그리고 런던에는 잊을 수 없는 오페라극장이 있다. 바로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 즉 영국 국립 오페라단의 본거지로 기능하고 있는 런던 콜리세움이다. 누가 나더러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주회장을 하나 꼽으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런던 콜리세움을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오페라의 가사를 영어로 번안해 부르는 이 가장 영국적인 오페라하우스와 지근거리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이 무엇보다 광대한 면모여서 마음에 들고, 런던 콜리세움의 내부가 다른 어떤 런던의 연주회장 이상으로 고풍스러워서 또한 마음에 든다. 나에게는 복고 내지 의고취향이 천성적으로 강하게 잠재되어 있다. 나는 빈티지 애호가임을 자처한다. 그런 나의 태생적 기호에 가장 부합하는 런던의 연주회장이 바로 런던 콜리세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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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콜리세움 무대 / © London Coliseum

그 곳에서 지난 5월 16일 저녁에 나는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보았다. 올해 73세의 숨은 영국의 거장 리처드 암스트롱경이 지휘하는 영국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및 앤써니 밍겔라의 연출이 의기투합한 명무대였다. 이탈리아어 원래 가사를 통째로 영역한 무대였음에도 이질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본의 분라쿠 양식을 빌어온 밍겔라의 연출문법과 마이클 레바인의 원색적인 무대미술은 작품에 고해상도의 화질과 선명도를 안겨주고 있었다. 또한 암스트롱경의 낙폭을 크게 가져가는 드라마틱한 악단운용이 두드러졌기에 총천연색 파노라마를 목도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무대관람으로 손색없는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초초상의 소프라노 레나 함스와 핑커톤의 테너 버트 필립 또한 찰떡궁합이었다. 2006년 1월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경험한 로버트 윌슨 연출, 후이 헤 타이틀롤, 마르코 베르티가 핑커톤으로 분한 오리지널 ‘나비부인’보다도 몇 배는 감동적인 명연이었다.

 

총 2558석 규모의 런던 콜리세움은 프랭크 머첨의 설계로 건립되어 1904년 개관했다. 흥행주 오스월드 스톨은 이 극장을 세계 최고/최대의 뮤직홀로 키울 야심을 품었다. 그의 복안대로 런던 콜리세움은 개관 이후 60여 년을 뮤지컬과 버라이어티쇼, 연극물 등을 공연하는 상업성 짙은 다목적 극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968년 새들러스 웰스 오페라 컴퍼니가 입주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74년 지금의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로 개명한 새들러스 웰스 오페라 컴퍼니의 입주 이후 잉글리쉬 내셔널 발레까지 상주단체로 영입되면서 런던 콜리세움의 위상은 넘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즉, 기존의 포퓰리즘에 영합한 상업극장에서 오페라와 발레라는 순수고전음악예술의 메카로 신분상승을 이룬 것이다. 이런 런던 콜리세움의 시도를 국내의 여러 극장들도 벤치마킹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국격도 자연스럽게 동반상승할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음악낙원, 런던2

런던 콜리세움 객석 / © London Coli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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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콜리세움 객석 / © Karla Gowlett

7년 만에 찾은 런던에서 내가 섭렵한 극장들은 대략 이 정도다. 브렉시트의 여파로 지금 영국은 갖은 몸살에 시달리고 있다. 그 불똥이 엉뚱하게도 외국인들에게 튀고 있다는 유쾌하지 못한 토픽도 전해지고 있다. 브렉시트가 낳은 런던음악계의 항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전까지 누렸던 찬란한 영화를 런던음악계는 유지/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나는 왠지 런던음악계가 서서히 추락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런 난세에 내년 가을 래틀이 런던음악계에 등장할 것이다. 그는 과연 위기에 처한 런던음악계의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런던음악계는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의 한가운데에 있다.

 

글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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