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만 웃을 수 있는 ‘신과 함께’
누군가 뺨 한 대라도 때려줘야지
이른 아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시계를 본다. ‘6시 10분.’ 10분이나 일찍 일어났다. 짜증이 난다. 오늘 하루는 왠지 계속 피곤할 것 같고,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고, 오늘 일찍 잠들지 않으면 내일까지도 피곤이 이어질 것 같다. 단지 10분 일찍 일어났을 뿐인데.
거실의 불빛 때문인지 마음이 짜증으로 범벅된 까닭인지 찡그린 얼굴로 방문을 나선다. 나를 깨운 ‘달그락’ 소리의 결과물은 따뜻한 김을 내면서 놓여있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 나는데 먹기 힘들게 국은 왜 이렇게 뜨거운지, 달걀에 노른자에 소금은 왜 이렇게 많이 들어갔는지, 밥은 또 왜 이렇게 질척한지. 숟가락은 몇 번 오가지도 못하고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나뒹군다. 싸움의 시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일인데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뱉었다. 서로가 잘못 했다는 이야기만 하다 정작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침묵으로 묻어버렸다. 엄마와의 싸움은 늘 이런 식이다. 누군가 뺨 한 대라도 때려줬으면.
영화 신과 함께
사람이 죽고 49일 동안 망자는 저승에서 7번의 심판을 받는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그리고 천륜. 각각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받은 망자는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얻는다. 한편 망자는 이 모든 재판을 함께할 차사와 동행한다. 차사는 천 년 동안 49명의 망자를 환생시키는 조건으로 환생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이러한 커다란 저승의 법도 아래, ‘귀인’이라 불리는 ‘김자홍’이 죽는다. 귀인은 살아서 지은 죄가 적은 착한 사람으로, 그렇기에 환생할 확률이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차사의 입장에서 귀인은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겠지. 19년 만에 귀인을 맞이한, 그것도 귀인 중의 귀인이라고 불리는 김자홍의 변호를 맡은 차사 강림, 해원맥, 덕춘은 그의 저승길을 기쁜 마음으로(?) 안내한다.
평탄할 것만 같았던 김자홍의 재판 진행은 예상치 못한 고난과 맞닥뜨리게 되고, 영화는 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김자홍과 차사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눈물과 함께
극장은 그야말로 ‘눈물과 함께’였다. 나는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울었고 내 옆자리의 무뚝뚝해 보이는 청년은 영화를 보는 내내 코를 풀어댔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극장 안의 사람들이 훌쩍이는 소리에 영화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가 아닌 ‘눈물과 함께’하는 영화였다.
일각에선 이 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눈물로 허접한 스토리를 감췄다던가, 눈물로 얻은 흥행이라는 식의 비아냥이다. 그럴만한 것이, 감독은 ‘가족’이라는 눈물샘의 열쇠를 정말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김자홍의 재판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의 가족사는 ‘엄마’라는 가슴 뭉클한 단어로 이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바스러지게 만들었다. 거기에 전형적인 스토리 전개가 가지는 힘이 결합하여 그 효과는 배가 됐다. 감독이 가진 ‘눈물’이라는 열쇠가 ‘마스터 키’가 되는 순간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마스터키를 ‘신파극’이라는 말로 낮추어 부른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전형적이고 안전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나는 신과 함께라는 영화와 그 영화가 가지는 무기인 눈물이 단순히 ‘신파’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것에 반대한다. 영화가 만들어낸 슬픔이 무언가를 감추거나 무마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판타지’라는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다.
영화 ‘신과 함께’는 판타지 영화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표현된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무언가다. 우리는 상상의 모습을 기대하고 또 그것의 재현 방식에 놀란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동양의 종교적 사상과 상상으로 쌓은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끔 도가 지나치는 CG(예를 들면 폭풍이 치는 장면)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옥은 정말 괴로울 것 같다’라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것의 연장선으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보편적인 주제를 재판이라는 소재와 결부시켜 멋지게 전달한다. 여기서 눈물은 착한 일과 나쁜 일에 낙차를 두어 좀 더 극적으로 주제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매우 영민한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과 함께는 익숙하지 않은 ‘한국형 판타지’를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소재와 결합하여 녹여낸 좋은 사례다. 결과는 흥행! 힘을 빼고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이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떠나서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스토리 덕분에 영화관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다는 것은 어쩐지 후련하고 또 편안하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대신 해주는 느낌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성적인 생각보다 감정이 중요한 순간이 필요하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눈이 붓기는 했지만. 어쨌든 ‘신과 함께’는 더 늦기 전에 부모님께 잘 하라고 뺨 한 대 때려준 영화다. 나는 그 점에 감사한다.
사진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
공정필 에디터 gongpil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