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자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이전에는 ‘따뜻한 예민함’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는 타고 나게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태어나 사는 동안 보통 사람들이 별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일들에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둔하고 무딘 감각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편한 낙관적인 성향이라 에둘러 포장되었을 때, 예민함을 지닌 이들은 어두운 뒤편에서 보통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과 세상 속의 작은 틈을 발견하곤 했다.
이를테면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유심히 지켜본 그들은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얼추 짐작해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끼어야 할 영역과 끼지 말아야 할 영역을 정확히 판단하며 때때로 모르는 척, 순진한 척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배려한다. 뒤에서는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말이다.
몇몇은 그 고뇌를 글, 음악, 혹은 그림과 같은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남은 예술 작품은 공감이라는 보편적인 감정 아래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탓에 그리고 간혹 쓸데없을 만큼 생각이 많은 탓에 그들은 낙천적인 사람보다 훨씬 외롭고 피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불편하리만큼 예민하지만 따뜻한 감각은 타인의 감정과 행동 방식을 이해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야.’라는 간편해 보이지만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남든, 누군가에게 진정한 울림을 전하고 적어도 한 명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된다는 건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다. 비록 나에게는 그런 천성적 촉수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세상 것들에 무뎌지지 않겠다는 강박과 예민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부단히 느끼고 생각하려는 노력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면이 강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예민함은 자신에게 독을 들이붓는 일과 같았다. 자신의 예민함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동반하는 잦은 감정 기복과 고독함, 외로움 그리고 슬픔 따위를 견디지 못해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연약함과 예민함보단
강한 게 최고의 자질 같아.
솔직히 행복감보다도 나은 것 같아.
다른 감정들을 버텨낼 힘과
단단함이 있다는 거잖아.
영화 「우리의 20세기」 中
그래서 어쩌면 예민함보다는 강함을 우선으로 길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도 나약함이 있다. 여태 크게 아파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부터 잊을만하면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잔병으로 몸과 마음이 쉽게 무기력해진다. 지금까지도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중이염과 비염 같은 만성 질환에 꽤 자주 불편을 겪는다.
1년에 적어도 한두 번은 꼭 코를 온종일 훌쩍거리는 심한 알레르기성 비염에 시달렸는데, 애써 콧물을 풀어내면 항상 귀까지 말썽이어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골골대는 상태에 도달하면 적어도 일주일간은 사람들과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쉽게 짜증과 싫증을 내버리고 만다. 겨우 비염과 중이염에 정신이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으면서도 내가 이만큼이나 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요즘, 예민한 감성과 그를 지킬 수 있는 단단함을 같이 기르고자 조금씩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방안에 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운동’이 주는 어감은 어딘가 부담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저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산책은 쌓인 흙과 출처 모를 너부러진 돌멩이들, 시시각각 변하는 풀이 기운 방향, 그리고 하늘의 변화를 체감하는 일이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위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산책은 몸과 마음을 두텁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시시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에 큰 황홀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다만 집을 나서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 옆 건물 강아지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힘을 얻고, 매일 걷는 아스팔트길 틈에 핀 민들레를 유심히 보며 작은 연민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일상을 눈여겨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하나씩 확보하는 것은 삶을 좀 더 단단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사람과 세상을 눈여겨보는 마음과 그 따뜻한 연민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함을 기르는 연습은 극도의 분노와 냉정한 무관심이 대립하며 중간은 찾기 힘든 버거운 일상 속 긴급 처방약이 되어줄 것이다.
박민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