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여백이 없어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맥시멀리스트, 나같은 사람 또 없나요
나 다시 도전할래
요즘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를 보고 있다. 자칭 타칭 ‘버리기 변태’ 마이의 미니멀 라이프를 보여주는 동시에 도움이 되는 팁을 제시한다. 이 팁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사 가기 전 미리 정리를 시작할 동기라도 얻어 가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청을 시작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물건 없이 텅 비어, 마루가 훤히 드러난 주인공의 집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깔끔하고 매끈하게 잘 청소된 바닥에 대자로 누워, 한껏 평온함을 누리는 주인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다시금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미니멀 라이프, 비우는 삶, 작고 소박한 삶. 단어를 듣고 상상만 해도 몸이 가벼워진다. 드라마를 보고 친구에게 선언했다. 나 진짜 미니멀리즘 할 거고, 나 진짜 이번에야말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친구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는 다짐을 수차례 들어왔고,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물건을 ‘깔별’로 사들이는 모습도 수차례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엔 여백이 없어
나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열망은 꽤 오래 이어져왔다. 약 4년쯤. 그동안 다짐한 횟수만큼 실패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렇다. 책 '심플하게 산다'로 처음 미니멀리즘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는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고요하고 적막하며 동시에 잔잔하고 은은하고 가볍고 산뜻하고…… 그런 느낌들을 한껏 떠올릴 수 있었다.
슬프게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 집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책은 책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을 양 끝으로 하는 수직선이 있다면 나는, 그리고 나의 현실은 미니멀리즘과는 분명 동떨어져있는 게 틀림없다. 미니멀과 맥시멀의 딱 중간도, 중간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말하자면 맥시멀리즘의 극단에 위치한 사람일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열망하는 맥시멀리스트, 바로 나다.
10평도 안 되는 내 자취방엔 뭐가 너무 많다. 정리를 위해 버릴 엄두는 못 내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서, 혹은 서랍 안에 꾸역꾸역 넣어서 정리했다. 엄밀히 말해서 정리라기보다는 그냥 눈앞에서 잠깐 치웠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듯하다. 그때의 물건들 중 대다수는 아직 묵혀진 상태다. 가짓수는 점점 늘어났다.
집 밖으로 나가도 늘 물건이 무겁고 버겁다. 오죽하면 별명이 보부상 혹은 도라에몽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조리 수납하기 위해서 외출 시 가방은 커다란 쇼퍼백 아니면 튼튼한 백팩이어야 한다. 작은 미니 백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소재도 무조건 튼튼한 소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방끈이 끊어질지도 모르니까!
아바타 스티커, 노트, 펜, 샤프펜슬, 필통, 가방, 색조 화장품, 옷, 신발, 피어싱, 책……. 지금까지 나의 삶을, 나의 소비 생활을 돌이켜보면 물건을 사 모으지 않았던 적은 미취학 아동 시절 이외에는 없었다. 이 정도면 나는 거의 강박적으로 소비하는 삶을 살아온 게 아닐까?
물건의 개수와 나의 행복은 정비례할까
중요한 것은 물건의 개수와 나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결론적으로 지금의 나는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진 않다. 확실히 내 집에 들어서면 왠지 피곤하다.
초반에는 집에 다양한 물건이 구비되어 있어 내 선택도 다양해졌다. 골라 입고, 골라 쓰는 재미가 쏠쏠했다. 언제부턴가 그런 재미가 시들시들해졌다. 임계점을 넘고 나니, 물건의 개수가 증가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택배를 받거나 새 물건을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즐겁지만, 그것이 나의 지속적인 행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앞선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리 집에는 ‘정말 필요한 물건들’보다도 ‘쓸 데 없는 물건들’이 많은 것이다. 나에게 꼭 필요해서 구매한 것이기보다 충동적으로 혹은 언젠가 필요할까 싶어 구매한 것이 대다수다. 심지어 그것들이 몇 년 내내 차곡차곡 쌓여 왔다.
왜 하필 미니멀한 삶을 살고 싶은 걸까
자꾸 실패하는데도 시도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황당해하고, 어이없어 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야 맥시멀 라이프를 살면 안 되냐고 되묻는다.
나도 편하게 포기하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이 난다. ‘단 한 번만’을 원한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성공해보고 싶다. 직접 끝까지 치닫고 까무러쳐 봐야 알 것 같다.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봤을 때에는 소비 생활과 관련된다. 건전한 소비 습관을 들이고 싶다. 나의 맥시멀 라이프는 잘못된 소비 습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즘에서 소비란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한 것을 알맞게 구매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에 관한 콘텐츠를 보다 보면 확실히 물건에 대한 소비를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인 소비 습관을 들이고, 그 습관을 바탕으로 살아보고 싶다.
소비를 부추기는 환경도 문제지만, 그런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주변만이라도 바꿔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덕질을 위한 수집, 충동구매, 미리 쟁여두기, 예쁜 쓰레기 모으기, 소비 합리화 등등. 모른 체하며 찔끔찔끔 모아온 것들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미니멀리즘을 위해 소비습관을 고친다고 해서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을 위해 소비 습관을 다지는 과정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해봐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의 건강한 삶과, 건전한 소비와,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서라도.
나는 왜 비우지 못할까
나의 경우, ‘버리기’가 어려워서 비우지 못한다.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를 보면서 다시 확신했다. 버리기, 처분하기가 맥시멀 라이프에서 미니멀 라이프로 향하는 가장 첫 관문이다. (나는 첫 관문부터가 어려워서 문제지만.)
맥시멀리스트의 집 안에 여백이 없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여백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맥시멀리스트에게는 물건을 버리는 일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 집 안을 비워야 한다.
새 물건이 들어오면 헌 물건은 버리거나 처분을 해야 하는데, 나는 버리는 것이 어렵다. 한정된 공간 안에는 더 이상의 틈새도 보이지 않는다. 물건에 잔뜩 끼어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하게 살면서도 나는 왜 버리지 못할까? 나는 왜 버리기가 어려운가?
당장 떠오르는 이유가 있다. 첫째, 물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 수많은 물건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나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이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물건에 이유와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나는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산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한다.
이 경우 최근 1년간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이라면 무조건 처분한다. 1년 동안 사용하지 않아도 나는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물건은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깔끔하게 버린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을 받은 물건은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버리기가 어렵다. 물건과 관련한 의미와 추억이 몽글몽글 떠올라도 이번만큼은 독해져야 한다. 버리는 순간만큼은 지독한 원칙주의자라고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선물 받았지만 1년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의 경우, 그 선물을 받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보며 나름의 의식을 진행하려고 한다. 선물 받았던 순간의 행복감과, 그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을 만끽하는 것으로 선물은 제 몫을 다했다.
물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준 사람의 마음과 그 순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진으로는 남겨둬야겠다. 감사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사진이 실마리 역할을 해줄 것이다.
수많은 물건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비우려면 버려야 하고, 버리려면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할 엄두가 안 난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소극적 완벽주의자의 핑계라고 본다. 산더미 같은 물건 앞에 겁먹지 않을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매일 세 가지 물건을 꼬박꼬박 처분하기로 한다. 물건을 선택하는 기준은 종류 불문 그날 혹은 전날 눈에 띄는 것들.
비슷한 맥락에서 새로운 물건 하나를 사게 되면 무조건 하나를 버린다. 사들인 물건 수만큼 버린다. 최대한 물건의 양을 더 늘리지 않고, 총량을 보존하는 것이다.
여백을 경험과 추억으로 채워갈 수 있도록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여행용 캐리어를 사용하곤 했다. 그것도 모자라 백팩도 함께 메고 가곤 했다. 장시간을 머무르는 것도 아닌데, 옷이며 세안 도구며 책이며 잡동사니며 바리바리 싸 들고 말이다. 묵직하게 고향에 내려갔다. 그것들을 다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미련하게도 모두 다 챙겨서 다녔다. 귀향이 고역이었다.
최근 그 캐리어를 처분했다. 이제는 백팩에 최대한 간단하게 물건을 넣어 고향에 다녀온다. 예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가볍다. 백팩을 메니 양손이 자유롭다. 본가에 와서도 신경 써야 할 물건들이 많이 없으니 머릿속이 한결 편안하다. 가족들과의 시간을 오롯하게 만끽할 수 있어 좋다.
백팩만 메고 고향을 방문하다니, 나로서는 장족의 발전이다. 미래에는 국내든 국외든 어디든지 이 가방 안에 내가 가진 소지품 전부를 넣고도 가볍게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유로워 질 것이다. 물건에 굴복하지도 소비에 속박되지도 않고.
도움이 된 콘텐츠
- 책 : <심플하게 산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영상 :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
넷플릭스 <미니멀리즘 : 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EBS <하나뿐인 지구 - 물건 다이어트>
tvN <숲속의 작은 집>
심지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