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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내가 최승희를 알게 된 것은 이태리의 정원이란 노래를 듣고 나서부터다. 영화 「박열」을 본 사람이라면 이 노래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최승희의 「이태리의 정원」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져, 짠한 감정을 극대화 시켰다. 나는 엔딩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한동안 깊은 여운에 빠졌었다.

 

그렇게 한참 듣다 보니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러다 며칠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라는 전시를 보게 됐고 노래의 주인공이 근대 시기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던 무용수 ‘최승희’(1911~1969)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최승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현대 무용가이자 세계적으로 한국 무용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근·현대무용의 기틀을 다졌으며, 중국 무용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현재까지도 북한 무용은 최승희가 수식한 무용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석예빈을 비롯한 전통 무용수들이 최승희의 춤을 재연하며 맥을 잇고 있다.

 

사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최승희는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 무용수’라는 딱지가 붙었으며, 그 뒤로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9년부터 한국무용사에서 최승희의 위치가 재정립돼야 한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승희는 무용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기에 춤이 기생만 추는 것이라는 안 좋은 편견을 딛고 현대 무용수가 됐다. 또, 지금의 한류 버금갈 정도로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남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가 쌓은 업적과 무용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세계인을 상대로 한 대담함을 그냥 묻혀두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재조명되어 최근까지도 최승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최승희의 삶과 업적을 되짚어보려 한다.

무용 시작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최승희는 15~16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다. 오빠 최승일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 이시이 바꾸가 공연하는 곳에 그를 데리고 갔었다. 이시이 바꾸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안무로 표현한 서양무용을 했었는데, 이 모습에 반한 최승희는 무용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가 이시이 바꾸 무용 연구소에 들어갔다. 그러다 연구소에 들어온 지 3달 만에 무대에 섰는데, 뛰어난 무용 실력을 보여줘 조선 유학생들의 화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래 영상은 최승희의 유학 시절 무용 공연 자료를 보도한 뉴스다.

 

1927년에는 경성에서 처음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최승희는 「세레나데」라는 독무를 선보였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그를 예찬했으며, 최승희의 모교 숙명 여자 학교 학생들은 너무 기뻐, 손뼉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무용세계를 만들다.

이시이 바꾸에게 3년간 무용을 배운 최승희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안무를 창작하기 위해 독립했다. 그리고 경성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설립하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인식 부족과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다시 이시이 바꾸 무용 연구소에 들어갔다. 이시이 바꾸는 한국 고전 무용을 배워보길 권유했고 최승희는 자신만의 고전 무용을 창작하게 된다. 마침내 동경에서의 첫 무대에서 「에헤라 노아라」라는 전통 무용을 선보였고 이 무대를 통해 일본에서 무용수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이후 다양한 한국 춤을 섭렵했으며, 전통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를 결합해 한국 무용을 재창조했다. 대표적인 안무로는 「에헤라 노아라」, 「검무」, 「보살춤」, 「승무」, 「옥적의 곡」 등이 있다. 춤사위가 역동적이며, 주제에 따라 서정적이거나 해학적인 동작을 취해 우리나라의 정서와 문화를 잘 표현해냈다.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에헤라 노아라」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왼 「보살춤」 오 「검무」

이시이 바꾸에게서 독립한 최승희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에서 공연했으며,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피카소와 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 예술계 유명인들도 최승희 무대를 감상했다. 이후 남미와 중국에서 몇 차례 공연을 열었으며, 저마다 최승희의 무용 실력에 감탄했다.

 

이쯤 되면 최승희가 어떻게 세계인을 매혹시켰는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최승희의 우아함,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빠졌다. 뛰어난 신체조건도 한몫했다. 최승희는 키가 170cm였으며, 호리호리한 체형이 아닌 살집과 근육이 적당히 있는 건강한 체형이었다. 또한, 동양인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표현력이 좋았다. 최승희는 주제에 따른 핵심적인 동작을 따르되 나머지 춤은 즉흥적으로 췄다. 팔짓, 어깨 짓, 허리 놀림으로 무대를 꽉 차게 했다가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짓을 취하기도 하고 역동적인 동작을 취해 관객의 시선이 온전히 자기에게 머물 수 있게 했다.

 

또, 다양한 표정 연기를 구사했다. 특히 사람들은 최승희의 눈에 매료됐었다. 그의 눈빛은 굉장히 영롱했으며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최승희 춤은 육체적인 춤이 아니라 ‘눈의 춤’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최승희는 중국에 머물며, 중국 무용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독자적인 무용 체제를 정립하지 못했는데, 그가 동양 무용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중국 문화와 예술, 원시적 가무 극을 연구했고 중국을 소재로 한 새로운 안무를 창작했다. 이 때문에 중국 경극 배우들 사이에서 무용 연구 붐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중앙 희극 학원 최승희 무도 연구반과 동방 무도 연구소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최승희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지명도가 높았던 최승희는 영화나 신문, 잡지에 출현하는 것은 물론, 화장품, 약품, 학용품, 과자류의 광고모델로도 활약했다. 솟구치는 인기로 인해 그의 사진을 담은 우편엽서가 발행되기도 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불러, 음반을 냈었다. 1936년에 처음 음반을 냈는데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이태리의 정원이다. 이태리의 정원은 재즈송으로, 당시 재즈 송은 모던 걸, 모던 보이에게 인기가 많았다. 후에 향수의 무희라는 또 다른 재즈 송을 냈으며, 이 노래는 최승희가 직접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에 대한 평가

해방 전까지 중국에 있던 그는 해방 직후 경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친일 흔적으로 인해 남한에서 무용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북한에서는 예술가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남편 또한 북한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최승희도 여건상 북으로 가게 됐다. 북에서도 무용 활동은 계속됐다.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한국 춤의 기본동작을 글과 그림을 풀이한 『조선 민족 무용 기본』을 편찬했다. 북한은 최승희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도 체제 선전 활동에 그를 이용했다. 그러나 1967년 최승희는 숙청당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최승희 중년시절

오늘날 최승희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우리나라 전통 무용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을 세운 무용수로 추대받는가 하면 친일파인 동시에 월북무용수라 비난받는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결론을 어떤 식으로 내야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한민족임이 자랑스러울 정도이며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그에게 붙은 ‘친일’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걸렸다.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자리에 섰으며, 공연 수익금 일부를 일본에 헌납하는 등 친일 행위를 저질렀다. 현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있다.

 

최승희의 친일 행적은 비난받을 만하나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최승희의 삶을 살펴보며 느낀 점은 그가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무용에 임했다는 것이다. 최승희 삶의 최고 가치는 무용이었고 그는 언제나 그 가치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나라 없는 식민지인으로서 세계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을 통해야 했다. 명성만큼이나 일본의 통제도 심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일본대사관원들이 찾아와 그를 감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에는 딸 승자가 살고 있었다. 일본의 노여움을 사면 무용 인생과 딸의 신변이 위험해질 게 뻔했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일본에 충성하지 않았다. 유학 시절, 천황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 최승희는 조선을 놀렸던 천황의 명복은 빌어주기 싫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또, 활동하는 동안 일제와의 투쟁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작품을 창작해냈다. 대표적으로 「자유인의 꿈」, 「고향을 그리워하는 무리」, 「해방된 사람」 등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최승희가 나름대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일행위를 노골적으로 하기 시작했을 때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였다.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일본에서는 최승희가 반일 행위를 했다는 허위기사가 났었다. 또, 유럽에서 활동할 때 자신을 코리안 댄서라 홍보했는데,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최승희는 이것이 문제가 될까 염려했다고 한다. 따라서 친일행위를 한 것도 일본 정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춤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는 대단하다. 많은 사람이 춤은 기생과 무당만 추는 것이라고 반대할 때 최승희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여성은 조신해야한다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완성도 높은 무대를 위해 때로는 남자 분장을 하고 코믹한 동작을 취하며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동안 친일파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그가 남긴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열정과 대담함은 폄하되지 않았으면 한다. 마냥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최승희라는 사람을 다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세계를 매혹시킨 무희 최승희

<참고 문헌>

  1.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세계를 휘어잡은 여자』, 뿌리깊은 나무, 1995.
  2. 장유정, 「최승희와 대중가요」, 『우리춤과 과학기술』 제 2집, 2006.
  3. 장유정, 「최승희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들」, 『근대서지』, 제 13호, 2016.

정바름 에디터 niya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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