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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의 현 주소

0과 1에서 시작해 예술이 되기까지

도심 속 미술관과 대중,현대 미술의 현 주소

순수미술을 전공하며, 미술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 그 중 기억에 남는 한 교수님께서 현재 미술 전시들에 대한 회의감에 대해 말씀해주셨던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교수님은 대학 강단에 서시기 전 서울의 한 미술관의 에듀케이터로 일하시던 분이었고, 그 미술관은 20,30대의 젊은 대중들을 타깃으로 한 실험적인 전시들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내게도 그 미술관은 주로 젊은 감각의 사진전이나 테마 전시로 기억되어 있었다.


말씀에 의하면, 일명 '인스타 인생샷'을 건지기 좋고 사진 촬영이 가능한 전시의 경우 사람들이 갤러리 밖까지 줄을 지어 서 있는데, 고심하여 준비하고 초빙한 작가들의 순수 미술 작품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심 속 미술관이 해야 하는 역할은 응당히 대중의 미적 체험을 돕는 것일 텐데, 정성을 들여 준비해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작가의 전시를 준비해도 관람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기획자의 입장에선 입맛이 절로 씁쓸해지는 것을 막기 어려웠으리라.


교수님께서는 당신을 강단에 서게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었다고 하시며 말을 마치셨다. 기대와 다른 대중의 안목은 개인의 교양 수준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미시적인 차원의 결과가 아니라고도 강조하셨다. 그간의 미술교육은 대중들이 작품의 깊이 있는 맥락을 감상할 수 없게끔 하고, 겹겹이 숨겨진 개념과 의미의 레이어를 읽고 감동하는 방법, 작품과 호흡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동시대 미술의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소위 '엘리티시즘'이 존재하던 시대처럼 순수한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의 키치로 나뉘는 아이러니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식물원 마곡문화관 ‘이이남, 빛의 조우’ 전에서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을 재해석한 ‘다시 태어나는 빛, 양천’(2019) 앞에 서 있는 이이남 작가.

사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일명 '체험형 전시'라고 불리는 전 작품 사진 촬영이 가능한 '인생샷 잘 나오는 전시'나 미디어 아트 전시들에 반감이 강한 편이었다.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나, 동양화에 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미디어로 풀어낸 이이남 작가의 작품들은 감동이 있었다.


매체를 미디어로 정한 것에 의미가 있었다. 미디어만이 재현할 수 있는 부분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감각이 분명하게 존재함을 알렸다. 그러나 그간의 많은 미디어 아트들은 매체가 작품을 잡아먹은 것만 같았다. 회화 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겨있는 붓 터치 하나하나를 얄팍한 LED 모니터에 송출해 움직이게끔 하는 모션을 억지로 끼워 넣어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예술이라고 칭하는 것보다는, 잘 연출된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틀어놓는 것이 차라리 더 감동적이겠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날 것인, 솔직한 감상이었다.

뉴미디어, 소통의 예술

'뉴미디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통이 가능한가'의 여부다. 단순히 디지털의 편리한 기능만을 강조한 작품은 사람 손이 만들어 내는 감동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 예술에 있어 매체란 재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기능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가장 탁월한 소통 언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미디어는 그중에서도 가장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영상이 가진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시각 예술가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시간성'을 단번에 획득한다. 이 장점 덕분에, 미디어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풍부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


미디어가 건네는 말들은 어렵지 않다. 시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상이 그대로 전해진다. 작품에서 의도한 황홀한 체험과 관객이 느끼는 감상의 간극이 적어짐으로써 강렬한 미적 체험을 통해 작품에 매료되고, 이윽고 사랑하게끔 만든다. 지금부터 소개할 전시와 작품들은, 이러한 미디어 아트의 장점을 잘 살렸다고 느낀 사례들이다.


서울에서만 만나볼 수 있고 일부 예약제를 진행하고 있어 인원이 마감된 경우가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모두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며 현재까지도 만나 볼 수 있는 작품들로 손꼽아보았다. 공통적으로 '파도'라는 소재를 활용해 그 청량함이 화면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화면 밖으로도 전해지길 바라며 추천하는 글을 남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Through the Narrow Gate(좁은 문으로)'

충정로에 위치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가톨릭 기독교 신앙의 역사와 신자의 영적 체험에 관한 비가시적인 것들을 작품으로서 보존하고, 전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가장 인상깊던 것은 하늘광장에 있는 두 번째 하늘길의 '좁은 문으로'라는 작품.


홀로 여정을 걸어가야 함을 자각할 때 고독해지는 순례와 인생의 과정 속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로 두고있는 이 작품은 좁고 험한 길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찬란한 길을 미디어 아트의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한다.


멀티프로젝션 매핑과 입체 사운드 스케이프 기술이 적용된 작품으로서, 50여개의 스피커 모듈로 구성된 서라운드 음향 시스템은 더욱 정교한 몰입감을 느끼게 해준다.


COEX 'Wave'

도심 그 자체인 삼성동 코엑스 광장. 일종의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과 미디어 아트로서 주목받은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 디스트릭트(d`strict)라는 국내 디지털 기반 사업체에서 전광판이나 건물 내 공간을 미디어로서 연출하고자 하는 고객층을 타깃으로 진행한 마케팅. 이를 기획한 이성호 대표는 '다른 사업자들의 주목을 유도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교통량 많은 장소의 답답함을 날릴 수 있는 콘텐츠를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밝혔다.


실제 파도가 건물 크기의 투명한 어항에서 출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3D 착시를 유도하는 아나몰픽 일루전(anamorphic illusion)기술이 적용되었고, 무려 4개월에 걸쳐 영상으로 구현했다. 한 해외 네티즌이 남긴 '자가격리된 바다(self quarantined sea)같다.'는 감상은 이 작품을 더 없이 잘 드러낸다. 미디어 아트가 공간의 제약을 적게 받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디어 아트의 공공예술과 상업광고로서의 경계를 오가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의 인터뷰 참고)


아모레퍼시픽 라네즈, 성수동 에스팩토리

'몰입형 전시'로 미디어 아트를 전면에 앞세운 라네즈의 기획전 는 모든 작품들이 오브제와 미디어 아트로 구성되어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렇게 관람객을 둘러싼 모든 3차원의 공간에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넣어 4D 이상의 체험을 하게하는 전시가 많아 내심 부러움이 있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로 잘 짜여진 구성과 규모있는 미디어 전시를, 그것도 이렇게 전시 하나하나가 귀한 시기에 볼 수 있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서두에서 '인증샷'에 치중된 미디어 전시들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지만, 이 공간을 보면 누구든 '눈으로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마치 꿈을 꾸듯 온 사방에서 밀려오는 시각적인 자극에 저절로 카메라를 꺼내어 추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Wave'가 하나의 건물에 파도를 가두어놨다면, 이곳은 전시장 전체가 빛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다.


미디어아트로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의 끝이 아닐까. 눈으로 보고 곱씹으며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감상이 마음을 헤집어 놓으며 더한 황홀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어쩌면 미디어아트가 가진 시간성의 가장 큰 무기는, 감상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많고 빠른 시각 정보로 관람자를 뒤덮는데도 그것이 거북하긴 커녕 황홀하고 즐겁다는 점이 아닐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들 하지만, 흠뻑 젖어들 것을 알면서도 괜히 물웅덩이를 철퍽여보고 장맛비에 우산 없이 뛰어들어보고 싶은 마음. 미디어아트를 보면 그런 일렁거림이 있다.


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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