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는 연기를 잘한다
알고 보면 똑똑한 연기파 배우
고전 영화에 막 입문했을 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시민케인>도 히치콕도 아닌 마릴린 먼로였다. 다들 영화의 교과서니 울며겨자먹기로 본다는 전자들을 굉장히 감명깊게 본 괴짜였음에도 말이다. 그동안 미디어로 소비해온 먼로는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래서 꽤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녀의 작품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희대의 섹스심벌', '멍청한 금발미녀'... 남들이 말하는 배우로서의 먼로는 왠지 호감이 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먼로의 대표작들을 처음 봤을 때, 마치 반전영화를 보고난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반전은 '반가운 배신감'에 가깝다. 그녀의 영화 속 캐릭터는 항간에 떠돌던 스테레오타입과 100% 일치했고, 섹시함을 어필하는 몸짓도 내가 알던 꼭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전형적인 그 모습들로 인해 먼로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미모가 전부인 줄 알았건만, 영화 속에서 마주한 그녀는 미녀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배우'였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힌트가 있었다. 요즘보다 엄격한 잣대로 엄선하던 고전영화속 여주인공들은 우열을 가를 수 없이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다. 미모만 놓고 봤을 때 먼로가 군계일학이라고 말하기 힘들정도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인 폰다 등 육감적인 몸매로 섹스어필을 하는 배우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먼로만 유독 회자되는 데에는 미모외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건 조금만 깊게 들여다봤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먼로의 영화를 보면 특유의 작위적인 미소 하나도 계산된 행동이라는 게 보인다. 그래서 어색하다는게 아니라, 대단하다는 소리다. 그녀의 연기에는 어떻게 하면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지 치밀하게 고민했을 때만 나오는 섬세함이 있다. 타고난 것에 안주했다면 결코 완성되지 않았을 먼로의 장악력은 스크린을 뚫고 사람을 홀린다. 영화 한 편을 보고나면 그녀가 전에 없이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데, 비단 나뿐만의 체험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잊혀질 줄 모르고 오늘날까지 잔상을 남기겠지.
좋은 연기와 별개로 그녀의 영화는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뜨거운 것이 좋아>... 손꼽히는 대표작들은 제목부터 벌써 가볍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와 대비되는 멍청함으로 웃음을 유도하고, 결말은 꼭 돈많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끝나는 로맨틱코미디다. 게다가 대부분의 남주인공은 나이가 지긋하다.('대중성'을 빌미로 늙은 제작자들의 판타지를 충족해온 유서가 참 깊기도 하지.) 그나마 통쾌한건 그녀의 캐릭터가 대놓고 돈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다들 겉으로 젠체하며 안으로 숨겨두는 속물근성을 여과없이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것도 가장 순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직 먼로여서, 먼로만이, 먼로니까 살린 연기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무비콘 영화') |
"글쎄 , 그건 맞는말이지만... 근데 당신이 멍청하다고 하던데 나한텐 그리 멍청해보이지 않는걸요."
"전 중요한 순간에는 똑똑해질 수 있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똑똑한 걸 싫어하지만."
-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속 먼로와 노신사의 대화 中
먼로는 제작자와 대중이 원하는대로 영화 속 이미지를 밖에서도 유지했다. 어찌나 잘 속였는지 먼로는 그들에게 캐릭터와 현실의 삶을 동일시당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되었던 공식석상에서의 태도조차 카메라 앞 모습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할리우드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판에서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똑똑한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그녀를 멍청하다고 매도하는게 어불성설인 이유다.
먼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에서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어했다. 부디 외모보다 연기력으로 인정받아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길 원했다. 막 대세로 떠오르던 매소드 연기도 따로 배우고, 제작자의 강요로 받은 역할조차 전담 연기 선생과 공들여 완성했다. 일화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그녀가 진심으로 연기를 좋아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잔뜩 정보를 찾아본 지금은 '진짜' 먼로의 면모가 낯설지 않지만, 처음엔 얼마나 의외였는지 모른다. 편견인줄도 몰랐던 편견이 걷혀서 더 그랬을까.
이미 정해진, 타인의 기준으로 재단된 선입견에 질질 끌려가놓고는 줄곧 아는척을 해왔지만 이젠 그만할 때도 됐다. 살아있었다면 아흔을 넘겼을 먼로할머니의 억울함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게 거부하던 캐릭터들이 줄곧 회자되는 것도 모자라 팝아트로 알록달록 무한복제되고 있는 세상이지만, 나라도 널리 알리련다. 먼로 연기 잘합니다, 여러분!
(이미지 출처: Vulture, Harper's bazaar) |
윤단아 에디터 1229yo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