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로 보는 삶, 극사실주의
이 사진은, 인물을 찍은 사진에 연필을 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들고 있는 연필로 그린 그림일까?
마치 실존 인물을 그대로 본 뜬 것 같은 얼굴 윤곽, 눈가와 입술의 주름, 섬세한 명함 표현.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위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놀라게 된다. 도저히 그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센스와 능력에 감탄하다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뒤따라온다. 왜 작가는 사진을 찍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이 그림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위의 그림은 극사실주의를 잘 나타내는 그림이다. 극사실주의란, 추상적 표현이 주를 이루던 뉴욕과 서유럽으로부터 등장한 새로운 예술사조이다. 예술 작업에 있어서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를 추구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사진 작업과 공통된 특성을 지닌다. 또한 극사실주의는 팝 아트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사실주의의 새로운 형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팝 아트처럼 일상적인 것들을 소재로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적인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극사실주의는 말 그대로 현실 속의 대상을 극단적으로 사실적이게 묘사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에서 ‘익숙함’과 동시에 ‘낯섦’을 느끼게 된다. 작품이 표현하는 대상은 일상적이지만 그 대상을 새로운 맥락과 상황 속에서 마주함으로 비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스쳐지나갈 수 있는 풍경을 순간적이고 입체적으로 현실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을 보는 관람자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작품에 주관을 담아내기보다는 그 현상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작품의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 그대로의 풍경과는 다르다. 실리콘으로 표현된 인간의 피부 주름, 마치 정말로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음식 모형…. 풍경이 아닌 작품 속 실제적인 대상만을 객관적으로 관조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찾게 만든다. 의미적으로 보면 극사실주의는 기존의 예술 세계가 가진 추상성과, 사진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적인 표현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사람인가 하고 놀라게 되는 이 인물 조각들은 마크 시잔(Marc Sijan)의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실적인 신체 조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작업하며 또한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일상 속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상으로 하되 현대인들이 지닌 무기력함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관조적이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위의 두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조각들은 대부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입을 굳게 닫은 얼굴들을 통해 현대인의 허무감과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나타낸다.
앞에서 살펴본 마크 시잔과 같이 인물 조각을 주된 작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 샘 징크스(Sam Jinks)의 작품들이다. 마크 시잔이 현대인의 무기력함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샘 징크스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이다. 극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섬세한 재료 사용을 통해 입체적으로 인물을 조각한다. 표현의 영역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도 치밀하게 사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실리콘, 섬유유리, 수지, 탄산칼슘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머리카락 한 올과 피부 속에 비치는 혈관까지 구체적으로 재현하였다. 극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삶에 대한 시선이 합쳐진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통찰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분명 평면이지만 평면이 아닌 입체로 보이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선들. 극사실주의가 평면과 만났을 때 기이할 정도로 입체감을 지니게 된다. 드릭 드지미르스키(Drik Dzimirsky)는 연필만을 사용해서 인물의 피부, 명암, 물방울 하나하나까지 표현해내 사실적인 느낌의 인물화를 그려낸다. 작가는 고성능 카메라와 컴퓨터의 보정 프로그램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현실의 모습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피사체가 가진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작업한다. 그림 속에는 여성 모델의 주름, 모공, 털 하나조차 빠지지 않고 모두 담겨져 있다. 그의 작업은 인물 사진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만, 자연적인 재료와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피사체가 되는 여성 모델의 아름다움과 사실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극사실주의의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혹은 물체가 될 수도 있다. 동물들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샘 리치(Sam Leach)는 사실적인 표현과 더불어 여러 색채를 과감하게 사용한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동물들과 반대로 그림 속에 강렬하게 자리하는 색색의 면들은 조금 이질적이게 비추어진다. 하지만 강렬한 색채는 작가의 사실적인 묘사를 뒷받침하며, 사실적인 표현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의 가치를 나타낸다. 작가의 손에서 사실적으로 재현된 동물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동물들을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같은 생물로 인지하게 만든다. 또한 더 나아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의 삶과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보다 더 진짜 같고, 평면까지 입체로 만들어 버리는 극사실주의 작품들. 그림 속의 여인과 눈을 마주하면 마치 손닿을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조각된 인물의 피부를 보며 거울 속에 비치는 것보다 더 선명한 촉감을 느낀다.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작품을 표현하는 능력과 기교에 감탄이 나오지만, 능력과 기교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현실에 대한 통찰에 빠져들게 된다. 현실의 대상을 선명하게, 더 선명하게,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는 만큼 전해지는 메시지 역시 그만큼 선명하게 다가온다. 극사실주의는 마치 다이아몬드와 같다. 현실을 최대한 예리하게 오리고, 재단하고, 날을 닦고, 섬세하게 깎아내어 만든 다이아몬드. 잘 연마된 다이아몬드의 빛이 맑고 투명하게 분산되듯, 극사실주의 작품 역시 현실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표현할수록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풍경의 현실을 보여준다.
삶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삶은, 그리고 세상은 때때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냉혹한 면을 보여준다. 무의식 속에 가둬두는 생각과 감정들, 차라리 기억에서 지우고 잊고 싶은 여러 모습들. 작게 보면 개개인의 매일매일, 크게 보면 우리가 모여 사는 세계에까지 삶 속에는 여러 모습이 공존한다. 실제로 최근 세상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눈 뜨고 바라보기조차 어렵게 느껴진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실주의가 보여주는 시야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 그리고 사실의 표면 아래에 있는 근원을 통찰하는 힘. 예술 사조나 의미, 가치를 떠나서 극사실주의는 우리 삶과 필연적으로 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http://terms.naver.com/ ; 극사실주의
http://www.marcsijan.com/
http://www.samjinks.com/
http://www.dzimirsky.com/f404.html
http://sam-leach.squarespace.com/
[신은지 에디터 sej305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