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당신에게로 숨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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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그리하여 마음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예술가의 명상법 - 사비나 미술관
나를 나에게로 숨긴다는 말, 나를 숨겨서 나로 오롯이 남는다는 것. 정답보다는 질문이 떠오르는 말로 이루어진 내 리뷰글의 제목은 내가 이번 전시회에서 얻은 덩어리를 조금씩 풀어보고 다듬어보려는 시도다. 예상보다 생경했던 나를 바라보는 시간, 나만이 남은 공간, 마주할 때마다 일어나는 예술가의 사색과 나의 사색의 만남들에서 나는 생각보다 모호한 덩어리를 얻어온 것이다. 단번에 정의하기에는 그 모호한 것은 생각보다 길고 복잡했으나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을 거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느낀 것들을 정리하며 풀어나가 보았다.
Prologue - “숨을 곳을 찾아다니는 방랑자들”
‘한숨’이다. 모두가 이도 저도 아닌 막연함 속에 굴러다니며 숨 대신 ‘한숨’을 쉰다. 한숨만 쉬고 있기엔 불안하니 위로와 조언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간다. 내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쩌면 ‘정답’이란 것조차 무거운 것 같아 일단 나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위로’라는 이름으로 찾는 것 같다. 서점은 그런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겠다는 책들이 가득 찼고, 온갖 SNS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위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찾아간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위로를 찾아다니는, 짐을 덜어 놓을 곳을 찾아 떠나는 방랑자로 남은 것인지. 라며 쏟아지는 ‘한숨’이 이 지독한 순환 끝에 달린다. 누구 잘못인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그 질문조차 무거운 게 지금의 모습인 것 같다.
내게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위로’조차도, 사실 참 어렵다. 남의 위로가 나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치유가 나의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위로를 남이 주는 정답이라고 생각하려니 또 망설여졌다. 남의 정답이 나의 정답인가. 나를 모르는 이가 “위로해줄게”라며 나를 모른 체 정리된 언어를 무작정 받아들이려니 나와 어긋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어쩌면 내겐 위로조차도 확률이었다. 누군가의 방법이 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불안정한 것만 같았다. 괜히 한번 봐볼까 하며 ‘위로’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집어 들다가 아무런 온기를 받지 못하고 그냥 놓아버린 것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위로들’과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주변에서도 나와 같은, 또 다른 작은 한숨 같은 이야기를 꽤나 들어왔다. 내가 정말 숨을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답, 어쩌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모르겠다.
반대로 힘들고 지칠 때 당연하게 원하는 것이 그런 것들일까. 복잡한 곳에서 잔뜩 뭉쳐버린 마음을 좀 풀어볼 수 있는 곳, 잠시 멈추기라도 해볼 수 있는 곳, 우선 답답한 것들을 놓아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나만을 위해 숨을 수 있는 곳을 향한 다양한 형태들의 어떤 순간들을 쫓는 시선은 당연하게도 바깥에 향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시선을 반대로 돌려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이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반면 나는 시선을 나에게로 오롯이 돌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나도 100에서 90은 나보다 주변에 놓인 일들이 더 급한데, 이런 와중에 나에게 시선을 둔다는 고요한 시간이란 틈은 정말이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조차도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만 남아있는 것은 이렇게, 특히 지금은 말만큼 쉬운 일이 전혀 아니다. 그렇게 깊게 경험해보지 못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은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 잘 모르는 지금의 나까지로 이르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으로 방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한가.
그런 와중에 어떤 감정이나 이유에 상관없이 ‘나’라는 존재를 ‘나’만을 위해 숨겨볼 수 있는 순간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예술가의 작품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 ‘나’를 위한 시간에 대해 바라본 적이나 질문해본 적이 있는 이라면, 그런 질문과 함께 예술가의 사색과 명상을 함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알려드리고 싶다.
예술가들의 몰입과 사색의 방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간,
당신에게 복잡한 공간에서 벗어나 홀로 오롯이 남아보는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주고자 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비나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리하며 마음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 예술가의 명상법>(이하 <예술가의 명상법>)은 현대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명상’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현대미술 작가들의 명상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가만의 독창적인 사유방식을 추적해 그들만의 호흡과 감각, 몰입과 안정의 방식을 보여주며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뜻밖의 명상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평면, 입체, 설치, 미디어 작품을 아우르며 예술가의 절제되고 정제된 고요함과 묵상의 표현방식, 작품에 몰두해 열정적인 실험에 빠져드는 과정, 그리고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보도자료
<예술가의 명상법>을 통해 내가 느낄 수 있던 시간들의 리뷰 혹은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의 명상을 마주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명상’이라는 말은 어색하나 ‘나만의 시간’과 같은 말로 한다면 조금 더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단어가 가진 느낌만큼이나 편안하게 흘러가는 느낌으로 나의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더불어 전시회에 대한 정보적인 리뷰는 에필로그와 함께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예술가들은 고유의 통찰력이나 직관력으로 세상의 이치를 해석하고 번역합니다. 그 중심에는 자기자신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몰입하고 마음의 근육을 단력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보도자료
"나를 감추어 버린"
오로지 나만이 침투할 수 있는 고요함. 내가 가진 기억 중에 가장 고요한 것, 정적인 것. 꺼내 볼 생각도, 어쩌면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한 번도 꺼내 보지 못한 것을 만나게 해준 작품을 만났다. 작품을 보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감춰졌다. 내게로 감춰진 건지 작품 속에 흡수된 건지 아니면 두 세계가 맞닿은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생겨버린 것인지. 아주 조용하고 깊었고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수면 저 아래로 깊이 내려간 듯한 고요함. 내가 이곳까지 오느라 거쳐온 수만 개의 장면과 시간, 기억과 감각까지도 작품은 제 품에 모두 숨겨버렸다. 나는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앞에 섰다. 나의 ‘파도 소리’라는 장면을 가진 수많은 기억들 중에서 가장 조용한 것을 작품과 나 사이로 불러냈다.
임창민, 'into a time frame_Bus stop H' 피그먼트프린트, LED모니터, 2017 |
작품의 설명을 조금 더 살펴보면 이 작품이 단순한 사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 그림자가 가만히 드리워진 정지된 풍경 너머의 파도는 넘실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있는데 유일하게 넘실거리는 파도는 이 작품이 단순히 프레임에 담긴 풍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본 파도 중 가장 조용할 이 파도는 조용한 생동감으로 작품 속 공간을 현실로 불러냈다. 작품 속 세계가 이렇게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작품도 처음인 것 같았다.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내 위에도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이 작품은 특별한 것 없이 나를 그만의 세계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데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더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오가는 언어가 존재 간의 언어라면 지금 작품과 나는 서로의 앞에 존재하는 충분한 존재로 서 있었다. 그렇게 온전히 안겼다. 내 모든 걸 제 품에 숨겨버린 작품 앞에서 나는 고마웠다.
안아준다는 모습과 언어는 그 무엇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읊어지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나를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아무 소리 없는 여백은 동시에 나를 여유로운 사색의 영역으로 이끌어줬다. 사색을 망설이는 순간마저도 온전히 가능한 영역으로. 그러나 나는 어떤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작품과 나 사이라는 낯선 공간이 주는 여백을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백으로만 존재하는 시간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한 나의 일상들이었기 때문에 그 여백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있었다. 내가 어딘가의 품에 들어갔다는 건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침묵, 어쩌면 나만의 침묵, 여러 모습으로 말할 수 있을 다른 세계에 떨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순간과 영원"
한 사람의 세계는 그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하나의 거대한 공간을 이룰 수도 있고, 어떤 일부에 흡수되어 오롯이 응축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 아주 거대한 것, 아주 작은 것에 상관없이 허공의 보이지 않는 먼지도 그것이 한 존재의 세계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내가 비로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그 세계를 사는 나조차도 모르게 함께 공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모습의 세계 중에서도 나뭇잎,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에는 나뭇잎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순간을 나뭇잎으로 기록한 작가가 있다.
허윤희, '나무잎일기' 종이에 과슈, 2008-2018 |
작품 속 나뭇잎은 순간의 모습을 말한다. 이런 모습으로 기록된 작품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종이에 쓴 일기라고 하기에도, 나뭇잎이 그려진 일기라고 하기에도 이 작품을 표현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다른 의미를 담은 작품이란 것을 느낀 것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따르면 이 무수히 나열된 흔적들은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뭇잎일기>는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영원에 순간이 담겨있듯 한 순간 속에도 영원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너른 품으로 나를 안아주는 어머니이고 그 안에서 저는 건강하고 즐거운 아이가 됩니다. 매일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은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허윤희
“이곳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숲이구나”라는 감상으로 기억하는 작품이다. 자연 속에서 위로를 얻은 작가의 순간들은 또 하나의 포근한 숲을 이룬 듯 했다. 초록에서 갈빛과 붉은빛으로 변하는 잎들의 나열은 작가가 보낸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뭇잎은 시간의 순간을 품고 있고 이 순간들을 자신의 일기와 함께 나열하여 이루어진 이 숲은, 어쩌면 한 사람이라는 영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영원과 순간의 관계는 아마 그 누구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원과 순간을 말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아무도 정답을 모른다. 모호한 관계다. 하지만 이 모호함은 감히 우리가 영원과 순간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순간을 선물해준다. 작가의 “영원에 순간이 담겨있듯 한 순간 속에서도 영원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라는, 설명보다는 함께 질문할 수밖에 없는 내용은 오히려 그래서 작품이 영원과 순간이라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도 그 경계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순간들의 숲. 10년이란 시간 동안 이어진 작품이지만, 어쩌면 이 작품 앞에 서고 지나갈 모든 순간들이 이 앞에서 모인다면 정말 영원을 이루는 숲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의 순간도 그 숲에 남겨졌을 것이다.
나의 순간들은 어디에 모이고 있는지 질문하게 되던 작품이었다. 내가 가끔씩 끄적이는 일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던 작품. 예술가의 순간들 앞에 섰을 때 떠오르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도 내가 남겨온 순간들이었다. 또 다른 오늘 나의 순간은 어떤 모습인지, 그것은 나의 세계 어디에 녹아 들어가고 있는지.
명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가부좌를 튼 자세로 눈을 감고, 낯선 암송이나 조용한 음악을 듣는 이미지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명상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본 전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쉽고 편하게 명상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미술관에서 즐기는 온전히 편안한 휴식, 고정관념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유쾌한 명상 방식 등을 제안한다. -보도자료<예술가의 명상법> 전시회를 이야기하는 데에 체험을 빼놓을 순 없다. 전시와 함께 진행되는 체험은 지금까지 많이 봐왔지만 사비나 미술관은 달랐다. 다소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감상의 흐름이 툭 끊겨버릴 수도 있는, 혹은 요즘 자주 나타나는 포토존과 같은 체험과는 정말 달랐다. 전시와 체험이라는 두 요소는 온전히 전시회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있었다. 내게는 전시를 감상하며 생각해 볼 주제의 무게를 같은 깊이로, 혹은 더 깊은 곳으로 감상자를 이끌어가는 체험은 처음이었다. <예술가의 명상법>은 ‘명상’ 혹은 ‘혼자 보내는 시간’을 단순히 감상하고 사색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감상자가 이를 직접 해볼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해서 전시장 곳곳에 두었다.
"사각사각"
전시회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나무 칸막이 책상이 4개가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망설이지 말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과 간단한 설명을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해보고 싶은 것, 그냥 마음이 끌리는 책상에 가서 앉아서 지시대로 한번 해보면 된다. 전시를 보기 시작할 때 해보아도 좋고 전시를 모두 향유한 후에 마지막에 예술가들 앞에서 느낀 ‘명상’에 대한 사색을 하면서 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혹시 예술가들의 명상을 바로 마주하기에는 ‘명상’이라는 주제가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이곳에 앉아서 체험을 먼저 해보고 감상을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거의 전시를 보기 시작할 때 체험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연필로 흰 종이 채우기’이다.
1. 앞에 붙어 있는 명도 중 마음에 드는 명도를 하나 선택합니다.
2. 바닥에 있는 종이에 본인이 선택한 명도를 채워 그립니다.
3. 다 채워진 종이는 찢어서 오른쪽에 있는 통에 버립니다. (이미 그린 종이 위에 다시 그려도 됩니다)
간단하다. 원하는 만큼의 종이 공간을 정하고 원하는 만큼 그 공간을 채우면 된다. 너무 단순한데, 이런 단순한 방식의 제안은 그만큼이나 어색한 ‘명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저 조용히 혼자 앉아서 연필로 종이를 채우는데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 애매한 경계에 걸쳐진 것 같아 기분이 묘하게 붕 뜨는 기분이었다. 얇은 연필 선으로 종이를 채우려고 아무렇게나 선을 긋다가 비어있는 공간을 이어 채워나가는 단순한 행위일 뿐인데 묘한 느낌이 든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이런 기분인 건가. 생각이 덜어졌을 때 드는 기분이 이런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전시 공간의 고요한 분위기도 무심히 종이를 채워나가는 내 모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나의 행위’ 그 중에도 별 의미 없이 종이 채우기에만 집중한 단순한 나의 모습을 느껴보는 것. 사실 일상을 살면서 내가 하는 행위를 선연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줄곧 종이를 빼곡히 칠하다가 일어섰다. 묘하게 좋은 멍한 기분도 덤으로.
"동떨어지기"
“관람객들이 외부의 시선, 익숙한 사각형 도시, 딱딱한 시멘트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그안의 생명성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 김지수X심선명
김지수X심선명, '페트리코(Petrichor)', 2018 |
3층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돔을 하나 마주할 수 있다. 그 작품을 만났다면 괜히 망설이지 말고 들고 있던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누우면 된다. 그물침대 아래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은 후각만으로도 도시에서 벗어난 자연에 있는 듯한 기분을 안겨줬다. 누우면 보이는 돔 천장에 그려져 있는 식물 그림은 그 자연을 더 현실로 이끌었다. 자연 속이나 들판에 그저 누워 본 기억은 거의 없으나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던 공간이었다.
그저 누워 있으면 되는데 막상 그러고 있으니 어색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앉아보고 다시 누워보고를 반복했다. 지금까지는 전시회에서 뭔가를 체험하려면 다음 사람 때문에 눈치를 보다가 급하게 뭔가를 느끼기도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알게 모르게 주변에 눈치를 보고 지내왔던 건지,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왜 이러냐며 나는 이 속에 명상하러 왔다고 괜히 기억해보면서 다시 풀썩 누워버렸다. 그렇게 생각보다 전혀 모르는 공간에 나 혼자만을 두는 경험은 생경했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대부분이고, 혼자 돌아다니는 게 익숙했던 나는 나름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낸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일상에서 동떨어져 전혀 모르는 공간에 혼자 누워있는 경험은 그런 내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확연한 차이가 잘 안 보이지만, 혼자 보내는 것과 나를 위한 시간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전혀 모르는 만큼 나는 그 공간에서 신경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누워있는 자세랑 숨 쉬는 거랑 등등, 나의 사소한 것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아래에서 올라오는 천연 향이 좋다며 음미해보기도 하며 말이다. 딱히 정말 특별한 게 없었다. 이런 게 멈춤인가. 할 수 있는 것도 신경 쓸 것도 없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뭔가 덜어진 기분이었다. 몇 분을 누워있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전시회 체험에서 충분히 나만의 시간을 채우고 나올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데 아주 단순해서 생경했던 인상이 남은 작품. 그리고 정말 좋은 휴식이고 명상이었다.
이준, '팝콘 마인드', 2018 |
<팝콘 마인드>를 통해 내 ‘마인드’로 튀기고 온 팝콘. 어떻게든 집중해보려 할 때마다(무작정 앉아서 집중을 시도해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튀겨져 쏟아져 나오는 팝콘은 정말 유쾌하다고밖에 표현 못 하겠다. 구수한 팝콘 냄새라는 즐거움은 덤이다. 이처럼 유쾌한 명상과 함꼐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모습의 명상들이 작품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전시회다.
Epilogue - 전시회 <예술가의 명상법>은,
진관동에 새로이 재개관한 사비나 미술관은 곳곳에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미술관이다. 함께 진행되고 있는 전시회 'AA(Art&Architecture)프로젝트 - 공간의 경계와 틈'은 전시 공간이 따로 있는 전시회가 아니다. 사비나 미술관 건물 자체가 건축가와 예술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건물 자체의 존재가 전시회다. <예술가의 명상법> 전시장 내에서는 예술가와 건축가의 인터뷰와 함께 공사과정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어 미술관 건물이 가진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1층부터 루프탑까지 건물 곳곳에 숨어있는, 자리 잡고 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리고 달을 사랑한 남자 레오니드 티쉬코브의 첫 개인전인 '레오니드 티쉬코브 - Private Moon' 전시회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선물처럼 레오니드 티쉬코브에게 홀딱 반하고 왔다. 사랑하는 달과 함꼐하는 그의 고요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루프탑에 설치된 그의 달과 함께 감상하고 올 수 있다.
김승영, '말의 풍경' : 미술관 1층 외벽에 위치 |
레오니드 티쉬코브, '달과 녹색보트' (러시아), 2015 |
개인적으로는 평일 오전에 갔기 때문에 전시를 감상하는 거의 2시간 내내 여유롭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정말 나만의 산책이라는 큰 기회를 얻은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를 느껴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쉬러 간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전시회로 발걸음을 옮겨도 충분하고 그것만으로도 좋다. 한번 그저 부담 없이 예술가의 사색과 마련된 명상들을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이나 누구나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혼자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만큼 작품 앞에서 생각에 잠기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이 전시회와 더 어울리는 감상이 될 것 같다. 혹시 사람이 너무 몰리고, 이동하기에 급급한 전시회들에 지친 이들이라면 이 전시회는 그 피곤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작품 앞에서 머물기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전시회다. 정말 피곤하기보다는 쉬고 올 수 있는 전시회였다. 감상 후에는 1층에 마련된 사비나 미술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필자의 개인적인 마음을 조금 더 꺼내 보자면 사실 오랜만에 한 번 더 가고 싶은 전시회를 만났던 것 같다.
배성미, '뜻밖의 노동' 뒤에 마련된 공간 |
무엇보다 체험, 작가의 명상을 직접 해볼 수 있다. 미처 모두 소개하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배성미 작가의 <뜻밖의 노동>이다. 이 작품은 사용되고 버려진 기름때가 가득한 기계부품을 닦아내는 행위에서 성찰의 순간을 마주한 작가가 닦은 기계부품이 전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감상자는 얼마든지 이 ‘뜻밖의 노동’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전시된 부품들 중 하나를 집어 마련된 공간에서 닦아내는 행위를 직접 하며 예술가가 경험한 명상을 체험할 수 있다. 작품과 명상의 공간이 서로 어색하지 않게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감상과 체험을 같은 깊이에서 유지하며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라는 말을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에 있어 그사이의 거리는 없고도 있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이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명상은 예술가만의 의미에서 이것이 작품으로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을 이루었든 여전히 진행 중이든 작품은 그 작품으로서 예술가의 사색을 기어코 담아내며 존재한다. 우리는 전시 공간을 통해 그 단순하지 않은 과정에서 태어난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유로 미술을 사랑한다. 작품이 탄생하는 이유와 목적은 서로 다르겠지만 예술가의 내면에서 시작해서 사색과 시간이 겹겹이 덧대어져 가며 이루어지는 작품이 가진 ‘응축’을 사랑한다. 그리고 단순한 형태가 아닌 감히 단번에 정의할 수 없는 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쏟아낸 결과 앞에 섰을 때, 그렇게 작가의 세계와 나라는 세계가 맞닿은 경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어떤 것들을 사랑한다. 그 사이의 세계 또한 나와 작품 사이의 유일한 것이기에. 그런 사이가 선명하지 않아도 단순하게 느껴보는 것으로 더듬어보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런 나에게 <예술가의 명상법> 전시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 자신의 엄지 지문과 함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예술가의 사색과 감상자의 사색이 모이고 있던 곳. |
나를 나에게로 숨긴다는 말, 나를 숨겨서 나로 오롯이 남는다는 것. 정답보다는 질문이 떠오르는 말로 이루어진 내 리뷰글의 제목은 내가 이번 전시회에서 얻은 덩어리를 조금씩 풀어보고 다듬어보려는 시도다. 예상보다 생경했던 나를 바라보는 시간, 나만이 남은 공간, 마주할 때마다 일어나는 예술가의 사색과 나의 사색의 만남들에서 나는 생각보다 모호한 덩어리를 얻어온 것이다. 단번에 정의하기에는 그 모호한 것은 생각보다 길고 복잡했으나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을 거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느낀 것들을 정리하며 풀어나가 보았다.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 사람들이 왜 위로와 치유라는 것을 그렇게 찾아다니는 건지, 그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라는 질문부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간. 그렇다면 나는 나를 위로할 수 있는지, 오로지 나로서 어떤 안정이란 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 질문했다. 예술가들의 명상과 사색으로 이뤄진, 어쩌면 나보다 더 완성된 존재 앞에서 내가 가진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해보고, 내가 경험하고 온 것이 무엇인지 쓰다듬어보았다. 꽤 긴 여정의 감상 글이었지만 내가 전시회에서 얻어온 것의 흐름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었다.
즉 “당신을 당신에게로 숨겨드립니다” 이것은 내가 떠올린 정해져 있는 생각이라기보다는 예술가들의 명상법 앞에서 내가 비로소 생각해낼 수 있던 선명한 답이자 또 다른 질문이다. 그래서 “당신을 당신에게로 숨겨드립니다”라는 제목은 <예술가의 명상법> 전시회를 감상한 한 명의 감상자로서, 이 꽤나 긴 리뷰 글 내용의 요약보다는 그 중심에 자리한 마음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 리뷰를 마무리하며 말하고 싶다.
당신을 당신에게로 숨기는 나를 바라보는 시간, 그것에 대해 예술가의 깊은 사색과 마주하며 거닐어 볼 수 있는 <예술가의 명상법> 전시회 리뷰를 마칩니다.
[전시 정보] 그리하며 마음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 <예술가의 명상법>
- 전시장소 : 사비나 미술관 (서울시 은평구 진관 1로 93)
- 전시기간 : 2018. 11. 1일(목) ~ 2019. 1. 31(목)
-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30분 (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 성인 : 8,000원, 어린이/청소년 : 5,000원
- 기획 : 사비나 미술관
- '사비나 미술관 소장품전', '레오니드 티쉬코브 - Private Moon', 'AA(Art&Architecture)프로젝트 - 공간의 경계와 틈' 전시를 함께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 소개] 예술가들의 몰입과 사색의 방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간
마이클 케냐, 'Single Tree, Mita, Hokkaido, Japan', 2007
- 본 전시는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회자되고 있는 명상의 가치와 의미를 현대미술 작가들의 명상법을 통해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예술가들은 고유의 통찰력이나 직관력으로 세상의 이치를 해석하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존재합니다.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몰입하고 마음 근육을 단련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사비나미술관은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사유방식을 추적해 그들만의 호흡과 감각, 몰입과 안정의 방식을 보여주며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뜻밖의 명상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평면, 입체, 설치, 미디어 작품을 아우르는 예술가의 절제되고 정제된 고요함, 묵상의 표현방식, 작품에 몰두해 열정적인 실험에 빠져드는 과정, 그리고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 등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뇌파와 생체인식센서, 빅데이터 분석을 이용한 작품으로 관객의 적극적인 체험을 유도하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해볼 수 있는 유쾌한 명상 방식을 제안합니다.
- 예술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명상법으로 함께 호흡해보는 시간을 가지려합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도 각자의 마음을 바라보고 사색하는 여유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길 바랍니다.
작품 사진 : ⓒ 사비나 미술관
글 : 오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