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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아름답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하지만 살아생전 시집 한 번 펼쳐내지 못하고 삶을 닫아버린 시인. 바로 윤동주 시인이다. <서시>나 <별 헤는 밤> 같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학교에서 열심히 배웠던 시들을 기억 속에 묻어두고 살았는데, 한 해의 끝자락에 서자 문득 그것들이 떠올라 다시금 시집을 펼쳐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시 속의 윤동주는 젊었고 깨끗했고 여렸다.

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영화 '동주' 中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영화 '동주' 中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해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항일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사실 그는 윤봉길 의사나 유관순 열사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에게 시란 살아가는 힘이었기에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걷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를 평생에 걸쳐 참회하고 부끄러워했으며 그나마 허용된 유일한 자유였던 종잇장에 그것을 쏟아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남겨진 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바람에 이유 없이 괴로워하고 우물에 비친 한 사나이를 미워하고 가엾어 하는 그의 ‘부끄러움’과 ‘참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이 그저 나약하고 힘없는 자의 패배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은 대게 3가지의 길을 택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감히 생을 버리거나, 그래도 살아야했기에 숨죽인 채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했거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잘 살아보고자 했거나. 여기서 생을 버렸던 이들의 수는 먹고 사는 문제에 함몰됐던 이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외계인이 지구를 집어삼켰다고 하더라도 먹고 사는 일은 인간에게 있어 당장 눈앞에 떨어진 급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제의 잔인한 탄압과 폭력에도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가 오랜 시간 버텨낼 수 있었을까.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영화 '동주' 中

부끄러움이 긍정적인 기능만 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때에 따라서는 정직하고 올바른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관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부끄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치기를 하지 않고 줄을 선다.

 

친일파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점는 부끄러움의 유무가 아닐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5000명이 넘는 이들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살을 맞대고 살아온 친지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거나, 그에 일조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떵떵거리고 살 만큼의 재산과 권력을 얻기도 했다. 누군들 부와 권력이 탐나지 않았으랴. 하지만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친일은 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나약한’ 대중들은 ‘더러운 부와 권력’에 눈이 멀진 않았다. 그들에겐 적어도 친일파에게는 없는, ‘부끄러움’이란 게 있었던 것이다.

 

꽤 많은 이들이 친일을 했고 그렇게 많지 않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숨죽였던 그들에겐 일본의 지배가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이,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잃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때문에 그토록 잔혹하고 무자비한 횡포 속에서도 우리의 것들이 명을 다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이는 1919년 3월 1일 전국의 민중들을 봇물 터지듯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던 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그의 나약함에 좌절하며 뉘우치는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노래했으나, 부끄러움은 결국 소중한 것을 지키고 세상을 바꿔놓을 만큼의 단단한 힘으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듯 나약하지만 선하고 올곧은 마음, 부끄러움에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지난 10월 즈음부터 우리나라는 법의 테두리, 도의적인 책임 따위를 우습게 아는 몇 명의 인물들과 그 부역자들로 인해 총체적 난국에 접어들었다. 뉴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매일이 시끄러워 아침 드라마를 따로 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소위 높으신 분들과 뭣도 아닌 분들이 저지른 수많은 범법행위와 몰상식함이 뒤엉킨 합작품에 국민들은 분노를 지나 집단적 무기력에 빠져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냄비가 식을 때만을 기다리는 그들의 알량한 태도에 국민들은 지쳐도 지쳐있을 수가 없었다.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거리로 나서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정치적 색채를 떠나 하나가 된 국민들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촛불을 밝혔고 토요일 밤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놓았다.

 

50, 60대는 “이런 세상을 만든 게 미안해서”

30, 40대는 “나중에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10, 20대는 “이 사태가 말도 안 되고 부끄러워서”

 

물론 지금까지 매주 이어지는 집회에 100만 명의 훌쩍 넘는 이들이 집회에 참여했던 이유는 조금씩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촛불을 든 그들의 손에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서려있었다.

 

모두가 집회를 주관하는 투쟁본부의 임원이 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회에 참여하기 힘든 사람들도 분명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구리거울 속 모습이 욕됨을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량하게 사는 이보다 온갖 불법을 저지른 이가 부와 권력을 얻는 사회 구조를 만든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한다. 정경유착의 연결고리를 진작 끊어내지 못한 것을,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무시한 것을 후회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바로잡지 못하면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날에 또 한 번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부끄러움이 고맙고, 또 시리도록

구글 이미지 발췌

윤동주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고 거기에 뿌리를 두고 쓰인 시들에서는 지금까지도 참회의 눈물이 뚝뚝 흐른다. 하지만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부끄러움이 나는 고맙고 또 시리도록 아름답다.

 

2016년의 끝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마냥 행복하고 따뜻한 연말이길 바랐건만 여전히 여의도는 시끄럽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광화문은 붐볐다. 1월이 되면 시국은 한 발자국 디디는 것조차 힘들 만큼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다. 그래도 나는 국민들이 보여준 부끄러움의 저력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들이 밝힌 양심의 촛불은 윤동주의 시가 그러했듯이 나약했으나 아름답고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에.

 

글.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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