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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환상이 실제가 되진 않아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

인파가 몰린 한 야외 콘서트장. 아이돌 그룹 '챰'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콘서트가 무르익던 중 챰의 리더 미마는 돌연 독립을 선언한다. 음원 판매 수익이 진전을 보이지 않고, 챰도 슬슬 해산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이 돌 던 차에 기획사는 미마를 연예계에서 더 잘 팔릴 수 있는 배우로 전향하도록 한 것이다.


챰을 탈퇴한 미마의 첫 일은 TV 드라마 '더블 바인드'에 출현하는 것. 기획사 대표는 미마는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며, 시키는 장면이라면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다고 각본가에게 미마의 분량을 늘려달라고 부탁한다. 때문에 수위 높은 강간 신을 꾸역꾸역 소화하고, 소속사의 권유에 누드 화보까지 감행하는 미마.


마음속에 무언가 내려앉은 것일까. 폭력적인 배우로서의 삶은 이미 떠나온 아이돌의 삶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고 '배우 미마'와 '아이돌 미마'의 자아가 분열되며 정신착란을 겪는다. 미마의 눈 앞에 나타난 가상의 아이돌 미마는 이렇게 말한다. "넌 더러워졌어, 넌 가짜고 내가 진짜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은 미마를 더욱 압박해온다. 현실, 드라마, 꿈, 가상의 경계를 잃어버린 미마는 무엇이 진짜인지, 자신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무리한 포즈를 요구한 사진작가를 송곳으로 마구 찌르다 커트 소리와 함께 눈을 뜨면 침대 위. 분열을 겪는 미마의 뚝 뚝 끊긴 일상을 따라가는 연출은 영화를 보는 관객 또한 그녀의 불안한 상태에 완전히 동화되도록 한다.


<퍼펙트 블루>는 비운의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재패니메이션의 대가 '곤 사토시'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곤 사토시는 47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지만 그의 작품은 대런 애러노프스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등이 오마주 하며 아직까지 스크린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퍼펙트 블루>를 통해 2D 애니메이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화의 독자적 영역이 존재함을 증명하였고, 개봉한 지 20년이 훨씬 지난 영화임에도 당시 제기된 문제의식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현실을 대체하기에 이르는 가상

아이돌 챰의 마지막 콘서트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미마는 "언제나 미마의 방을 지켜보고 있어"라는 팬의 외침을 듣는다. '미마의 방'이 인터넷 홈페이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미마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적어 놓은 '미마의 방'을 보고 신기해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사소한 습관과 말버릇, 오늘 마트에서 어떤 우유를 샀는지까지 기록되어 있다. 누군가 미마를 사칭해가며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


수위 높은 연기와 노출을 감행하면서 미마는 아이돌로서의 자아와 작별한다. 하지만 미마의 방 자꾸 이런 글이 올라온다. "사실, 하고 싶지 않았어. 억지로 했을 뿐이라고. 여러분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최고야" 어쩌면 억지로 배우의 탈을 쓰고 의연한 척하는 자신보다 '미마의 방' 속의 아이돌로 남아있는 미마가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미마. 이내 가상의 아이돌 미마는 현실에 침투해 진짜 미마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종종 본질은 현실에 존재하며 가상은 가짜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위계를 나눈다. 하지만 가상은 현실을 한참 뛰어넘었다.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는 '가짜'라는 간단한 단어로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우리는 매스미디어에서 실제가 아닌 만들어진 허상만을 접하며 우리 스스로도 SNS를 통해 현실을 도려내고 발췌해 달콤한 이미지만을 공개한다. 평소 독서를 하지 않는 친구가 어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책 읽는 포즈로 100장의 사진을 찍는 걸 본다.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체면보다 중요하게 될 때, 이미지는 실제를 대체해 본질을 무색하게 만든다.

폭력적인 시선, 그 시선의 대상

미마를 나락으로 몰아넣은 건 철저하게 시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위치다. 영화는 90년대 일본 연예계를 반영해 여자 연예인이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기획사 사장은 가수가 되기 위해 동경으로 올라온 미마를 배우로 전향시키고, 시나리오 작가는 미마의 노출을 이용해 시청률을 올린다. 사진작가는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누드 촬영을 요구하고 미마는 항상 남들의 시선을 받는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 이런 흐름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드라마를 위해 강간 신을 촬영하는 장면은 중간중간 감독의 컷 소리가 울리고, 상대 배우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미마의 저항은 연기가 아니다. 구조적인 착취의 늪에 빠져 정신적 폭력을 고스란히 입게 되면 촬영이 끝나도 피가 멈추지 않는 상흔이 남는다. 수많은 카메라는 그녀를 객체에 위치시키며 그녀의 주체성을 파괴한다. "언제나 미마의 방을 지켜보고 있어"란 팬의 말이 소름 끼치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4건의 살인사건에서 희생자는 모두 미마를 성적으로 이용해 이익을 취하거나 개인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살해당한 게 아니라, 욕망을 담아 미마를 바라본 두 눈이 송곳으로 찔렸다.. 영화는 무엇이 '진짜'이고 진범은 누구인가? 에 초점을 맞추며 전개되지만 지금까지도 화두가 되는 권력관계에 의한 착취와 매스미디어 속 시선에 대한 회의, 여성의 성적 대상화 문제를 선명하게 조명한다.

미마의 매니저, 루미의 존재

영화의 후반부에서 범인은 다름 아닌 미마를 알뜰히 챙기던 매니저 루미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루미는 미마가 아이돌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함께하며 자신이 젊었을 적 이루지 못한 아이돌의 꿈을 투영해왔다. 미마의 방에서 가상의 자아를 만들고 자신이 진짜 미마라는 망상에 이르며 도달할 수 없는 페르소나를 향해 애쓰는 모습은 소름 끼치게 측은하다.


미마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가해자가 여성인 루미라는 점은 흥미롭다. 시선을 던지는 가해자 남성, 대상이 되는 피해자 여성의 이분법적 대치 구조가 아닌, 매스미디어와 함께 하는 현대사회에 '시선'의 폐해가 여성에게도 나타남이 드러나는 것이다. 루미는 아이돌이 받는 대중의 시선을 갈망한다. 스포트라이트와 관심을 목말라한다. 하지만 루미가 그토록 바랬던 아이돌의 자리 또한 만들어진 이미지로만 사랑받을 수 있는 손바닥 위의 인형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루미가 미마의 무대의상을 입고 처절하게 허덕이며 미마의 자리를 탐내는 모습은 현대의 구조화된 폭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시선의 폐해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장면이다.

현실에 침투하는 가상이란 영화 속 설정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된다. 날로 비대해지고 분화되는 사이버 자아는 현실과 구분 지어 '가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일까? 트위터 자아, 블로그 자아, 인스타 자아가 다르다. 이들을 현실과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익명성을 빌려 어느 때보다 솔직해지기도,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에 실상을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쓰기도 하니까 말이다.


영화에서 처럼 우리는 때때로 폭력적인 시선의 주체가 되다가도 스스로를 자유롭게 불특정 다수에게 시선의 대상으로 내놓기도 하며 "괜찮아, 환상이 실제가 되진 않아"라는 이미 무효해진 주문에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되었다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반감되는 영화는 아니니 곤 사토시 감독의 1997년 작 '퍼펙트 블루'를 보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조명해야 하는 착취와 대상화 문제 또한 마주해보길 바란다.


송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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