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혹은 공생 - 모노노케 히메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알아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중 <모노노케 히메>를 가장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원령공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종교관, 에코 페미니즘, 자연과 인간의 본성 등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제의 이야깃거리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또한, 가볍지 않은 내용과 걸맞게 매우 현실적인 결말을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자연을 지키려는 '산'과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에보시'
<모노노케 히메>는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는 출신 불명의 농인과 상인층의 사회진출이 가능하게 된 시기이다.
사회적 변화로 인해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인간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구세력이 몰락하고 신세력의 등장하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즉,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숲을 침범한 인간들에게 버려져 들개 신들과 함께 자연에서 자라온 산(모노노케 히메)은 개인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범람하는 인간을 증오한다.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임을 부정하며, 자연의 신들과 공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타타라 마을의 군주인 에보시는 마을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 숲을 파괴하며 얻은 철로 문명의 과도기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자립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연에 대한 원한이나 악의를 품은 것은 없다.
인간으로부터 무조건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자연을 보호하려는 산과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에보시. 이 둘의 대립은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갑고 날카롭다. 소통이나 타협을 하려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가치관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팽팽한 싸움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중재하는 '아시타카'
어느 날, 에미시족의 마을에 재앙 신이 나타나 마을을 위협한다. 재앙 신은 원한을 품은 채 죽은 자연의 신을 의미한다. 아시타카는 에미시족의 후계자로서 마을을 위협하는 재앙 신과 맞서 싸운다.
그는 끝내 재앙 신을 쓰러트리고 마을을 지켰지만, 결투 끝에 생긴 오른쪽 팔의 상처에 재앙 신이 내린 죽음의 저주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저주를 풀기 위해 재앙 신의 탄생 이유를 찾아 서쪽의 숲으로 떠나는 과정 중 산과 에보시를 만나게 된다.
싸움의 희생자이자 중재자인 그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바라본다. 어느 한 편에 치우쳐진 의견을 내세우기 보단,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날, 환경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生きろ。そなたは美しい。"
"살아야 해. 넌 아름다워."
아시타카는 자연을 대변하고 있는 산에게 인간으로 인해 망가지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장면은 <모노노케 히메>의 팬들에게도 굉장히 인기가 많은 명장면이기도 하다. 고통으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문제를 직면하였을 때 도망치지 말고, 맞서 해결하라는 메시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공존 혹은 공생,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인간은 자연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느냐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달라진다.
"アシタカは好きだ。でも人間を許すことはできない。"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それでもいい。サンは森で私はタタラ場で暮らそう。共に生きよう。"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살아. 난 타타라 마을에서 살게. 함께 살아가자."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산과 아시타카는 각자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한다. 동시에 아시타카는 산에게 함께 살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단지 지구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공존관계가 아닌,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공생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인간과 같이 의지를 갖고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의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자유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연은 인간과의 공생관계에 협력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물리적 거리감을 둔 공생관계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가끔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협력관계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충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연과 인간은 어떠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생각의 장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현재 자연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공존 혹은 공생. 누구도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순 없을 것이다. 인간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자연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생관계를 맺는 과정은 꽤나 복잡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과 아시타카처럼 자연과 인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게 될 때에 진정한 공생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송아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