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카소'의 타이틀을 거머쥔 미국의 천재 예술가 - 장 미쉘 바스키아
성공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감당 못할 정도로 엄청난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정작 본인의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던 한 예술가가 있었다. ‘검은 피카소’, 혹은 ‘미국의 고흐’라 불리며 천재 루키라는 칭송을 받았던 그의 이름은 장 미쉘 바스키아이다.
27살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며 높은 경매가로 낙찰되고 있다. 그의 그림자로 가득 찬 얼룩진 인생 역시 낙찰가들에게는 ‘불운의 천재예술가 인생 스토리’로 회자되며 그의 작품의 몸값을 올리는데 한몫하고 있다.
만약 그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스스로를 성공한 예술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쟝 미셸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 미국 1960. 12. 22~1988. 8. 12. |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성장기
아이티 출신의 이민자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스키아.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미술관을 다니거나 여러 외국어를 공부할 정도로 교육열이 뛰어난 집안에서 나름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며 떨어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는 점점 엇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피할 수 없었던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성장함에 따라 점차 느끼게 되며 현실의 암담한 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유년시절은 빛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했던 셈이다.
Sans titre(crown) 1988년 |
피카소처럼 되기로 결심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갔던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봤던 <게르니카>의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한 그는 언젠가 그와 같은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며, ‘Same Old Shit’의 줄임말인 ‘세이모(SAMO)’라는 크루를 결성하며 뉴욕 소호 거리 일대의 담벼락을 스프레이로 알록달록 채워 넣기 시작한다.
이것이 꽤나 큰 유명세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더 유명해지고 싶었던 바스키아와 얼굴 없는 화가로 남고 싶었던 친구 디아스는 결국 대립을 일으키게 되었고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해체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유명세에 목말랐던 그는 다양한 길을 모색하다 1980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우리에게 팝아트의 대가로 친숙한 앤디 워홀이다.
Payer 1984년 |
Dari Milk 1986년 |
앤디 워홀 덕에 유명인이 되다?
앤디 워홀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에서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타고난 스타성과 재력을 이용하여 당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사하고 있던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며 그를 본인의 스튜디오에 자주 불러 작업을 하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는데 성공하였다.
훗날 워홀보다 높은 몸값에 작품이 팔리기도 하였던 것을 보면 스승보다 성공한 제자라는 타이틀이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림은 나날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어 나가기 시작하였고, 미국 예술계에서 바스키아는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는 유명인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유명한 화가 타이틀을 너무 빨리 가진 탓인지, 목적을 이룸과 동시에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탈함을 느낀 바스키아는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워홀을 등에 업고 큰 이 젊은 예술가는 동시에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며, ‘워홀의 동성 애인이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한 희생양이다’ 등의 온갖 루머에 시달린 끝에 결국 본인의 스승이자 조력자와 결국 멀어지게 되는데, 그러다 몇 년 후 워홀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들은 바스키아는 더는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다 결국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화려한 대형 루키의 씁쓸하고도 갑작스러운 결말이었다.
Autoportrait 1984년 |
사후에도 멈추지 않는 유명인의 길
하지만 그의 죽음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높은 가격에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무제>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248억 원에 낙찰되며 미국 작가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하였다.
피카소처럼 유명해지고 싶었던 바스키아. 원하는 대로 큰 유명세를 가졌으며,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가를 달리는 예술가 반열에 오르게 된 그가 오늘날 이 모습을 본다면 본인의 입지에 만족할지, 아니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날이다.
전수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