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덜어냄의 미학
"나는 낙엽이 참, 부럽다."
가을이다. 엄청나게 더웠던 가을이 가고, 갑자기 덮쳐온 추위가 지나가고 이제야 비로소 가을다운 온화한 날씨가 찾아왔다. 친구와 야심차게 성곽 길 산책을 계획했던 날, 비가 올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에 행선지를 미술관으로 바꿨다. 하지만, 자주 그러하듯 기상청의 예보는 실제 날씨에 대한 반어법이란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비는 커녕, 맑기만 한 하늘에 선선하기까지. 정말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이 날씨에 실내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 없다 판단한 우리는 경복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덕분인지, 올해는 단풍이 눈부시게 선명했다. 고즈넉한 궁궐에서 산책을 하면서, 바쁘게 캠퍼스를 오가며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단풍을 천천히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가을 날씨, 가을 햇살, 가을 낙엽까지 오롯이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서울을 뒤덮은 미세먼지 덕분에 푸른 가을 하늘은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가을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참 많다. 독서의 계절, 남자의 계절, 고독의 계절, 살찌는 계절, 풍요로움의 계절 등, 가을은 다채롭게 물드는 단풍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가을을 지칭하는 여러 빛깔 중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빛깔 하나는 '덜어냄의 미학'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낙엽을 생각해보자. 낙엽은 봄에 새로 돋아난 잎이, 여름을 거치면서 푸르게 성장한 후, 떨어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의미는 제 역할을 다한 잎이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땅으로 떨어진 잎은 -물론 도시에서는 대부분 환경미화라는 명목으로 쓰레기통으로 향하지만- 다시 봄에 잎을 틔우기 위한 원동력이 된다. 즉 잎이 떨어지는 과정은 봄, 여름 동안 제 역할을 다한 잎이 은퇴하는 과정이자,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의 준비과정이며, 봄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한 재정비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새로운 도약을 위한 휴식과 점검의 시간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현대인들은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특히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정치 문제로 시끄러울 뿐더러 각자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도 해결하기 벅차다. 24시간 정신을 흐트리는 카톡소리에, 매일 쏟아지는 정보들,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사회, 그 안에서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오죽하면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유행할까 싶다. 나만 해도 욕심 많은 성격과 더불어 취직을 위해 요구되는 스펙채우기에 대학 생활이 정신이 없다. 대학 생활 3년동안 나를 비롯해서 학기 중에 규칙적으로 8시간 자는 친구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너무 많은 정보와 할 일과 싸워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는 시간까지 쪼개야한다.
그래서 한 편으론, 떨어지는 낙엽이 참 부럽다. 낙엽은 자신이 떨어져야 할 때,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누가 민 것도 아니고 억지로 잡아당기지도 않는다. 그저 때가 될 때 투-욱,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나무는 월동 준비를 하고 더 나아가서 봄에 새로운 잎을 틔울 준비를 한다. 정리와 재점검의 시간,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무가 그러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나를 뒤돌아보고 위치를 점검할, 그리고 부지런히 달려온 만큼 다시 회복할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와 달리, 제 의지로 제 때에 그 시간을 갖기가 힘들다. 나무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휴식에 대해 인색하다. 하물며 '내'가 휴식을 하고 싶어라도 주변에서 눈총을 준다. "쉬는 만큼 너는 뒤쳐지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나는 떨어지는 낙엽이,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가 참 부럽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덜어내기'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식과 재점검의 시간은 뒤쳐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이다. 우리 모두가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처럼 덜어내기에 인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휴식하고 재점검하는 시간이 게으름을 부리는 시간으로 눈총받지 않아야한다.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중에서 -
*방하착(放下着) : 내려놓다, 마음을 비우다 라는 뜻의 불교 용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참, 낙엽이 부럽다."
글.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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