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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지략가' 며느리 간택이 인생 최대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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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젊은 시절 한양 3대 기생이라 불리던 춘홍의 집에 드나들다가 금군병장 이장렴과 술자리에 동석하게 됐다. 별것 아닌 일을 놓고 말싸움이 벌어졌는데, 이장렴이 흥선군에게 "나는 왕의 친병(親兵)을 거느리는 종2품 무인으로서 기생집에서 술이나 마시는 종친을 공경할 일이 없소"라고 불경스럽게 말했다. 이에 흥선군이 "어찌 감히 왕실 종친한테 무례하게 구느냐"고 심하게 꾸짖자 이장렴이 흥선군의 뺨을 올려붙였다.


후일 대원군이 집정(執政)했을 때 이장렴이 인사 드리려고 운현궁으로 찾아왔다. 대원군은 그를 불러들여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대는 아직도 내 뺨을 때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이장렴은 "그때 일은 죄송하기 짝이 없으나 대원위 대감께서 그때처럼 말씀하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가까운 시일 안에 춘홍이 집에 가자고 할 참이었는데 자네가 무서워서 못가겠구나"라며 웃었다. 이장렴은 그 뒤 금위대장, 강화유수 등을 지내며 평생 대원군의 심복이 되었다.


윤효정이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러 버전으로 널리 알려졌다. 세도정치 권력자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하던 대원군의 위장(僞裝)과 대범함, 사감에 연연하지 않고 인물을 중용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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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하응이 그린 대원군 초상화 5점은 초상> 5점은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한철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2006년 12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99호로 지정되었다.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마을을 지나 좁은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철제 문이 막아선다.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문 옆으로 들어가 개망초와 돼지감자, 칡이 무성한 산자락을 따라 500m가량 올라가면 흥원(興園)이 나타난다.


대원군 무덤 비석엔 일본인 글씨


흥원에는 '의미(意美)'라는 사람이 쓴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비석이 서 있다. 국태공은 대원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의미(意美)'는 1898년 조선 거류 일본인들이 세운 남산대신궁의 신직(神職) 미야케 오미(三宅意美)였다. 찜찜하지만 이것도 역사의 자취다. 1907년 고종황제의 생부(生父)인 대원군은 대원왕(王)으로 추봉돼 묘가 아니라 원(園)이 맞는다. 경기도에서 세운 안내판은 ‘흥선대원군 묘’라고 표기돼 대원군에 대한 평가가 완결돼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흥원의 신도비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에는 파주에서 6·25전쟁 때 맞은 총탄 자국이 많다. 후손들이 대원군 묘역 일대를 경기도에 기부채납하면서 경기도는 역사공원 조성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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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 옆에 조성된 납골묘에는 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조부 은신군(정조의 이복동생)과 장손 이준용, 손자 이문용, 증손과 고손 부부가 들어 있다. 가족 납골묘에서 숲을 헤치고 20m가량 올라가면 궁중의 기단석으로 만든 계단 위에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의 묘가 나타난다.

대원군의 묘는 두번 옮겨 다니다 남양주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1898년 운현궁의 별장 아소당(我笑堂) 뒤뜰에 묻혔다. 지금의 마포구 염리동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자리다. 고종은 1906년 흥원(興園)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에 다시 조성했다. 1966년 파주 흥원 근처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자 후손들이 현재의 경기도 종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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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에는 세 명의 대원군이 있었으나 두 명은 죽은 후에 추존됐다. 흥선군만 살아서 대원군이 돼 10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의 섭정을 했다. 그가 장남 이재면 대신에 차남 이재황을 왕(고종)으로 세운 것은 섭정을 맡아 세도정치의 적폐를 청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잠재적 왕위 계승자로 지목 받던 이하전이 안동 김씨들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국문을 받고 사사(賜死) 당한 사건이 이하응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하전은 너무 똑똑하고 기가 세서 독배를 마셨다. 세도가들에겐 나무꾼 강화도령(철종의 별명)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왕이 필요했다. 이하전이 살아생전에 철종을 찾아가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입니까, 안동 김씨의 나라입니까”라고 직언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이하전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줬다.


원(園)을 묘라고 잘못 표시도


흥선군 파락호 시절에 안동 김씨의 애경사마다 얼굴을 디밀었다. 김병기 등 몇몇 안동 김씨들은 초라한 왕족에게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그 시절에도 세도가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지 않고 김병학, 김병국과 연줄을 만들고 집권한 후 중용했다. 밖에서와 달리 일단 집안에 들어서면 둘째 아들 재황에게 엄하게 왕도(王道)를 가르쳤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 대비를 수시로 문안해 교류를 이어갔다. 철종이 죽으면 후계 지명권을 조 대비가 갖고 있었다. 철종은 원래 병약한 데다 주색을 좋아해 건강이 악화됐다. 후사도 없었다. 철종의 임종을 지켜본 조 대비는 재빨리 옥새를 챙겨 흥선군의 적자인 둘째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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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망국에는 대원군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 문물을 도입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로 갈 때, 조선은 빗장을 걸어잠갔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의 승전고를 울리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유림의 호응을 얻었으나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다가섰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매관매직을 했고 무리한 세금 부과로 원성을 샀다.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준 뒤에는 며느리인 민 황후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민 황후의 죽음에 그가 연루돼 있다.

고종이 22세가 되었는데도 그는 섭정의 권력을 내놓지 않고 있다가 유학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밀려났다. 대원군은 그 뒤에도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달, 1895년 을미사변 이후 4개월가량 권력의 실세로 등장했다.

​1882년 구식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했지만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고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압송했다. 그는 톈진 보정부(保定府)에서 4년 동안 유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정황이 바뀌어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러시아, 일본과 가까워진 명성황후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민 황후는 원래 대원군 부인의 사촌여동생이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 왕족으로서 외척(外戚) 세도의 폐해를 뼈저리게 체험한 대원군은 부인의 사촌동생이자 천애고아 같은 민 황후를 며느리로 선택했다. 그런데 민 황후는 타고난 영특함과 통솔력으로 남편과 궁중을 장악하고 정치적 야욕과 힘을 드러내면서 시아버지와 대립했다. "귀신은 속여도 대원군은 못 속인다"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지략이 뛰어난 그였지만 며느리 간택은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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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패들이 경복궁을 침범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대원군은 일본인들이 '여우 사냥'이라고 부른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준 혐의가 있다. 미우라 공사가 제시한 을미사변 관련 문서에 서명했고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가 죽어 마땅하다"는 고유문(告由文)을 발표했다.

대원군은 일본을 싫어했지만 일본을 이용해 민 황후를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민 황후가 청나라 군대를 동원해 대원군을 톈진에 4년 동안 감금했듯이, 대원군은 민 황후를 치는 데 일본군을 이용한 것이다. 대원군은 다시 섭정을 맡았고 장남 이재면은 친일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이 됐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넉 달 만에 권력을 잃었다.

대원군에게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도 많다. 왕가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혁파했다. 조세와 군역을 면제받는 특전을 누리면서 사색당파의 소굴로 변한 전국의 서원 650여개 가운데 47개만 남겨놓고 철폐했다. 세도정치의 기반이었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시켰다. 안동 김씨가 독직하던 요직에 4색을 골고루 등용했다. 문란해진 환곡제도를 바로 잡고 호(戶) 단위로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시행해 양반 사족의 신분적 특권을 배제했다. 통치 질서의 근간이 되는 법전을 정리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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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1850년 추사 김정희와 교유를 시작해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예술적 인연을 이어갔다. 김영기는 ‘조선미술사’에서 ‘석파(石坡) 이하응이 김정희의 완당(阮堂)체로 행서와 예서를 잘 쓴다’면서도 난(蘭) 그림에 대해 "그림 자체보다는 대원군의 위상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평가했다. 이하응의 석파란이 자기 세계를 갖춘 것은 1874년 권력에서 물러나 양주 직곡에서 은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10년 섭정 후 물러나서 며느리와 추한 권력다툼을 하지 않고 서화의 세계에 침잠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일본, 러시아, 청나라 3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놓고 경합할 때 대원군이 아들, 며느리와 사이가 좋고 소통이 잘됐더라면 명성황후의 참혹한 죽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흥선대원군의 일생은 극적 요소로 점철돼 소설,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됐다. 소설로는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과 유주현의 ‘대원군’이 있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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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흥원과 홍릉사람들, 남양주문화원, 허철·김인규

2.대한제국아 망해라(원제 풍운한말비사), 윤효정 지음·박광희 편역, 다산초당

3.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성, 이민주, 동학연구 제11집

4.왕조의 유산 속에 근대의 교량을 넘어서지 못한 대원군, 장영숙, 내일을 여는 역사 Vol. 23

5.흥선 대원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연갑수, 내일을 여는 역사 Vol.23

6.이하응, 격정의 시대를 뒤흔든 절창, 최열, 내일은 여는 역사 Vol.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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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hht1123@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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