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복역한 독립운동가는 왜 ‘양복 수선공’으로 남았나
박희광 선생 동상을 구미 사람들은 가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
구미 금오산도립공원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 보면 금오지가 끝나는 길목에서 금빛 동상 한 기를 만날 수 있다. 저수지를 등진 채 금오산을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들고 있는 입상은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듯하다.
더러 박정희로 오인되는 박희광 선생 동상
동상 아래 세로로 새긴 한자 휘호가 있지만, 으레 그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여기는 구미사람들도 적지 않다. 휘호를 쓴 이는 박정희지만, 동상의 주인공은 박희광(1901~1970) 의사다. 그는 일제강점기 펑톈성에서 보민회와 일민단 등 친일 부역자 숙청작업을 담당한 독립운동가다.
박희광은 박정희(1917~1979)보다 16년이나 연상이니 동년배라고 하기는 어렵다. 두 사람의 생애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잠깐 겹친다. 박정희가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신징 군관학교) 2기생으로 수학하던 시기(1940~1942)에 박희광은 뤼순 감옥(현재 다롄시)에서 16년 넘게 복역 중인 무기수였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에 편입학해 수학하던 시기(1942~1944)에 박희광은 뤼순 감옥에서 출옥(1943)해 임정이 있던 충칭으로 가려다가 실패, 고향인 구미로 돌아왔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은 만주 지역에 머물렀지만, 그 삶의 궤적은 극단으로 갈린 것이었다.
이름을 상만으로도 쓴 박희광은 구미 봉곡동 출신으로 박윤하의 아들이다. 경술국치(1910) 이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는데 일가가 만주로 이주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부친 역시 의병으로 활동했다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체포 당시 상황을 보도한 1924년 7월 26일 자 독립신문 기사. 왼쪽 사진의 ‘박상만’이 박 의사다. |
재판기록이 실린 1924년 9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 자료를 근거로 1968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
박희광은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부터 오동진(1889~1944) 휘하 통의부에 들어가 제5중대에 배속돼 친일 세력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특공대원 임무를 맡았다. 그는 김병현(?~1926, 1995 애국장), 김광추(?~1924, 1996 애국장)와 함께 수행한 암살 임무로 뒷날 재판 과정에서 ‘3인조 암살단’으로 불리었다.
1923년에서 1924년까지 그는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만주 철도 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서 일본군 공격 작전에 참가했다. 1923년 다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924년 6월에는 푸순 방면의 밀정이며 뤼순 조선인회 서기 정갑주 부자를 주살했다.
19년간 뤼순감옥에서 복역한 장기수
세 사람은 표적 인물의 집 대문에 사형선고문을 붙인 뒤 거사를 벌여 거사가 친일 부역자에 대한 응징임을 분명히 했다. 1924년 6월, 세 사람은 만주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일제 앞잡이였던 보민회장 최정규(1881~1940)의 집을 습격,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을 사살했다.
최정규는 만주 보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단체의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밀고와 살상을 감행한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선 공로로 일본 외무성에서 위로금 1,000원을, 1924년 보민회 해산 당시엔 배당금으로 1,500원과 위로금 1만 원을 받은 악질 부역자였다.
1924년 7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폭탄을 펑톈의 일본 총영사관에 투척했으나 불발돼 실패했다. 그날 저녁, 이들은 고급요정 금정관에 침입해 주인에게 군자금을 요구해 300원을 탈취했다.
그러나 집 밖에 세 사람의 낌새를 눈치채고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광추가 총을 맞아 절명했고 박희광은 김병현과 함께 체포됐다. 일경은 증거물로 권총 세 자루, 실탄 160발, 폭탄 한 개, 사형선고문 여러 장을 압수했다.
동상 주변 구조물에 부조된 ‘삼인조 암살단’. 중앙이 박 의사다. |
조사과정에서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일경은 대나무 껍질을 얇게 깎아서 이들의 엄지손톱 사이에 쑤셔 넣었고, 뻣뻣한 돼지 목털로 귀두를 찌르는 잔인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고문은 쉴 틈도 없이 이어졌다.
박희광은 뤼순지방법원의 제1심에서 사형을, 뤼순고등법원에서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갇혔다. 뤼순 감옥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처형(1910)되고,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이 수감 중 순국(1932)한 곳이었다. 동지인 김병현도 1926년 처형돼 순국했다.
박희광은 이 감옥에서 1924년부터 1943년까지 19년을 복역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는 22년 2개월(1923~1945)을 복역한 박열(1902~1974) 의사 다음 가는 장기수일 것이다. 실제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들은 형기가 끝나기 전에 순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박희광은 일왕 히로히토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으로 최장기 복역 후 출옥했다. 그는 충칭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고향인 구미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마흔넷의 만혼으로 아내를 맞이했고 광복을 맞았다.
박희광(1901~1970) 선생.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해방 조국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돼 있었으나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는 귀국한 백범 김구를 찾았으나 백범은 위로금을 주면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이 불의의 총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의 기다림도 무위로 돌아갔다. 실제로 20대에 투옥돼 40대가 돼 출옥한 그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양복 수선하며 생계 꾸린 독립운동가
박희광은 감옥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대구 교동시장에서 양복점을 열었으나 시장에 일어난 화재로 가게와 생업 기반을 잃었다. 고향인 구미로 돌아온 그는 양복 수선으로 5남매를 기르며 가난하게 살았다. 만주에서 삼인조 암살단으로 이름을 떨치던 독립운동가가 양복을 짓고, 수선하면서 살아야 했던 세월은 꽤 길게 이어졌다.
1967년 초 뤼순지방법원의 재판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발견되면서 그는 1968년 삼일절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보훈 대상자가 되면서 생활이 다소 나아졌으나 그는 1970년 1월 22일 일제 고문 후유증으로 서울 원호병원에 입원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박희광은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자 묘원에 묻혔다.
고향인 선산에서 박희광 기념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이태 후인 1972년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다가 1983년 구미문화원 사업으로 착수해 이듬해 12월에 동상을 제막했다. 사후 14년 만이었다.
참석자들이 ‘독립군가’를 제창할 때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의 회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복무했던 아흔여섯 고령의 배선두(1990년 애국장) 선생. 그는 경상북도의 마지막 생존 독립운동가다. |
동상 주변의 기록에 따르면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愛國志士 朴喜光 先生 之像’(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지상) 친필 휘호와 동상 건립비 ‘壹百萬圓(일백만 원)’을 ‘하사’하면서 동상 조성에 들어갔다.
박희광 의사가 만주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돌 기단을 딛고 서 있는 이유다. 친일파를 응징하다가 뤼순감옥에서 19년을 복역했던 이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이 일본 육사를 나온 만주국 장교 출신 인물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올해 1월 22일, 박희광 선생 동상 앞에서 박희광 선생 50주기 추모식이 진행됐다. 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공동 주최한 행사다. 유족과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추모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보훈처장과 민족문제연구소장 등이 보내온 화환이 동상을 둘러싸 쌀쌀한 날씨를 녹였고, 광복회 간부들과 함께 지역 정치인들도 참석해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렸다.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장세용 구미시장은 시 간부를 대신 보냈다.
무엇보다도 충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복무했던 아흔여섯 고령의 배선두(1990년 애국장) 선생이 자리를 빛내줬다. 1943년 6월 일제에 징집돼 중국 난징의 일본군에 배속됐다가 1944년 3월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했던 그는 경상북도의 마지막 생존 독립운동가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의 이수연 지회장은 인사말에서 “조국과 민족이 있어야 우리가 존재 할 수 있으며 조국 산하가 없으면 떳떳한 국민이 될 수 없다”라는, 박희광 선생이 생전 남긴 말씀을 환기해줬다. 그것은 이 추념이 한갓진 행사가 아니라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이 돼야 한다는 뜻일 터였다.
직썰 필진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