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돌’에 터진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논란
에키타이 안, 일제 이어 나치에도 협력한 사실 확인
안익태(1906~1965). 최근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그는 다시 소환되고 있다. |
최근 이해영 한신대 교수(57·국제관계학부)가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라는 책을 펴내면서 새삼 지난 10여 년 동안 논란이 돼온 친일 음악가 안익태가 재소환되고 있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자이기 전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일본 정신이 담긴 음악을 만드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친일 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다.
새롭게 소환되고 있는 안익태
우리 세대가 안익태(1906~1965)를 애국가의 작곡자로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시절이었던 듯하다.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도 그 작사·작곡자가 궁금해지는 일은 좀체 없다. 그러나 그 시절 애국가를 만든 이가 안익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산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는 점과 함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그 소식은 더벅머리 고교생들을 얼마간 고무한 것 같다. 글쎄, 애국가라면 여느 대중가요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애국가를 만든 이가 유럽에서 꽤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였고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스페인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마요르카섬엔 ‘안익태 거리’가 있다… 어쨌든 그건 국가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그럴듯한 서사가 아닐 수 없었던 거다.
안익태의 친일 전력이 드러난 것은 2006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에 의해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필 지휘 영상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이 발표는 국내 음악계를 이른바 ‘멘붕’ 상태로 만들었다.
문제의 영상은 1942년 9월 옛 베를린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열린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안익태가 베를린대학 방송관현악단과 라미(Lamy) 합창단을 지휘해 그가 작곡한 ‘만주환상곡’을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10분 정도의 연주가 이뤄지는 동안 무대 뒷막 한가운데 걸린 커다란 일장기로 그 음악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친일인명사전>은 이 음악회를 위해 안익태가 의뢰받아 만든 곡이 바로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큰 관현악과 혼성 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만주환상곡’·’만주축전곡’)이라고 전한다. 이 작품은 만주국 건국을 경축하고 그것을 주도한 구원자 일본이 되찾은 평화와 만주국을 통해 이뤄지는 세계 신질서 확립을 일관되게 찬양하는 것이었다.
애국가 악보. 1936년께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안전부 |
안익태의 이러한 일련의 친일 행적은 대부분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사실이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는 이를 매우 세밀하게 추적해 확인된 사실로 그의 행적을 재구성했다.
‘에쿠라텐’과 ‘만주환상곡’으로 국제 음악인으로 부상
‘만주환상곡’의 마지막 악장 피날레에서의 합창 부분의 가사는 만주국 공사 에하라 고이치가 쓴 것이었는데 이해영 교수는 위 책에서 에하라가 일본 스파이였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유럽에서의 안익태 활동의 배경으로 에하라가 “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고 독·일협회는 그를 후원하거나 연주회를 주최했다”고 봤다.
평양 출신의 안익태는 일본에 유학할 때는 안에키타이(あんえきたい)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에키타이 안(Eak-tai Ahn)으로 활동했다. 안익태는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중학교를 거쳐 도쿄 구니다치(국립) 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던 안익태는 1937년 유럽으로 건너갔고 1938년 2월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으로 나중에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지게 되는 자작곡 ‘교향적 환상곡 조선(Sinfonie Fantastique Korea)’의 초연을 지휘했다. 같은 해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Etenlaku, Phantasie fur Orchester)'를 발표했는데 그는 1959년 이 작품을 ‘강천성악’으로 개작했다.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1878년 이후부터 근대 일본창가로서 「남조 오충신(南朝 五忠臣)」이나 「충효」(忠と孝) 등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일본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 <친일인명사전>
아마 그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 작품을 창작한 듯하다. 이후 안익태는 ‘에텐라쿠’를 로마방송오케스트라 연주회(1939)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1940), 독·일협회 빈 지부 주최의 빈심포니 연주회(1942) 등에서 자신의 지휘로 연주했다.
안익태가 유럽에서 국제적 음악인으로 부각된 것은 1941년부터 독일 베를린에 진출한 뒤부터다. 그는 베를린에서 나치 제국의 제국음악원(Reichsmusikkamer) 총재이자 협력자였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조우하게 된다. 이후 독·일협회 후원으로 관현악단 지휘와 작품 발표를 활발하게 해나간다.
그 전 해에 R.슈트라우스는 일본이 독일 정부에 요청한 ‘황기 2600년 기념 봉축 음악’인 ‘대관현악을 위한 일본 황기 2600년에 붙인 축전곡(‘일본축전곡’)’을 작곡했다. 같은 해 12월 도쿄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1942년 3월, 빈에서 독·일협회가 제안하고 슈트라우스가 추천해, 안익태가 지휘하는 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에텐라쿠’와 함께 공연됐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만주국 공사 에하라 고이치(江原耕一)와 지휘자 안익태, 그리고 R.슈트라우스와 독·일협회는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 <친일인명사전>
안익태가 유럽에서 머물렀던 베를린의 집 ⓒ위키백과 |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이를 연주한 것은 이 시기였다.
“안익태는 피날레 악장을 두 개의 주요 합창작품으로 구성해 극적으로 장식했는데, 이 작품들은 나중에 「한국환상곡」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개의 합창곡 중 ‘애국가’를 제외한 두 개의 합창곡에 똑같이 옮겨졌다.” - <친일인명사전>일제의 침략전쟁으로 건국된 괴뢰국가 만주국 찬양에 쓰인 음악을 그는 조국 독립 이후에 생광스럽게 활용한 셈이랄까. 이후 1943년 2월 빈에서 ‘만주환상곡’을, 같은 해 5월,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연주회에서도 그는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을 연주했다. 이 연주회는 일제에 의해 신징 중앙방송국을 통해 국내에도 방송됐다.
1943년 7월, 안익태 나치 제국음악원 정회원이 되다
1943년 7월에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정식 회원이 됐다. 회원번호는 RKK A 115. 극동에 있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 청년이 마침내 나치의 제국음악원 회원이 된 것은 그가 동시대에 오를 수 있는 입신양명의 정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안익태가 지휘한 연주회들은 거의 모두 “나치 독일과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지역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활동의 정점을 찍는다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의 연주회도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던 1944년 열렸다”고 한다.
제국음악원은 나치 시절 괴벨스가 주도한 ‘음악가 조직’이었다. 안익태가 여기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교관으로 포장한 베를린 지역의 첩보 총책’ 에하라 덕분이었다는 게 이해영 교수의 주장이다.
이후 프랑스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피신해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그는 종전 뒤인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가를 국가로 공식 지정했다. 안익태는 1949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아환상곡’을 지휘했고 1952년 7월부터 8월까지는 멕시코를 순회하며 연주했다.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으로 일제에 협력하면서 유럽에서 탄탄한 지위를 굳혔던 그는 ‘코리아환상곡’으로 독립 조국에 자신의 건재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25년 만에 이승만 탄신 음악회 지휘차 귀국
안익태는 195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 지휘차 귀국했고 4월에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는 5년 뒤 이승만의 ‘탄신 85회 음악회’ 지휘를 위해 다시 귀국한 바 있다.
1962년에는 박정희를 예방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 실제 이 음악제는 1964년까지 세 차례 열렸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추적해 다룬 책(삼인, 2019년) ⓒ이해영 |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안익태는 1953년께 이승만에게 ‘워싱턴 대사관 문화 참사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한 정황이 있고 1958년에는 ‘한국환상곡’을 뮤지컬 영화로 만들려는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는 게 뒷날 드러나기도 했다. 그는 나치 제국 시절의 유럽에서 주류 음악가로 살았던 것처럼 독립 조국에서도 주류로 살고 싶었던 듯하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은 그가 국내가 아닌 국외, 유럽에서의 음악 활동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는 홍난파(1898~1941)나 현제명(1903~1960) 등 국내에서 활동한 음악인들처럼 일제에 직접 부역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들처럼 조선음악협회를 통해 “직능으로 체제에 부응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활동을 주도할” 필요가 없었다.
연주활동 뒤에 숨어 일제 침략전쟁 선전
홍난파처럼 “’팔굉일우’(‘세계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 하에 있다’)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해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하지 않아도 현제명처럼 “징병제 시행을 기념하고 경축”하고 출진학도 격려대회에서 ‘우리들은 부르심을 받자왔다’는 노래 따위를 독창하지도 않아도 됐다.
그러나 대신 그는 교향곡이라는 음악 장르와 그 연주 활동 뒤에 숨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우회적으로 선전·선동했다. 천황제 국가 일본의 구미에 맞는 배경과 내용의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을 통해 그는 마침내 나치의 제국음악원의 정회원이 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벌인 연주 활동을 통해 한국인의 예술적 역량을 두루 홍보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유럽 활동 시절에 일본인 에키타이 안(Eak-tai Ahn)으로 살았고 마요르카에서 귀화해 스페인인으로 죽었다.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안익태 재단의 해명이 구차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30년 조국을 떠난 그는 25년 동안 고국을 찾지 않았고 굳이 일본 국적을 가질 일도,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며 일제에 협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었고 에하라의 지원을 받아 유럽 무대에서 지위를 굳혔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봉사했다.
그는 주류, 그것도 권력 지향적이었던 사람이었을까. 조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음악가로 살다가 조국이 독립한 뒤 25년 만에 귀국해 이승만 탄신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박정희의 쿠데타를 혁명으로 경축했던 것은 그런 지향을 유감없이 드러낸 게 아닐까.
안익태는 1962년에 교향시 ‘논개’, 가곡 ‘흰 백합화’, 추도곡 ‘진혼곡’ 등을 작곡했다. 그는 1965년 7월까지 런던심포니, 도쿄심포니, 런던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다. 그는 1965년 9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고 같은 해 10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귀화 스페인인 에키타이 안은 1977년 7월 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 있는 안익태 거리의 길가 담벼락 ⓒ유튜브 초유스의 동유럽 |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해온 이해영 교수는 이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다. “’국가’는 한 나라의 상징”인데 “법으로 공인된 ‘국가’가 아님에도 그냥 관습적으로 불러왔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일제뿐 아니라 나치에도 협력한 사실이 마침내 드러난 2019년,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돌을 맞는 올해에 우리는 그가 지은 국가를 어찌해야 할까.
직썰 필진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