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받은 안중근의 마지막 부탁
* 아래는 필자가 후배 정창현 소장과 함께 펴낸 <안중근家 사람들>(역사인 펴냄) 가운데 사형선고 관련 부분입니다.
(1910년) 2월 14일, 마침내 선고공판이 열렸다.
공판개시 7일, 검찰관의 신문개시 석 달 반 만이었다. 방청석은 판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방청객들로 가득 찼다.
오전 9시, 마나베 재판장을 필두로 검찰관, 서기, 통역이 입정했다. 안중근 외 피고인 3명은 법정 가운데 마련된 기다란 피고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자들도 몇 사람이 방청석에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마나베 재판장이 판결문 주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피고 우덕순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 조도선과 유동하를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압수물 중 피고 안중근의 소유이던 권총 1정, 사용하지 않은 탄환 1발, 탄창 2개, 탄환 7발과 피고 우덕순의 소유이던 권총 1정(탄환 16발 포함)은 몰수하고 그 외의 것은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재판정 모습. 오른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
우덕순은 검찰관의 구형보다 징역 1년이 추가됐으나 조도선은 6개월이 줄었다. 안중근과 유동하는 검찰 구형과 똑같았다.
곧이어 마나베 재판장은 ‘이유’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안중근 등 피고 4인의 죄상을 장황하게 언급한 후 “본 건의 재판권은 본 법원에 있는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마나베는 안중근에 대해 제국형법 제199조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함’에 해당하며 가와카미 총영사 등 3인을 살해하려 한 죄 등 네 개의 살인죄가 병합됐다고 설명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마나베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엄숙한 경호를 뚫고 많은 저명인사들이 모인 장소에서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그 행위에 의해 사형을 처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로써 안중근에 대한 사형이 확정됐다.
법정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피고 네 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유동하만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일 뿐이었다.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하얼빈 사건’ 재판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공판 첫날부터 공판이 진행된 일주일 내내 법정을 지켜본 한 외국 기자는 당시 안중근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안중근은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가 재판을 받는 동안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하면서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혹시라도 이 법정이 오히려 자기를 무죄방면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한 모습으로 법정을 떠났다.”- 영국 화보신문 <더 그래픽>, 1910.4.16.
안중근은 검찰관과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맞서 치열한 공판투쟁을 벌였다. 또 변호인들도 안중근의 무죄를 주장하는 등 나름으로는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재판 결과가 결론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런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판결 후 감옥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통탄해 마지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충의가 끝내 허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수차례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다가 문득 손뼉을 치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의 인민 된 죄로다.”
역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안중근은 답을 찾고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안중근은 그제야 분한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1심 판결에 대한 공소(항소)는 5일 이내에 결정해야만 했다. 안중근은 적잖이 고민스러웠다. 자신의 거사 목적과 동양평화의 길을 다시 법정에서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재판장은 민감한 발언에 대해서는 발언을 제지하거나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했다. 선고공판을 앞두고 안중근은 “일본국 4천 7백만 인격의 근수를 달아보는 날이다. 어디 경중 고하를 지켜보리라”고 했건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고심 끝에 안중근은 구리하라 전옥(典獄)을 통해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고등법원장 면담을 신청했다. 히라이시는 뤼순 법원의 최고 책임자였다.
2월 17일 히라이시와의 면담이 성사됐다. 안중근은 3시간여에 걸쳐 히라이시에게 1심 판결 불복사유와 하얼빈 의거의 본질인 동양평화론 등에 대해 장시간 설명했다. 안중근은 당시 상황을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옥 율원(栗原) 씨의 특별소개로 고등법원장 평석(平石) 씨와 만나 담화했다. 나는 사형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 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말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다 듣고 난 뒤에 감개하며 대답해 말하되,
“내가 그대에게 대해서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마는 정부 주권의 기관을 고칠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가 진술하는 의견을 정부에 품달하겠다.”
하는 것이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고마이 여기며,
“이같이 공정한 논평이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 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하고 나는 다시 청하되,
“만일 허가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 1책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대답하되
“어찌 한 달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므로 나는 감사하기를 마지못하고 돌아와 공소권 청구할 것을 포기했다. 설사 공소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뻔할뿐더러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고 하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2월 19일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담한 지 이틀 뒤였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 이전부터 결정을 내려둔 것이었다. 재판은 마치 꽉 막힌 벽을 보고 얘기하듯 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안중근은 차라리 <동양평화론>을 써서 남기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미완으로 끝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첫머리 부분 |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한 데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발행된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1910.3.7.) 보도에 따르면, 관선변호인 미즈노가 사형선고 다음날(2.15) 안중근을 찾아가 항소 여부를 묻는 자리에서 “조상의 명예로운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조 여사의 당부를 전했다. 안중근은 모친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몇 가지 점에서 판결이 불만족스럽지만 항소를 할 경우 겁쟁이로 비치는 것이 우려된다. 충분히 숙고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안중근이 항소를 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결과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모르긴 해도 2심에서 항소가 기각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설사 항소가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1심 판결(사형)을 파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안중근의 세계관과 평화사상을 담고 있는 <동양평화론>은 오늘날에 와서도 탁견이라는 평가와 함께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적잖은 글과 유묵(글씨)을 남겼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은 <안중근 자서전>으로 불리는 ‘안응칠 역사’다. ‘응칠(應七)’은 안중근의 아명으로 한때 자(字)로도 쓰였다.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 하얼빈 거사 때까지 안중근은 본명 ‘중근(重根)’ 대신 줄곧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 인연으로 자서전의 제목을 ‘안응칠 역사’라고 붙였다. ‘안응칠 역사’는 1909년 12월 13일부터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5일 탈고했다.
<동양평화론>은 ‘안응칠 역사’에 이어 쓴 것으로 그의 최후의 기록이다. 그러나 <동양평화론>은 아쉽게도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중근은 히라이시와의 면담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3월 25일로 예정된 사형집행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불과 열흘 만에 집필을 끝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히라이시는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서문과 전감(前鑑) 2장만 집필을 끝냈다. 나머지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 3장은 목차만 잡아놓고 손도 대지 못했다. 안중근은 3월 26일 교수대에 올라야만 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안중근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사 전날 동지들과 하얼빈 시내 사진관에서 양복을 빌려 입고서 찍은 최후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
거사 현장에서 체포된 직후의 안 의사 모습 |
뤼순감옥 수감 중 모습 |
순국에 앞서 빌렘 신부(가운데 등을 보인 사람), 두 동생 정근, 공근(빌렘 신부 왼쪽 두 사람)과 만나 마지막 유언을 전하는 안 의사(빌렘 신부 맞은편) |
3월 26일, 뤼순감옥 내 사형장에서 순국 직전 한복 수의로 갈아입은 안 의사의 최후 모습 |
해방 후 환국한 백범 김구 주석이 1946년 일본에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에 3의사 묘역을 조성하면서 맨 왼쪽에 안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올해로 안 의사 순국 108주기를 맞았으나 여태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모셔오지 못했다.
글.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