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날 확률에 대해
이별을 소화시키는 남자 제 9화
사람에겐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영혼의 향기와 같은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특정향수나 샴푸 ‧ 바디워시 등의 제품을 즐겨 쓴다면, 별 수 없이 그 제품의 향기를 풍기게 돼 있다. 미진이는 향수를 쓰지 않았다. 대신 R브랜드의 바디워시와 샴푸를 좋아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의 문을 열기만 해도 제품의 향이 훅 하고 코를 엄습할 정도였으니까. 결국 나도 그 향기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미진이와 함께 그 브랜드 매장을 방문했을 때 난 알게 됐다. 매장의 향기와 미진이의 집에서 맡았던 향기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향기란, 그 제품의 향이 아닌 미진이만의 특별한 향기임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미진이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됐다. 두 향기의 미묘한 간극 안에 언제나 머무르고 싶었다. 제품의 향기에 섞여 있는 그녀만의 살내음을 찾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그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났다. 사실 내가 더 좋아했던 건, 그녀가 뿜는 숨의 향기였다. 안겨있거나 키스를 할 때 내게 닿는 나지막한 숨결. 불규칙적인 숨소리. 그걸 감싸고 있는 따뜻한 향기가 좋았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 나온 숨을, 내가 다시 들이마신단 생각이 꽤 야릇하기도 했고.
내게 딱 들어맞는 향기를 찾긴 어렵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향기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다. |
마지막 바퀴를 걷는 동안, 그녀가 즐겨 쓰던 바디워시 향을 한 번 더 맡았다. 하지만 그녀일거란 확신은 없었다. 떨어져있던 시간만큼, 내 기억 속 그녀의 향기 역시 상당부분 옅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브랜드의 제품을 쓰는 누군가가 지나갔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미련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정문을 나서는데,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틀림없는 미진이였다. 상상처럼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진 않았지만 웬일인지 움직일 순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미동없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내가 첫 눈에 반했었던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안녕.
그녀를 다시 마주치는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수 없이 생각해 봤다. 언제 어떤 상황일지, 그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상상했었다. 그게 지금이라니. 심지어 내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건 오직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복잡한 수식을 풀고 있는 낙제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다.
Q. 그녀와 내가 다시 마주칠 확률은?
1. 서울특별시의 면적은 약 606㎢(605.21)다.
2. 한 사람이 서 있는 땅의 넓이를 넉넉히 1㎡ 라고 치자.
3. 서울을 벗어나지 않는단 가정 하에, 내가 이 곳 운동장 한켠에 서있을 확률은 1/606000000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진이가 서 있을 확률도 마찬가지.
4. 그럼 나와 미진이가 마주칠 확률은 무려 606000000 * 606000000 = 367,236,000,000,000,000 라는 얘기다.
5. 36경 7236조. 너무 거대해서 잘 와 닿지도 않는 숫자다. 거기다 우린 서울 뿐만이 아닌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니 전 세계의 면적 쯤으로 계산을 하는 게 옳을 거다. 제대로 된 확률 계산을 위해선 시간의 축까지 관여를 시켜야 할 거고.
그러니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계산하기도 벅찬 엄청난 인연임에 틀림없었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적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인연은, 하늘을 날아가던 새 한 마리의 깃털이 내가 찍어놓은 점 하나에 떨어질 확률이라고. 그 어마 무시한 확률을 이겨내고 만나 헤어졌던 우리가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 엄청난 우연을 그냥 보내버리긴 아깝단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미진이도 같은 마음일까 궁금해졌다. 아, 역시 난 아직도 이별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걸까.
북해도의 징기스칸 요리를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다며 즐겁게 방문했던 곳. 여기서 우린 헤어졌다. |
“또 여기 왔네. 우리 헤어졌던 곳인데.”
- 먹고 싶었다며.
“그랬지. 근데 그날 이후론 안 오게 되더라구.”
- 여기 체인점 생겼대. 너희 집에선 좀 멀긴하지만.
“그래?”
- ...뭐하고 지냈어?
“그냥, 그냥. 오빤?”
- 비슷하지 뭐.
“응.”
-응
“여기, 체인점도 맛있을까?”
- 글쎄. 똑같지 않을까. 참, 연애는 해? 소개팅 한 남자랑은 어떻게 됐어?
“오빤 변한 게 없네.”
그런가.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술을 마셨다.
“그 운동장엔 왜 왔어? 오빠 우리 동네 살지도 않잖아.”
- 볼일 있어서 근처 왔다가.
“나 오빠 본 적 있다?”
- 언제?
“있어. 언젠가.”
- 인사 하지 그랬어.
“어떻게 그래. 우리 끝났는데.”
그래. 우린 끝났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녈 마주쳤단 이유만으로 다시 가슴이 뛰어버린 걸까. 낯이 뜨거워졌다. 남자들은 확실히 시작과 끝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 짓지 못한다. 농담과 진지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랑과 집착. 이유와 핑계. 사랑과 이별의 경계까지. 잔을 비워내고 있는 미진이의 눈을 봤다. 웃고 있긴 했지만 알맹이가 없는 웃음이었다. 나를 보고 있는 눈 뒤쪽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이별을 위해 그곳을 방문한 건 아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대화, 조금의 격양된 논쟁, 양고기가 익어가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문득 이별을 얘기하고 말았다. |
“오빤, 우리가 왜 헤어진 거라고 생각해?”
- 글쎄. 사실 너가 소개팅만 하지 않았어도 난.
“미안해. 그건 정말 잘못한 선택이었어. 근데 오빠. 그게 우리 이별의 이유는 아냐.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왜?
“오빤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 날 바꾸려 했잖아. 물론 나도 그랬겠지만... 우린 서로의 노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더 욕심만 부렸던 것 같아. 그냥, 누구도 잘못한 게 아니라 너무 달라서 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
맞는 말이다. 이별이란 게 그런 거니까. 애초에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세계를 만들어 보려다가 그게 실패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렇다고 그 어긋남을 제대로 풀기 위한 노력이 다른 가능성을 찾는 거라니? 네 100프로의 행복을 위해 거짓말까지 하면서 소개팅을 해야 하는 거였어? 무슨 그런 합리화가 있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뜨겁게 달군 무거운 추 몇 개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우린 맥주 몇 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녀는 내게 몇 번이고 미안하단 얘기를 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사과였다. 울컥하거나 마음이 저미지도 않았다. 그녀의 합리화를 한 번 더 마주하기 전까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 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어진다면, 한 번 더 그녀를 안고 그녀의 향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맡고 싶단 그런 기대. 그 엄청난 확률을 이겨내고 동시에 찍어낸 점을, 다시 한 번 선으로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맥주5잔 만에, 역시나 우린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연인이란 확신이 들었다. 몇 달 전 우리가 헤어졌던 이 곳에서, 마침내 내 이별은 완벽하게 소화됐다.
그녀는 꽤 술에 취해버렸다. 택시를 잡아주려는 나를 극구 뿌리치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 조금 걸었다. 아무리 이별을 소화시켰다지만, 마지막으로 택시 번호쯤은 적어두고 싶었다. 얼마 있지 않아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한 남자와 그를 보며 반가워하는 그녀의 웃음을 봤다. 발길을 돌렸다. 친구? 발전중인 관계? 아니면 이미 만나고 있는 연인일까? 그녀는 나와 있었던 시간을 그에게 뭐라고 설명할까. 솔직하게 이야길 할까. 선의의 거짓말을 하려나.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바람이 불었다. 그녀가 떠난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향기는 나지 않았다. 얼마 전 까지 그녀가 입고 있던 내 외투에서도, 가누지 못하는 몸을 부축하느라 어쩔 수 없이 잡았던 손에서도, 그녀의 향기는 더 이상 나질 않았다. 그저, 어딘가에서 볼 수 있는 모 브랜드의 바디워시 향기가 진하게 났을 뿐이다.
이별소화레시피
같은 향수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향을 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유한 향기는 사용하는 제품뿐만이 아닌 다양한 것들로 구성된다. 눈빛, 목소리, 사용하는 단어, 앉아있는 분위기, 웃음의 모양... 그 모든 게 아우러져 한 사람의 향기를 만들어 내는 것 이다. 좋아하는 향기를 내게 머무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늘 가까이 곁에 두는 것. 그것이 처음이자 전부다. 향기의 여운이란 지독한 법이어서, 이별 시 모든 걸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바로 떠난 사람의 향기다. 그러니 그 사람의 향기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신호다.
맛집정보 : 이치류 서초점 /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39-9. 02-518-5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