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일반적이라 말하고, 나는 일방적이라 느끼고
이별을 소화시키는 남자 제 5화
그럴 수도 있는 일과 그러면 안 되는 일.
그 사소한 견해차가 결국 이별의 원인이 된다.
미진이와의 연애는 거의 동거수준이 돼버렸다. 난 주중의 이틀정도와 대부분의 주말아침을 미진이의 오피스텔에서 맞이했다. 일상을 함께 하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그녀는 집에선 늘 TV를 켜놓는다는 것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것, 잠을 청할 땐 늘 한쪽 다리를 내 무릎에 올려놓는 것과 코를 조금 곤다는 것, 가끔씩 입을 벌리고 자는데 그 모습이 갓난아기 같이 참 예쁘다는 것, 샴푸를 사용하고 뚜껑을 닫지 않는다는 것과 이틀에 한번 꼴로 팩을 한다는 것, 음식쓰레기 만지길 싫어하고 벌레라면 기겁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준 편지들 사이에 과거인지 현재진행인지 모를 외간 남자의 고백편지를 함께 섞어놨다는 사실까지.
여의도 미들급 스시야, 스시하츠호 |
아무튼 그녀는 연애가 진행될수록 먼 거리를 외출하는 걸 즐기지 않았고 (마치 여느 남자친구들처럼), 우리의 주말 데이트는 대부분 그녀의 집 혹은 집 근방에서 이뤄졌다. 그러다 가끔 맛집들을 검색해 외식을 하곤 했는데 그 중엔 주방장이 직접 스시를 내어주는 스시야(‘초밥전문점’을 이르는 말)의 비중이 꽤 높았다. 지금 도착한 스시야 역시 미진이의 오피스텔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그녀의 만족도가 높아 종종 찾았던 곳이다.
신선도에 민감한 어류를 다루는 대부분의 일식집은 주방을 오픈한다. 공개된 주방은 신뢰감을 준다. |
조리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건 다양한 종류의 각오와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동거도 마찬가지다. 그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동거를 시작했다간 다툼만 잦아진다. 미래를 함께 하고싶은 연인과의 동거는 분명히 로맨틱한 일이지만 단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생활 오픈에 따른 부담감, 개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스트레스, 수시로 확인하는 삶의 양식의 미묘한 차이와 그로 인해 유발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대표적인 단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큰 다툼을 피하기 위해 안일하게 저질러 버리는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확인하게 된다는 거다.
스스로를 투명하게 내보일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연애에는 도움이 된다. |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새벽 미진이 폰에 뜨던 남자의 메시지, 그리고 그걸 감추기 위해 허둥대던 그녀의 거짓말은 동거를 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문제였다. 찬장 한구석에 놓여있던 선물상자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청소를 하다 잠들었다던 어느 토요일 오후, 사실은 누군갈 만난 결과물이라는 것도 몰랐을거였다. 그럼 내 편지들 속에 섞여있던 그 남자의 편지를 읽을 일도, 그걸 왜 읽냐며 힐난하는 미진이의 표정을 볼 일도 없었겠지. 떳떳하지 못한 관계라면 왜 그 선물을 집에 방치했겠냐는 그녀의 변명과, 그사람이 집앞까지 찾아와 별 수 없었단 합리화를 들었을 때의 실망감도 당연히 들지 않았을거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우리였는데... 그녀가 불투명하다 느끼지 않았다면, 억지로 투명함을 찾기 위해 몰래 그녀의 휴대폰과 이메일을 훔쳐보는 한심한 행동따윈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의심에 중독된 우리의 사랑은 심각하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싸움과 화해도 메뉴처럼 선택할 수 있다면 좋을 듯싶다. 이별이란 메뉴는 추가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
그녀는 내 예민함이, 나는 그녀의 거짓말이 우리의 관계를 망칠거라 의심했다. 선의의 거짓말을 굳이 파고드는건 불필요한 집착이라 내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불투명하게 보일지라도 믿어주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나는 연애가 종교가 아닌 이상 무작정 믿음을 가지는 건 어려운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의 약속과 맹세로 매순간의 신뢰를 보장받을 순 없는거다. 우린 사건을 만들어낸 그녀와, 그 사건을 지나치지 못하고 더 불거지게 만든 내 의심 중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인지 수없이 비교하며 헐뜯고 싸웠다. 자신의 행동이 일반적인 것이고 상대의 반응이 일방적인 강요임을 서로 주장하면서.
오마카세란 주방장 마음대로 주는 코스요리다. 손님은 주방장을 믿고 그가 내어주는 요리를 먹는다. 이건 상당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과정이다. |
어떻게 했어야 우리가 덜 다툴 수 있었을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깨닫게 된 게 있다. 거짓말의 색상은 당한 쪽이 정해야 한다는 거다.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거짓말의 색깔을 나눈다. 검정색 거짓말과 다른 백색의 거짓말이 있다며, 이기적인 검정색과는 달리 백색의 거짓말은 상대를 위한 선의로 포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거짓말의 색상을 행위자가 정하면 안 된다는 거다. 그 거짓말이 밝혀졌을 시 거짓말에 당한 사람이 정해야 옳다. 행위자가 자신의 거짓말을 백색의 선의라고 아무리 설명해봤자, 그건 그저 잘못에 대한 합리화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신의 거짓말을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되려 상대를 나무라는 모습은 더 큰 이기심으로 다가올 뿐이고.
일방적인 오마카세에도 분명한 소통이 있다. 주방장은 손님에게 스시를 내어주며 ‘못 먹는 음식은 없는지, 밥의 양은 적당한지’ 등을 수시로 묻는다. |
준비된 스시 코스의 마지막인 디저트가 서빙됐다. 방금 막 옆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코스의 첫 스시를 다시 내어주는 셰프를 보며 나도 미진이의 사진을 지웠다. 모든 거짓말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별의 원인 역시 우유부단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언갈(나와의 관계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든, 혹은 자신의 이미지든) 잃어버리지 않으려 거짓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였다. 난 괜찮을 거라고.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면, 그 거짓말이 밝혀졌을 때 끝내버렸으면 되는 거였다. 그랬다면 그녀가 내게 확실히 사과를 하고 우리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이 좋고 싫고를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건 결국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그렇게나 원망했던 그녀의 이기심과 내 이기심은 사실 별반 다를 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별소화레시피
불투명한 사람과의 연애는 불안하다. 안정적인 연애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신뢰이기 때문이다. 단단한 신뢰가 있다면 연락의 빈도나 자유와 방종간의 경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신뢰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신뢰를 쌓기 위해선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쳐다보는 시야를 혼탁하게 만드는 거짓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다. 선의의 거짓말은 불필요한 치장이다. 사랑에 치장은 필요 없다. 우리는 연애를 통해, 더욱 두껍게 화장하는 법보단 있는 그대로의 쌩얼을 내보여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배워나가야한다.
맛집정보 : 스시하쯔호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61 금호리첸시아 지하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