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밀 막걸리와 밀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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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 사진 출처 : 2024 양평 밀축제 홈페이지 캡처 |
밀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보조식량으로 쓰였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엄연한 주식으로 쌀과 함께 세계의 2대 식량작물로 자리매김해왔다.
가루로 만들어 제면, 제빵, 제과, 공업용 등으로 쓴다. 또한, 간장과 된장의 원료로도 쓰이며 밀기울(밀을 빻아 체로 쳐서 남은 찌꺼기)은 좋은 사료가 된다.
우리나라의 밀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기원전 200∼100년에 재배한 것으로 추정되는 밀이 평남 대동군 미림리에서 발견됐고 경주의 반월 성지, 부여의 부소산 백제 군량 창고의 유적에서도 밀이 나왔다.
옛날 중국의 토기에 남은 흔적을 보면 밀을 대충 분쇄해서 죽이나 오트밀처럼 끓여 먹은 것 같다. 이렇게 먹으면 거칠고 맛이 없어 조, 기장보다 낮은 취급을 받던 곡물이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밀의 특성은 벼보다 추위에 강하고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강수량이 많은 여름을 제외하면 건조한 한반도의 기후에 알맞은 작물이다.
주로 건기인 봄이나 가을에 파종해 초여름에 수확했다.
보리와 함께 '양맥'(兩麥)이라 불렸고, 주요 작물로 재배됐다. 다만 수차로 제분하는 중국과는 다르게 연자방아나 절구로 가루를 내다보니 대량생산이 어려웠다. 그래서 빵이나 국수보다는 주로 알곡을 쪄서 밀밥을 만들거나 누룩을 만드는 데 많이 썼다.
6·25 이후 우리나라는 부족한 식량 확보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별 활용성이 없는 밀은 쌀농사를 방해하는 작물로 인식됐다. 거기다 미국이 원조해준 미국산 밀이 싼값에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밀 재배는 계속 줄어들었는데 역설적으로 밀 소비는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1960년대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양곡 소비 절약을 위해 1963년부터 서민의 술인 막걸리 제조에 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저렴한 외국산 밀가루로 재료가 대체돼 막걸리를 빚게 됐다.
1977년 크게 풍년이 들어 쌀 수확량이 사상 처음으로 4천만석을 돌파해 14년 만에 쌀로 막걸리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 이후 쌀 소비가 늘어 1979년에 다시 금지했다.
1980년대부터 점차 쌀 생산성이 향상하고 소비가 줄어들자 1990년부터 쌀로 막걸리 빚는 것을 다시 허용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배경 이야기를 봤을 때 1960∼80년대에 마신 막걸리는 모두 밀로 만들었다.
좋은 술, 좋은 맛 여부를 떠나서 거의 30년을 밀 막걸리를 마셨으니 그 맛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쌀막걸리가 다시 나와 맛보니 그간 마셨던 밀 막걸리에 비해 가볍고 덜 구수했다.
하지만 시장은 빠르게 쌀로 만든 막걸리 위주로 재편됐다. 현재에는 밀 막걸리가 구하기 어려운 술이 됐다.
하지만 이전의 밀 막걸리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새로운 막걸리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밀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 아직 있다.
이 중에는 향수나 양평 밀 막걸리, 밀물 탁주같이 최고급으로 만든 밀 막걸리도 있다.
![]() 밀로 만든 막걸리 시판 제품 사진 출처 : 각사 홈페이지 |
밀은 구하기가 힘들고 비싼 까닭에 가장 좋은 가루라는 뜻을 가진 '진말(眞末)'이라고도 불렸다. 각종 요리나 술을 빚을 때 소량의 진말이 첨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귀한 밀로 만든 밀소주는 당연히 양반 가문에서나 빚을 수 있던 고급술이었다.
최근 맹개술도가(대표 박성호)에서 안동 지역에 전해 내려왔지만, 그 맥이 끊긴 밀소주를 1540년경의 고조리서인 '수운잡방'에 적혀있는 방식대로 복원했다. 소주의 이름도 수운잡방에 나온 그대로 '진맥소주'라 명했다.
![]() (왼쪽부터) 양평밀 소주 53 (우보주책), 안동진맥소주 40도·53도 (맹개술도가) 사진 출처 : 각사 홈페이지 |
또한 최근에는 우보주책(대표 김희철)에서 평밀 소주 53(정확히는 쌀과 밀을 같이 사용)을 만들었다. 은행장 출신으로 자칭 50년 음주 경력이라는 김 대표의 뚝심이 돋보이는 술이다.
밀 막걸리는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막걸리다. 밀소주는 지금도 귀한 술이다.
추억과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 밀술 한잔 어떨까?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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