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고 숭고했던 '순이'들의 삶을 복원·조명하다
정찬일 씨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펴내
책을 읽어나갈수록 불편한 과거의 민낯과 마주하게 된다. 남녀불평등시대의 희생자들에게 진 부채 의식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더이상 역사를 승리한 남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한 대학교수의 서평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의 주인공은 남성이었다. 여성은 그 부수적 존재일 뿐이었다. 남존여비가 지배한 조선시대엔 여성의 이름은 사실상 없었다. '말년', '분이', '막동'으로 대충 불리다가 시집가면 '○○댁', '○○어멈' 정도로 호칭이 바뀌었다.
여성 이름이 공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다. 하지만 푸대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들을 낳으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바라며 정성껏 작명했으나 딸은 즉흥적 이름으로 대충 지었다. '간난', '언년', '섭섭'이 등등. 해방 무렵에는 일본식 작명 영향으로 '영자', '순자'처럼 '자(子)'가 들어간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직업 세계에서는 '순이'가 단연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름에 '순(順)'자가 가장 많이 들어간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도시화,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도시와 공장에는 '순이'들이 넘쳐났고, 어느덧 '순이'는 어린 직업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순이'는 직업에 따라 세분화했다. 식모는 '식순이', 버스안내양은 '차순이', 여공은 '공순이'로 불렸고, 술집 종업원은 '빠순이'라 했다. 여성들이 가장 활발히 진출한 식모·버스안내양·여공은 뭉뚱그려 '삼순이'로 일컬어졌다. '순이'가 일종의 사회적 비하 단어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단한 식모살이 만평(1962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 |
저널리스트 정찬일 씨는 이 땅의 수많은 '순이'들의 처절하면서도 숭고했던 삶을 복원해 조명한다. 신간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은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 '순이'의 역사를 풍부한 기록과 사진을 바탕으로 돌이켜 본다. 감춰지고 잊힌 삶이자 또 다른 한국 현대사인 이들 '순이'의 이야기로 현대사의 그림자와 아픔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 시절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여자는 순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이름처럼 순하게 고분고분 잘 따르라는 뜻. 하지만 화려한 경제개발 뒤꼍에서 그들은 그저 '순'하게 살 수는 없었다. 인권 유린과 매연,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며 청춘기를 보냈다. 이름과는 반대로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것. '억순'이라는 별칭은 그 모순을 반영한다.
이렇듯 밀려나고 물러났어도 그들의 삶을 속 깊이 살펴보면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이 흐른다. 저자는 "그것은 헤게모니 쟁탈을 좇는 욕망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처절함이었고, 타인을 위해 조각조각 부서지는 희생을 무릅쓴 숭고함이었다"고 들려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그런 그들에게 동정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비아냥대거나 조연으로만 취급했지 주역으로 대접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있는데 이렇게 계속 외면할 텐가? 그들이 대체 누구인지 알기나 하는가? 부채 의식을 걸머진 저자가 이번에 책을 집필한 동기이자 취지다.
(좌)만원버스의 아슬아슬한 개문발차와 버스안내양, (우)가발공장의 여공들(1965년 10월 31일) |
식모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 여공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생활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그중 식모는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가장 많은 여성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봉건적 주종관계와 '여자는 집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이 여전히 사회 근간을 이루던 시절에 여성들은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집 밖으로 내쫓기듯 나가야 했다. 이들 어린 여성이 할 수 있던 일은 '남의 집 안'에 들어가 '하녀'가 되는 것뿐. 월급은커녕 그저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고, '사적 영역'에 머물던 탓에 온갖 부조리와 인권 유린을 감내해야 했다.
거칠고 말썽 많은 남성 차장 대신 상냥하고 부드럽게 승객을 모시겠다는 의도로 찾은 대상이 버스안내양이었다. 하지만 고단한 여건에서 억척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루에 18시간씩 일하다 보면 파죽이 되기 일쑤였다. 개문발차하고, 알몸 수색 등 온갖 위험과 인권침해에 노출되면서도 '돌계집'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버스안내양은 1981년 승객들이 직접 요금을 내는 이른바 '원맨버스(시민자율버스)'가 선보이며 시나브로 사라지기 시작해 1989년 완전히 사라진 직업이 돼버린다.
여공은 유신정권 시절에 노동집약적 '산업역군'으로 육성됐다. 이들의 여건은 식모나 버스안내양보다 다소 나았으나 역시 '순하게' 부조리를 감내해야 했다. 공단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상호 공감과 연대감이 생겨났고, 이는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발판이 됐다. 유신정권 종식의 단초가 된 YH무역 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농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1990년 후반의 IMF 사태와 그로 인한 신자유주의, 비정규직화의 첫 희생양이 된 것은 바로 '아줌마' 노동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들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에 이어 하나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현대판 삼순이'라고 할 수 있는 동남아 이주 여성들 이야기다. 저자는 "이름만 달리한 '삼순이'가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며 "과거의 '삼순이'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유사한 동남아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현대판 삼순이'에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고 책의 에필로그에서 첨언한다.
마지막으로 책 제목을 '삼순이'로 붙여야 했던 저자의 고민과 양해의 말을 들어보자.
"'과연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이 합당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 가장 고단했던 그들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비하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충실하기로 결단 내렸음을 양해 바란다."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책과함께. 524쪽. 2만5천원.) |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