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타고 떠나는 도쿄 근교 여행
일본은 '철도의 왕국'이다. 일본에서 꼭 타봐야 하고, 타볼 수밖에 없는 교통편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철도망이다.
일본 여행의 시작점인 수도 도쿄를 가볼 만큼 가봤다면, 혹은 번화한 대도시가 조금 식상해졌다면 열차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보자. 창밖을 구경하며 한두 시간만 달리면 도쿄 시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가득한 명소들이 기다리고 있다.
40년 달린 열차, 낡음보다는 고풍의 멋
기차 창에 게곤 폭포와 주젠지 호수 전경을 합성했다. [사진/한미희] |
도쿄 도심에서 열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닛코(日光)는 100년 전 유럽인들이 반한 곳이다. 고원지대의 아름다운 자연과 세계문화유산을 품은 이곳을 찾는 한국인은 아직 많지 않지만, 일본인과 유럽인으로 북적이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도쿄도(都)가 포함된 간토 지방의 북쪽에 자리한 도치기현 닛코시. 도쿄에서 가려면 장거리 운행 특급열차를 타야 한다. 도쿄 동북쪽 아사쿠사 역에서 출발하는 도부(東武)철도의 '스페시아'(SPACIA)에 올랐다. 이 열차는 운행한 지 40년이나 됐다고 하지만 낡았다기보다는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더 안긴다.
닛코시의 서쪽, 꼬불꼬불 고갯길을 올라가 닿는 고원지대는 깊숙하다는 뜻이 지명에 들어가 '오쿠(奧)닛코'로 불린다. 이곳은 해발 1천269m에 형성된 주젠지(中禪寺) 호수를 품고 있다.
닛코국립공원에 있는 주젠지는 2만 년 전 난타이산(男體山, 2,486m)이 분화하면서 물길을 막아 만들어진 둘레 25㎞의 거대한 호수다. 해발이 높은 덕에 한여름에도 시원해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부터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피서지가 됐다. 일본 리조트 호텔의 원조인 가나야 코티지 인이 1873년 이곳에 문을 열었다.
주젠지 호수와 난타이산 [사진/한미희] |
주젠지 호수를 즐기는 정석은 역시 유람선이었다. 처음엔 고루하다고 생각했지만, 갑판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절정에 오른 주변의 단풍과 가을볕에 반짝이는 물결,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호수 북쪽 하얀 구름을 머리에 인 우람한 난타이산은 짙은 초록과 노랑, 주황, 갈색 나뭇잎들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자작나무의 하얀 가지가 어우러져 거대한 한 점의 유화를 펼쳐놓은 듯했다.
카약에 올라앉아 맑은 호수의 물을 직접 젓는 사람들도,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도, 호숫가에서 유람선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모두 한 폭의 그림이 됐다.
배 위에서의 한 시간은 훌쩍 흘렀고, 고산 지대임에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좋았던 가을볕과 바람에 감사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올가을은 이걸로 됐다.'
주젠지 호수를 사랑했던 영국 외교관
영국 대사관 별장 2층 테라스에서 보이는 주젠지 호수 [사진/한미희] |
도치기현 현청 소재지인 우쓰노미야에서 더 북서쪽으로 떨어진 닛코를 잇는 닛코선(JR 닛코선) 철도가 개통한 것은 1890년이었다. 이후 도쿄에서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피서지로 주목받으며 각국 대사관 별장과 호텔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닛코의 주젠지 호수를 남달리 사랑했던 외국인은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였다. 1872년 닛코를 처음 방문해 고향인 영국 레이크 지방을 떠올리게 하는 주젠지 호수에 반한 그는 1875년 닛코를 소개하는 영문 가이드북을 펴냈고, 1896년 호수 남쪽에 산장을 지었다.
영국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도 사토의 초청으로 이 산장에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산장은 훗날 영국 대사관의 별장이 되어 2008년까지 이용됐다.
2010년 도치기현에 무상 양도된 후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2016년 여름. 검은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별장의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주젠지 호수의 풍경은 유람선에서 한번 빼앗긴 마음을 다시 한번 사로잡았다. 한쪽에 마련된 카페에서는 스콘을 곁들인 홍차를 마시며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삼나무로 지은 이탈리아 대사관 별장의 1층 툇마루 [사진/한미희] |
영국 대사관 별장에서 나와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1997년까지 사용되던 이탈리아 대사관 별장이 나온다. 1928년 도쿄에서 활동하던 체코 출신 건축가 안토닌 레이먼드가 지은 이 별장은 삼나무 껍질과 나무판을 사용해 건물이 주변 환경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도록 했다.
별장 1층에는 호수를 향해 널찍한 툇마루를 만들어 놓았지만 아쉽게도 외벽을 따라 보수공사용 구조물을 설치해 놓아 건물 외관과 주변 풍광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유람선과 대사관 별장 기념공원은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유람선은 4월 중순, 별장 공원은 3월까지) 운영을 중단한다. 쉬는 기간에는 설원이 된 오쿠 닛코 일대에서 눈꽃 축제가 열린다. 호반 주변의 설경과 함께 인근 유모토 온천과 스키장, 스노슈(snowshoe)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장대한 게곤 폭포
아케치다이라 전망대에서 보는 게곤 폭포 뒤로 주젠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산과 호반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한미희] |
주젠지 호수의 맑은 물과 호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지만, 호수의 물이 빠져나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게곤(華嚴) 폭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물은 호수의 동쪽 끝 절벽에서 97m를 곧장 쏟아져 내린다.
게곤 폭포의 장대한 모습은 세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선 아케치다이라 로프웨이를 타고 해발 1천373m에 있는 전망대에 오른다. 폭포에서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이곳에서는 게곤 폭포 뒤로 주젠지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산과 호반의 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하단 전망대에서 보는 게곤 폭포 [사진/한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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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와 100∼200m 거리를 둔 전망대에서는 바위 절벽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절벽 중단에서는 복류수(伏流水)가 12줄기로 흘러나와 어우러진다. 상단 전망대에서 바위를 뚫어 설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m를 내려가면 용소 근처의 하단 전망대로 갈 수 있다. 이곳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올려다보는 게곤 폭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세계문화유산 '닛코의 신사와 사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앞에 조선통신사가 전달한 삼구족이 있다. [사진/한미희] |
닛코에는 100년 전 외국인을 매혹한 자연유산 외에도 일본인에게 더욱 의미 있고 세계에서 인정받은 문화유산이 있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닛코의 신사와 사원'이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도쇼구(東照宮), 천태종 사원 단지인 린노지(輪王寺), 난타이산의 다른 이름인 후타라산에서 이름을 딴 후타라산(二荒山) 신사(神社)를 아우른다. 린노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에도 막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무덤이 있다.
평일인데도 전국 각지에서 수학여행 온 어린이와 학생을 비롯한 일본인 관광객과 일부 유럽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금박과 화려한 조각 등으로 더없이 호화롭게 꾸민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한국의 절로 치면 대웅전 같은 가장 중요한 건물 안은 한참 동안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붐비는데, 그 안에서 기념품과 부적을 대놓고 홍보하고 판매하는 풍경이 사뭇 낯설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의 간곡한 청원을 받아들여 닛코를 방문했던 조선통신사가 전달한 선물인 조선종이 도쇼구에서 가장 화려한 요메이몬(陽名門) 앞에, 삼구족(향로, 촛대, 꽃병)이 이에야스의 무덤 앞에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현장에서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닛코 특선 음식 '유바'
닛코 특선 음식 유바 [사진/한미희] |
닛코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라면 단연 '유바'(湯葉)다. 유바는 두유를 가열할 때 표면에 생긴 막을 걷어낸 것으로, 신사와 사원의 도시 닛코에서 많은 수행자가 먹었던 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실제 유바를 보기 전, '두유 껍질'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불교 신자들이 주로 먹는 '정진(精進) 요리'의 하나로 생유바(유바 사시미)를 처음 받아보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여러 겹 겹쳐진 유바의 끝을 잡고 들어 올리면 끊어지지 않고 찰랑거릴 정도로 탄력이 있다. 입에 넣으면 맛은 연두부처럼 부드럽지만, 훨씬 졸깃하다. 튀긴 유바는 두부를 얇게 썰어 튀긴 유부와 얼추 비슷하다.
'작은 에도' 가와고에 당일치기 여행
가와고에의 상징인 시계 종탑 [사진/한미희] |
도쿄도에서 서북쪽으로 인접한 사이타마현의 가와고에(川越)시는 에도 시대의 모습이 남아있어 '작은 에도'(고에도)라 불린다. 한국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 고에도 맥주가 바로 이곳의 특산물이다. 도쿄 부도심인 이케부쿠로 역에서 기차로 30분 남짓이면 도착하기 때문에 당일치기 여행으로 부담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는 창고 형태의 전통 가옥이 모여 있는 구라즈쿠리 거리다. 일본의 전통 가옥은 목조가 보편적이어서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1893년 대화재 때 비단 포목 거상이었던 오사와가(大澤家) 주택만 불에 타지 않고 남았는데, 그 집이 두꺼운 흙벽으로 지은 구라즈쿠리 건물이었다. 이후 새로 짓는 건물들이 구라즈쿠리 방식으로 지어지면서 전통 가옥 거리가 만들어졌다.
가와고에의 상징으로 꼽히는 시계 종탑 도키노카네(時の鐘)는 약 400년 전인 에도 시대 초기부터 있었다. 대화재 직후 재건된 현재의 시계 종탑은 여전히 하루 네 차례, 오전 6시와 정오, 오후 3시와 6시에 종을 울린다.
가와고에에서는 고구마가 많이 난다. 고구마로 만든 다양한 간식을 맛보며 걷는 것도 재미다. 전통 가옥 거리 뒤편으로는 막과자, 엿, 전병 등 전통 과자를 파는 가게들이 모인 가시야요코초(과자골목)도 있다.
가와고에의 가장 큰 전통축제인 가와고에 마쓰리는 10월 세 번째 주말에 열린다. 축제는 단 이틀 열리지만, 가와고에 축제회관에서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가는길
기차역 [사진/한미희]
[닛코]
도쿄 시내에서 장거리 운행 특급열차를 타는 것이 가장 편하다. 간토 지역에서 운행하는 사철인 도부철도나 옛 국철인 JR를 이용할 수 있다. 도부철도는 아사쿠사역에서 1시간 50분, JR는 신주쿠역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각 철도회사의 한국어 홈페이지에서 시간표와 요금, 노선도, 외국인 전용 패스 등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닛코 패스를 이용하면 도쿄 시내에서 닛코까지 왕복 열차 외에 닛코 지역 안에서 자유롭게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가와고에]
이케부쿠로역에서 도부 도조선 급행을 타면 26분이면 도착한다. JR는 시부야역이나 신주쿠역에서 사이쿄선을 탄 뒤 오미야역에서 가와고에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은 50분 정도 걸린다.
주변 둘러볼 곳
[닛코]
유노코 : 주젠지 호수 북쪽에 있는 온천 호수인 유노코(湯ノ湖)는 1902년 영국인 토머스 글로버가 일본에서 처음 민물송어를 방류하고 영국식 낚시를 전파한 플라잉 피싱의 성지다. 호수 둘레는 3㎞ 정도로 한 시간 남짓 산책하기 좋다. 유노코에서 흘러내리는 높이 70m, 폭 최대 25m의 유다키 폭포는 용소 근처에 전망대가 있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을 올려다볼 수 있다. 두 호수 사이에 람사르 등록 습지인 센조가하라가 있어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가와고에]
시립미술관 & 박물관 : 전통 가옥 거리 동쪽에 있는 가와고에성 혼마루고텐(本丸御殿) 인근에 있다. 구라즈쿠리 요소가 가미된 미술관에서는 가와고에와 인연이 깊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가와고에 성터에 자리 잡은 박물관에서는 가와고에 역사와 민속에 대한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도쿄 스미다구]
도부뮤지엄에서 기차가 달리는 간토평야를 재현해 놓은 모형을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한미희]
도부뮤지엄 : 도쿄도 스미다구 히가시무코지마역에 있는 철도 박물관. '철도의 나라' 일본에서, 철도로 움직이는 도쿄에서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하루 네 차례 기관사가 경적을 울려주는 증기기관차부터 170량의 열차가 간토평야를 달리는 대형 입체 모형, 열차를 직접 운행해 볼 수 있는 시뮬레이션 등이 '철덕'(철도 오타쿠)을 사로잡는다. 히가시쿠무코지마 역을 오가는 열차를 바퀴 높이에서 관찰할 수도 있다.
도쿄스카이트리 : 도쿄타워(333m)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634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파탑이다. 도쿄 시내에 고층 빌딩이 많이 들어서면서 생긴 전파 음영지역을 해소하기 위해 세워졌다. 340∼350m에 전망대와 카페, 상점 등이 있고, 445m 특별 전망대에서 최고 높이 451.2m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날씨가 아주 좋으면 106㎞ 떨어진 후지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닛코·가와고에=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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