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가까이 하지 말라
활자라면 뭐든지 좋았던 사노 요코
옛날에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잡지 <라이프>를 보려면 미국에 직접 구독 신청을 해야 했다. 물론 전부 영어로 된 잡지다.
아침에 만원전철을 타면, 나는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주장하는 고등학생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튼 옛날 고등학생들은 어른인 척하는 걸 좋아했다. 그 오빠는 <라이프>를 늘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 그것만으로 모두 ‘오!’ 하고 주목하게 된다. 그 오빠는 반으로 접힌 <라이프>를 감싼 갈색 띠지를 만원전철 안에서 쫙쫙 찢곤 했다. 오, 미국에서 온 <라이프>다, 멋지다, 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 전철 안에서 쫙쫙 찢으려고 아마 어제 도착한 새 <라이프>를 고이 모셔두고 참았을 게 분명하다. 그 오빠의 우쭐한 표정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어쩌면 허세가 그 오빠의 영어 능력을 향상시켰는지도 모른 다. <라이프> 다음엔 프랑스어 원서, 그 다음엔 독일 철학서로 진화했을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좀 아니꼬웠다.
그런 나도 사실은 허세를 부렸다. 앙드레 지드, 모파상, 톨스토이. 서양 작품이 소세키나 후지무라보다 급이 높았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할 것 같은 행위를 하는 부분에서만 눈을 크게 뜨고 읽었다.
그런 책이 아니면 야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니까.
『비계 덩어리』에 눈을 딱 붙이고 보는데 아버지가 책을 낚아채며 “이런 책은 읽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모파상이 야하다는 걸 알았을까? 다음 날 아버지가 도서관에서 세계문학전집의 제1 권, 루소의 『고백록』을 빌려왔다.
나는 읽자마자 기겁을 했다. 루소가 마차 안에서 묘령의 여인을 유혹한다. 아버지는 『고백록』을 읽지 않은 것이다.
중학생이었던 내 머릿속은 야한 것으로 가득 채워졌고, 허세를 부리기 위해 책을 읽는 동안 완전히 독서에 빠져버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에서 책을 읽으며 걷다보니 눈이 점점 나빠졌다. 활자라면 뭐든지 좋았다.
이건 허세가 아니라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저 추한 소녀일 뿐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는 산발에 세일러복 넥타이는 잊어먹고 책을 읽다가 전봇대에 부딪힌다. 당연히 인기가 없다.
고등학생 때도 학교 복도를 걸으며 책을 읽었다. 실내화를 꺾어 신고, 얼굴은 여드름투성이. 당연히 인기가 없다. 인기가 없으니 더더욱 책만 읽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읽은 책은 다 쓸모없었다. 열세 살 소녀한테 『안나 카레니나』가 이해될 리 만무했다.
열세 살의 건방진 친구가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 『그 후』 『문』의 순서로 읽는 거야” 하고 지껄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소세키를 읽고 감동하려면 그에 걸맞은 인생이 필요했다.
시간만 허비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남자랑 노는 편이 훨씬 나았다.
멋을 잔뜩 부리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청춘이 훨씬 즐겁지 않았을까?
하지만 불행한 시대여서 즐길 만한 오락도 없었고 멋을 부리려 해도 그럴 여지가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어른들은 걱정하지만 활자보다 재미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이니까.
책은 인류의 지혜로 가득하지만 그와 함께 독도 포함되어 있다. 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그 독에 영혼을 빨리고 있는 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지 말도록. 가까이 하다보면 입맛을 다시며 꿀꺽하고 싶은 것이 잔뜩 보이니까. 가까이 하지 말라니까. 읽고 싶겠지만.
글 | 사노 요코 사진 | 출판사 제공
사노 요코 저/이수미 역 | 샘터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가 가장 그녀다운 에세이집으로 돌아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맞이한 일본 패전의 기억부터 가난했던 미대생 시절,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쳐 홀로 당당하게 살아온 일생을 그녀 특유의 솔직함으로 그려낸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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